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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 오늘의 세상 2018년 4월 17일 화요일

modory 2018. 4. 17. 09:09



오늘의 세상 2018417일 화요일

 

[더듬어민주당 댓글 조작 파문] 드루킹 협박 뭐였기에청와대가 '추천 인물' 면접봤나 / 문재인의 심복이라는 김경수 "대선 후 인사 안 들어주니 등돌리면 어찌되나 보자더라"
백원우 민정비서관이 3월 청와대로 추천 인사 불러 1시간 만나
김경수 첫 회견땐 "무리한 인사 요구"어제는 "인사청탁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김경수 의원은 16일 인터넷 댓글 조작 혐의로 구속된 김모(필명 드루킹)씨가 오사카 총영사로 추천한 모 변호사의 이력서를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로 '()협박'을 당했다고도 했다. 그런데 청와대 민정비서관은 경위를 조사한 게 아니라 해당 변호사를 불러 오히려 인사 면접을 했다. 야권에서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라며 "도대체 문재인 대통령 최측근인 김 의원과 김씨가 어떤 관계였길래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고 했다.
'드루킹' 누구길래 청와대까지 나섰나
김 의원은 대선 직후 김씨가 국회 의원회관으로 찾아와 오사카총영사로 모 변호사를 추천했다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열린 인사 추천 시스템이라서 추천된 인사가 대형 로펌에 있고 일본 유명 대학 졸업자이기도 해서 청와대에 전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연말 되기 전에 이분은 어렵다고 전달하니 김씨가 그때부터 반 협박성, 반 위협성으로 '우리가 등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다"면서 "민정수석실 행정관 인사도 요구해서 거리를 뒀다"고 했다. 올해 2월까지 김씨의 요구가 계속되자 김 의원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을 전달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실세인 김 의원이 김씨로부터 압박을 받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전달한 것은 비상식적이란 지적이 나온다.

이후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다. 김 의원에게서 이 얘기를 들은 청와대 백원우 민정비서관은 김씨가 추천한 인사를 3월 초에 직접 면접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백 비서관이 변호사를 연풍문 2층으로 오라고 해서 1시간가량 만났다""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기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백 비서관은 조국 민정수석에게도 이를 구두로 보고했다고 했다. 김 의원이 김씨에게 사실상 인사 협박을 당했는데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조사는커녕 김씨 추천 인사를 면접했다는 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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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7/2018041700333.html

[사설] 의원, 댓글 주모자와 대체 어떤 관계였나

김경수 민주당 의원은 16일 댓글 조작 혐의로 구속된 김모(필명 드루킹)씨와의 관계에 대해 "대선이 끝나고 (김씨가) 오사카 총영사로 한 분을 추천했다"며 이를 "청와대 인사수석실로 전달했다"고 말했다. "(청와대로부터) 어렵다고 연락받아 (김씨에게) 전달했다"고도 했다. 김씨와의 관계가 단순한 지지자와 정치인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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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6/2018041602485.html

 

[류근일 칼럼] 탄핵 이후 과거 운동권들, 행정·사법부 등 공권력 장악/혁명으로 가고 있다

철 지난 민족·민중주의로 대한민국 70를 왜곡·폄하 / 새는 양쪽 날개로 난다더니 "왼쪽 날개로만 날겠다"는 건가

한국은 지금 몇 시인가? 어디에 와 있는가? 어제와 다름없어 보이면서도 확실하게 달라진 오늘혁명이다. 이 혁명을 정확하게 인지(認知)하지 않고서는 지금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다. 대한민국 70년사()를 긍정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처지에선 이 혁명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해야만 앞으로 제대로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오늘의 혁명은 탄핵 사태에 이은 왕년의 'NL(민족 해방) 민중민주주의' 운동가들의 권력 장악에서 시작되었다. 혁명 주체는 공권력, 행정 부처, 문화 권력, 사법부, 각계각층 공직(公職)의 코드 인사를 통해 국가 전반을 장악했다. '적폐 청산'을 통해선 반대 세력을 무력화하고, 연방제, 토지 공개념 개헌을 통해선 그들의 혁명을 '새 체제'로 만들려 한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선 한반도 문제가 '자유냐 전체주의냐?'의 틀에서 '우리 민족끼리냐 한·미 동맹이냐?'의 틀로 이동하지 않을까 주목된다. 이 바람은 6월 지방선거와 다음번 총선을 휩쓸면서 루비콘강을 건너려 할 것이다.

혁명의 콘텐츠는 낭만적 민족주의와 민중주의가 뒤범벅된 정서다. 1960~70년대의 제3세계 혁명론, 1980년대의 종속이론, 주체사상, 2000년대의 반()세계화, 코뮌(주민자치 공동체) 사상, 직접민주주의, 체 게바라, 차베스 같은 것의 잡탕이다. 이 정서는 근대 문명, 세계시장, 도시화, 첨단 기술을 싫어하고 전()근대 농촌 공동체를 좋아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이고, 서방세계를 제국주의 약탈자로 본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이며, 개인의 자유보다 작위적 평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민중주의다. 
이런 정서는 8·15 해방 공간에도 있었다. 그 극단화한 사례가 박헌영(남로당수), 이현상(지리산 빨치산), 김달삼(제주 4·3 주동자)이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그들의 혁명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헛소리를 듣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봉화불이 타올라 산줄기를 따라 불꽃 행렬을 이루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그 봉화불의 기세를 따라 다 같이 함성을 지르며 투쟁의 대열을 이루었던 때도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불꽃 행렬'이 구()소련, 동유럽, 북한에 남긴 건 무엇이었나? 황폐, 폭압, 몽매(蒙昧), 수용소, 빈핍이었다. 남로당을 종말 처리한 것도 김일성이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범람하는 '민족·민중' 파고(波高)는 물론 '70년 전'과는 다른 '70년 후' 현상이다. 그럼에도 1948년의 대한민국을 단독 정권이라고 왜곡, 폄하하는 점에선 '70년 전''70년 후'가 다르지 않다.

일부에 의하면 "4·3 민중 항쟁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남한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와 민족의 통일 독립을 열망한 민중의 자주적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 놓으면 대한민국은 뭐가 되나? '태어나선 안 될 나라'밖에 더 되나? - 이하 생략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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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6/2018041602496.html

[만물상] '깨끗한 얼굴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있다. 가게 앞에는 양 머리를 걸어놓고 실제론 개 고기를 파는 걸 가리킨다. 그럴듯한 간판으로 사람을 속이는 걸 풍자하는 고사성어다. 중국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내린 조서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양 머리를 걸고 말린 말 고기를 팔고, 도척이 공자 말씀을 한다." 도척(盜跖)은 춘추시대 대도(大盜). 남의 것 훔치는 걸 전문으로 하면서도 입만 열면 의리와 용기를 얘기했으니 위선의 전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지난달 안희정 충남지사는 직원 행사에서 '미투(나도 당했다)' 운동을 언급하며 "남성 중심적 권력 질서에 따른 폭력이 다 희롱이고 폭력"이라고 했다. 그 당시 이미 여성 비서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이 뒤늦게 드러났다. 참여연대 출신 김기식 금감원장은 평생 1만원짜리 접대도 거부했을 것 같은 이미지를 쌓아왔다. 접대성 출장을 다녀온 다른 사람들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일갈했다. 그런 그가 구악(舊惡) 정치인들을 능가했다.

 

'민주당원 댓글 공작'사건 주범 중 한 명이 체포 직전 소셜 미디어에 이런 글을 남겼다. "2017년 대선 댓글부대의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 언젠가 깨끗한 얼굴을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던 넘들(놈들)이 뉴스 메인 장식하는 날이 올 것이다." '드루킹'이라는 필명을 쓰며 민주당 권리당원으로 활동해 온 그가 현 여권(與圈)을 겨냥해 한 말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의식한 듯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어디 구덩이라도 파고 소리라도 질러야겠다"고 썼다.

'소명(召命)으로서의 정치'를 집필한 막스 베버는 상대방을 부도덕하게 보이게 해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를 하수(下手) 중의 하수로 보았다. 도덕주의를 강조하는 정치는 정작 자신이 부도덕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된다. 한국 좌파는 유난히 도덕성을 내세워 왔다. 세상을 선악(善惡) 이분법으로 나누고 자신들은 선한 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연이어 드러나고 있다. 논문 표절한 사람이 다른 사람 표절을 비난하고, 아파트 두 채 갖고 다른 사람에게 집 팔라고 하고, 제 자식은 특목고 보내고 다른 사람은 못 가게 하고, 남들은 블랙리스트로 감옥 가는데 자신들도 같은 일을 하고. 이 내로남불에 대한 실토가 내부로부터 나왔다. '깨끗한 얼굴 하고 뒤로는 더러운 짓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6/2018041602504.html

 

[서지문의 뉴스로 책읽기] [96] 위선자 대회 大賞급 연기

싱클레어 루이스 '엘머 갠트리'
이 정부가 연중무휴로 제공하는 서커스는 대부분 너무 살벌하고 터무니없어서 외면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의 '김기식 코너'는 아이러니가 절묘해서 잠시 눈길을 끌었다. 자기가 곧 받아야 할 질책을 사자후로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너무 희극적이어서 비극적이었을까?

"물러나실 생각 없으세요? 참 부끄러움을 모르시네." "금감원의 권위와 신뢰가 무너지면 금융 감독 체계 전체가 무너지는 거죠." "(고액 강사료 지급) 반복 강연 요청은 로비성이지." "공무로 해외 출장을 가는데 기업한테 돈 받아서 비즈니스석 퍼스트석(). 이럴 수 있습니까?“

여타 기묘한 비리가 속속 드러나는데 청와대는 그가 자기의 외유성 출장을 지원한 피감 기관을 '봐주지' 않았으니 죄가 없다고 변호했다. 대통령은 김기식의 행위가 위법이라는 판정이 내려지면, 또는 당시 관행에 비추어 도덕성이 평균 이하라고 판단되면 물러나게 하겠다면서 한편 김기식에 대한 사임 요구는 경제·재벌 개혁에 대한 저항이라는 암시도 했다. 금융계의 개혁은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비()전문가도 단행할 수 있는 것인지?
문 대통령이 취임 초에 천명한 인사 원칙은 며칠도 못 가서 무너졌다. 이 정부는 투기, 자녀 이중 국적, 논문 표절 등 온갖 하자(瑕疵)가 있는 '캠코더' 인사들을 고위 공직에 내리꽂았고, 한 지방법원장을 대법원장에, 동네 보건소장을 식약처장에, 소장이 맡았던 보직에 소령을 임명하는 등, 다른 정권은 감히 꿈도 못 꾸던 인사를 밀어붙였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반역죄인 양 단죄하면서 순수 연구단체인 존스홉킨스대의 한미연구소에는 갑질을 서슴지 않다가 결국 블랙리스트 처리했다. 돌고 도는 세상이라지만 이리도 빨리, 이리도 멀리 역대 정권을 추월하다니.
노벨상 수상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가 1926년에 발표한 풍자소설 '엘머 갠트리'는 미국 교회의 부패와 위선을 파헤친 작품이다. 사기꾼 기질이 짙은 엘머는 달변으로 순회 부흥사 노릇을 하다가 주류 교회 목사로 성공하는데, 그는 교인들에게 자신은 느껴본 일 없는 사랑, 자신은 탐닉하는 욕정, 자신은 제어하지 못하는 야망을 베풀고 다스리고 제어하라고 열변을 토해서 그들을 열광시킨다. 그러고 보니 김기식이 역대 최악급 위선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면 세계적 저명인사들과 노닐게 될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6/2018041602521.html

김기식이 역대 최악급 위선자라니요 잘못 보셨지요. 문재인이 아닐까요?

[최은희 별세] 영화처럼불꽃처럼최은희 '92년 드라마'
17세때 극단에서 연기 시작/ 6·25 전쟁통에 납북됐다 탈출두번의 결혼과 두번의 이혼/ 김지미·엄앵란과 트로이카김지미와 성춘향 대결서 승리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분단과 냉전을 온몸으로 겪었다. 평생 두 번 결혼(촬영기사 김학성, 영화감독 신상옥)했고 두 번 이혼했으며, 납북당하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망명자로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영화배우 최은희(92)의 삶은 영화보다 극적이었고 불꽃보다 맹렬했다.
전쟁 겪으며 강해진 여배우
1926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최은희는 열일곱 살이던 1943년 친구 손에 끌려 극단 '아랑'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고전적인 외모의 그는 무대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1947년 영화 '새로운 맹서'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때 만난 촬영감독 김학성과 결혼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을 찍으며 스타로 등극했던 최은희 92세의 일기로 2018416일 세상을 떠났다.
원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7/20180417002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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