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정권 역주행 5년] ⑦지나친 피해의식으로 뒤틀린 언론정책 ◆
◆필리핀 세부 사건
2006년 12월 21일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로 나라를 뒤흔든 일이 있었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 형님 백만 믿겠습니다"라는 등 수없이 많은 막말과 거친 몸짓으로 가득찬 70분짜리 연설이었다. "나 국방장관이오, 참모총장이오,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라고도 했다. 이날 밤 방송과 다음날 아침 신문은 이 연설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권 전환 반대 성명을 낸 전직 국방장관들을 원색 비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설과 2007년 한 해를 시끄럽게 했던 취재통제조치를 둘러싼 언론과 정부의 충돌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이 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노 대통령은 민주평통 연설 일주일 뒤인 12월 28일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나더러 말을 줄이라고 하는데 합당한 요구가 아니다"면서 "(언론) 환경이 이렇다 보니 부득이 나도 온몸으로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이 거친 것은 '적대적인 언론환경'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1일 민주평통 연설에 대한 언론의 보도가 전체 취지를 살리지 않고 자극적인 말 몇마디에 초점을 맞춰 상처를 키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해가 바뀐 2007년 1월 4일 정부 과천청사에서 국장급 이상 공무원들과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언론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실한 상품, 불량상품"이라면서 "남은 1년 할 말, 할 일 다 할 것"이라고 했다.
열흘 뒤인 1월 14일 필리핀 세부. 노 대통령은 이날 오후 '한·중·일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저녁에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 불참했다. "피로가 누적됐고 만찬은 꼭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친목행사여서"라는 게 청와대측이 밝힌 이유였다. 그런데 이날 밤 늦게 청와대 관계자가 다른 얘기를 했다. '피로' 때문이 아니라 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아베 당시 일본 총리와 과거사 및 북핵 문제에 대한 시각차로 언쟁을 벌여 '진이 빠져서'라는 것이었다. 이 관계자는 '피로' 때문이라고 국내 언론에 보도되는 것보다는 '일본 총리와 한판 붙어서' 불참했다고 보도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실제 국내 몇몇 언론에는 이렇게 보도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5일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이를 보고받은 노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낸 것이었다. 사실이 아닌 것이 어떻게 나갔으며, 왜 몇몇 언론만 '담합'하듯이 똑같이 보도했느냐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취재통제조치의 서곡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참모의 잘못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노 대통령이 내막을 정확하게 알게 된 것은 한 참 뒤였다.
◆'담합 사건'도 해프닝
취재통제조치 실행에 불을 붙인 이른바 '담합 사건'도 해프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세부에서 귀국한 15일 밤 TV 뉴스를 봤다. 이날 유시민 복지부장관이 발표한 '국가비전 2030에 부응하는 건강투자전략' 관련 보도였다. 이는 2008년부터 임신에서 출산까지 모든 필수 의료서비스가 건강보험에서 무상으로 지원된다는 내용인데, 대부분의 언론이 재원 마련 방안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선용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언론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몇몇 기자들이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보도자료를 자기들이 가공하고 만들어 담합하고 있다"면서 "이런 구조가 일반화되어 있는지 조사해 보고하라"고 했다. 특히 홍보처가 주관하고 외교부가 지원해 외국의 대통령실 및 각 부처의 기자실 운영실태를 조사하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유시민 장관으로부터 사전에 보고받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기자들이 담합해서 흠집만 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 장관도 15일 발표 당일 재원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복지부의 다른 고위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선용 의혹을 제기한 것도, 유 장관이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경선후보를 겨냥해 대운하계획을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자신이 과했다고 느꼈는지 다음날 복지부 기자들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이후 취재통제조치를 그대로 밀고 나갔고, 거기서 나온 것이 김창호 홍보처장이 5월 22일 발표한 이른바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었다.
◆"우리도 200만 독자가 있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일부 언론과의 각세우기를 주요 대선 전략 중 하나로 삼았다. 해양수산부 장관 시절인 2001년 "이제는 정권이 언론에 대한 전쟁선포도 불사해야 한다"고 했다. 대선후보 시절에는 지지자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특정 언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 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취임 이틀 전인 2003년 2월23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옛날에는 정권에 불리한 보도가 나오면 '좀 빼달라' '고쳐달라'며 자주 만나고 소주파티를 하고 향응을 제공하는 등 로비 방법으로 대응해 왔으나 새 정권은 언론과의 유착관계를 끊고 원칙대로 하겠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기성언론에 맞서 자체적인 '대안 매체' 육성에도 바로 착수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담는 언론'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3월3일 청와대 이름을 건 인터넷 대안 매체인 '청와대브리핑'을 만들더니, 9월에는 정부 공무원 전체에게 보고 기사도 쓰라고 '국정브리핑'을 만들었다. 언론 보도에 수동적으로 방어만 할 것이 아니라 청와대와 정부가 기사를 만들어 제공할 뿐 아니라, 기성 매체의 보도에 직접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들 매체에 "참 잘했어요"라고 직접 댓글을 달았다. 국정브리핑에 기고하는 공무원에게는 승진 때 가점을 주도록 했다. 또 국정홍보처가 운영하는 정책방송인 KTV(한국정책방송)를 강화했고, 공무원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면서 시청하라고 직접 권유하기도 했다.
- ▲ 2007년 10월 24일 외교통상부 출입기자들이 통합브리핑룸 입주를 거부하고 청사 로비에 상자를 쌓아놓고 기사를 쓰는 모습.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이 때문에 홍보처 직원들은 노 대통령을 '노무현 편집장'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노 대통령은 국정브리핑에 올라갈 기사 내용, 심지어 세부 메뉴나 콘텐츠 배치까지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국정브리핑 사이트의 한복판에는 언론 보도를 반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오늘의 메뉴와 의견'이란 박스가 있는데, 대통령이 잘 보이도록 그 곳에 배치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매일 업무 시작전 그날의 '청와대브리핑 편집회의'를 한때 주재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한 핵심 참모는 이런 얘기를 했다. "기존 신문들만 많은 독자를 갖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도 200만 독자가 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 홈페이지를 그대로 청와대가 가져갈 것이다." 이 발상에서 나온 것이 청와대브리핑, 국정브리핑이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선거운동을 할 때 이미 '선대위 브리핑'이라는 것을 운용했고, 당선자 시절에는 '인수위 브리핑'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중앙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10년, 20년 뒤 언론 자료와 국정브리핑 등 우리 정부 자료를 갖고 정확성을 한번 평가해보자"고 말한 일도 있다.
노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청와대브리핑과 국정브리핑을 이어 별도의 '사이트' 운용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이 퇴임 후 '언론사 대표나 편집장' 역할을 할 수 있는 셈이다.
◆공무원을 언론투쟁 선봉대로
노 대통령은 그래서 재임기간 내내 공무원을 대(對) 언론투쟁의 선봉대로 삼았다.
2007년 취재통제조치 이전에도 기자와 공무원 사이에서는 전에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정부부처의 한 공보담당 직원은 "비판기사가 나오면 사실여부를 떠나 무조건 언론사에 정정보도 신청을 해야 한다"며 "우리 부처의 정책홍보 평가점수가 낮아 다른 부처 동기보다 성과급을 절반밖에 못 받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정정보도를 요청하기 전에 "홍보처에 보고용으로 신청하는 것이니 그냥 무시해도 된다"며 사전에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또 정권의 언론대응 방침을 지키지 않은 정부 고위인사들까지 청와대 조사를 받는 등 어김없이 곤욕을 치렀다.
이러다 보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공무원들도 모두 입을 닫았다. 국정홍보처 직원들도 그랬다. 한 직원은 "홍보처가 언론과 싸우는 역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느냐고 내부에서 문제를 제기했으나 전혀 먹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 부처의 한 공보관도 "작년 상반기 공보관 회의 때 기자실 폐쇄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였다"면서 "우리도 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고 했다.
◆공정위, 100만명 서명운동까지 추진
이 정권 5년 동안 언론을 향해 가해진 법적 제재도 어느 때보다 많았다. 그러나 이 중 일부는 위헌 결정이 나는 망신을 사기도 했다.
공정위는 2005년 신문사의 경품이나 무가지 제공 사실을 신고하면 포상금을 주는 제도를 도입했다. 공정위는 2006년 신문시장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려다 "정부가 무슨 시민단체냐"는 비판을 받았다. 세무조사도 정권이 언론을 견제하는 데 쓰인 단골메뉴였다.
2004년 열린우리당이 탄핵 여파로 총선에서 대승, 국회 과반을 차지하자 정부·여당은 신문의 시장점유율을 제한하는 내용의 신문법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위헌결정이 나기도 했다. 또 신문시장 재편을 위해 신문유통원과 신문발전위원회도 만들어 수백억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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