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 있다. 조선일보 역사 속에 why를 읽으면서 한국 정당사를
생각해본다. 지금 한국에 정당이 있는가? 이회창의 자유선진당과 통합민주당이
소고기 수입에 대처하는 것을 보면 조선시대 붕당 정도가 아닌지...
그리고 요즘의 한나라당 정두언을 본다. 정두언은 충언인가? 이간질인가?
오늘의 정치판을 보면서 조선일보를 보면 이렇다.
"전하, 누구는 간신입니다" 임금님의 반응은 어땠을까 "내가 그동안 농락
당했단 말이냐" 왕에게 "사람 잘 못 본다" 지적인 셈
'충신·간신 논쟁'은 조선초 목숨건 문제 성종 이후부터 당쟁의
수단으로.....
조선시대 때 충간(忠奸), 즉 충신 간신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성종 때에 와서다. 그 이전까지는 왕권이 강성했기 때문에 감히 신하들이
충신·간신이나 군자·소인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충간(忠奸)과 군(君)·소(小)를 판별하는 것은 오로지 군왕의
고유권한이었다.
성종 8년 9월 5일 사헌부 지평 김언신이 성종 면전에서 동료관리 현석규를
비판하면서 '음험하다'고 표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사실을 넘어선 판단이 개입돼 있고 또 그 순간 현석규의 '음험함'을 알아
보지 못한 성종이 한심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성종은 일단 "음험하다면 현석규가 소인이란 말이냐?"고 물었다.
성미가 급한 김언신은 "음험하면 소인"이라며 한걸음 나아가
] "전하께서 이 사람의 간사함을 살피시지 못하니 그것이 근심"
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성종은 분을 참으며 재차 물었다. "그대가 현석규를 소인이라 하는가?
" "참으로 소인입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성종도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아느냐?" "현석규의 용모를 보면 압니다."
"얼굴만으로 마음을 아는 것은 성인도 어려운데 하물며 네가
그것을 안단 말인가?"
"알 수 있습니다."
성종의 분노가 폭발했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소인 현석규에게 농락당했다는 말인데 그동안
왜 말하지 않았는가?"
"그동안은 언관이 아니어서 말씀드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조정대신들은
현석규가 소인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불똥이 대신들로 튀었다. "그대들은 현석규가 소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 자리에서 현석규를 소인이라고 인정할 대신들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성종은 김언신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며 사형을 명한다. 그러나 김언신이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죽음을 불사하는 기개를 높이 사
특별히 용서해주었다.
이처럼 신하들이 충신 간신, 군자 소인 운운하는 것 자체가 조선초까지만 해도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 그러나 성종의 배척을 받았던 유자광을 비롯해,
임사홍 등 간신들이 연산군 때 득세하고 결국 반정(反正)이 일어나 어린 중종이
즉위하면서 군자 소인론은 정치투쟁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사림이 득세하게 되는 선조 때까지는 훈구와 사림의 피 튀기는
투쟁기였고 역사의 붓을 잡았던 사림들은 남곤 심정 김안로를 중종 때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기록했다. 이들은 간신이라기보다는 권간(權奸)이었다.
중종조차도 어찌 할 수 없는 파워를 행사했기 때문이다.
특히 남곤 심정 김안로는 젊어서는 다 사림의 길을 걷다가 세파의 시련을
거치면서 훈구의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인생무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사림들은 인종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1년도 재위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는 명종 시대가 열렸다.
처음부터 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였다. 윤원형이야 애당초 문정왕후의
친동생이므로 간신, 권간 운운할 필요가 없는 실세였다. 오히려 사림에
속했다가 윤원형에게 의탁한 정순붕,이기, 임백령, 허자 등이 더 앞장서
사화의 참혹성을 더하는 '간신'의 대열에 합류했다.
사림들은 사화 없는 세상을 간절히 원했다. 마침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 이준경을 중심으로 한 조정 중신들은 왕실 종친
중에서 가장 영명한 이를 골라 왕위를 잇도록 했다. 그가 선조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후궁의 손자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정통성이 취약했다. 신하들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조선초만 해도 당파를 지으려는 조짐만 있어도 일망타진당했으나 선조 때에
오면 신하들이 노골적으로 당파를 지었다. 선조의 무력함과 사림들의
분열주의가 만난 것이다. 당파가 생기니 서로 상대당을 소인당(小人黨)이라
매도하고 스스로를 군자당(君子黨)이라 자처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중종 때나 명종 때처럼 적어도 식자들이라면 공인하는
간신이나 권신은 없어지고 패가 나뉘어 상대당 사람은 모두 간신이라고
비방하는 국면이 전개됐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도 당쟁은 없어지기는커녕 더욱 심화했고 그 사이에 또
한 차례의 반정까지 일어났다. 당쟁은 사생결단식으로 격화됐다.
백성의 삶과 유리된 군자 소인 논쟁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묻고 보니 조선을 향한 질문만은 아닌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