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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은 왜 김대중을 납치했던가?

modory 2009. 11. 15. 08:43

◈李厚洛의 生前 증언: "내가 김대중을 납치한 것은...◈" 

 
김대중이 망명정부 수반 자격으로서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만나면 
연방제 통일에 합의할 것이고...趙甲濟   

1973년 8월 중앙정보부가 도쿄에서 김대중씨를 납치, 한국으로 데리고 왔을 때 
정보부 수사국장이었던 李龍澤씨(국회의원 역임)는 오늘 비밀을 가슴에 묻고 
별세한 李厚洛 당시 정보부장을 조사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趙甲濟, 朴正熙傳記)
 “金大中씨가 서울에 끌려와 집으로 돌려보내진 다음날일 거예요. 
 청와대에서 극비로 즉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朴 대통령은 처음에 ‘자네가 했나’라고 바로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했더니, 
 ‘동백림 사건 때는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때는 국내 부서에서 수사를 다해서 해외담당 차장에게 자료를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KT(당시 대통령은 金大中 씨를 그렇게 불렀다) 건에 대해서 
 누가 했는지 자네가 한 번 조사해 봐’라고 지시하면서
  ‘누구한테도 보고하지 말고 은밀히 하라. 자네가 조사하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거나 압력을 넣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보고하라’고 말했습니다. 
  朴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는 아주 섬세해요. 저는 그 순간, 朴 대통령이 
  DJ 납치에 개입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李 국장은 아무리 그래도 李厚洛 부장에게는 보고를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궁정동의 부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李 부장은 이미 李 국장이 朴 대통령을 만나고 나온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李 부장은 말을 더 더듬었고 커피를 연거푸 마시면서 
 담배 피우는 손을 떨었다.
 李 국장은 청와대에 다녀온 것과 대통령으로부터 조사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李 부장에게 말해 주었다.
  李 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데려왔습니까?”
 李 부장이 설명한 요지는 이러했다.
 
 <金大中씨가 한민통을 만들어 그 의장으로 취임하면 망명정부 
 수반 행세를 할 것이란 정보가 들어왔다. 
 망명정부 수반 자격으로서 북한을 방문하여  金日成과 만나면 
 연방제 통일에 합의할 것이고, 북한 측은 한국 정부를 괴뢰시하게 
 될 것이다. 진행 중인 남북대화도 중단될 것이다.
 金大中을 평양으로 데리고 가려는 북한의 공작이 진행 중이고 
 金大中씨도 주변 인물들에게 의견을 묻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래서 한민통 결성 대회를 하기 전에, 북한이 손을 쓰기 전에 
 그를 잡아온 것이다>
 
  이런 설명을 한 뒤 李厚洛 부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잘 알지요. 
  그쪽에서 냄새를 맡은 것 같으니 李 국장이 손을 써 신문에 
  나지 않도록 해줘요”라고 부탁했다. 
  물러난 李 국장은 장일훈 치안국장을 만나 물어보았다. 
  張 국장은 부산 4부두를 관할하는 경찰부서에서 정보가 올라왔다고 
  했다. 
  경찰이 오래 전부터 정보부의 공작선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용금호가 며칠 전 밤에 부산 4부두에 닿았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사람을 부축하여 내렸다. 
  선원들은 그 사람의 머리를 웃옷으로 덮어씌웠다. 
  초소 경찰관이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용금호 선원인데, 술에 취했다.”
  용금호 선원들은 그 사람을 데리고 앰뷸런스에 탔다. 
  이를 본 경찰관이 앰뷸런스의 차 번호를 적어두었다가 상부에 
  보고한 것이다. 
  李龍澤 국장이 그 번호를 받아 정보부로 돌아와 운송부서에 확인하니 
  정보부가 운영하는 앰뷸런스임이 밝혀졌다. 
  李 국장은 바로 앰뷸런스의 운전사를 불렀다.
  “부산 4부두에서 태운 술취한 사람이 누구였지?”
  “KT(金大中)였습니다.”
  “태우고 어디로 갔나.”
  “충청도에 있는 우리 安家로 갔습니다.”
  “누가 한 것 같아.”
  “공작단이지 누구이겠습니까.”
  “밖으로 절대로 이야기하지 말게.”
  李龍澤 국장은 H 해외공작국장을 만났다. 
  H국장은 金大中 납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KT가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취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데려왔다. 그를 죽이라는 명령은 받은 적이 없다. 
  비행기가 왔기 때문에 그를 살려 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 해상보안청 비행기가 순찰 중 상공을 지나간 정도이다.
  金大中 씨를 기관실에 묶어 놓았는데 갑판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바깥 공기를 마시고 햇볕을 쪼이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 칼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끈을 가지고 간 것은 그를 마취시켜 묶어서 내리려고 했던 것인데 
  호텔이 너무 높고 대낮이어서 엘리베이터로 내려온 것이다〉
 
  李 국장은 朴 대통령을 찾아가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낙담한 모습이었다.
  “李 국장, 옛날 말에 조선 망하고 大國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 자가 나를 완전히 망칠 작정을 한 것이구먼.”
  “朴 대통령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지’라면서 걱정했어요. 
  진상을 그대로 밝히면 일본에서 원상회복과 함께 국가배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각하, 일본을 잘 아는 金鍾泌 총리와 의논해 보면 
  어떻겠습니까’고 건의했습니다. 
  JP는 그해 11월 진사 사절로 일본에 가서 사과하고 돌아와 
  정치적 타결을 이뤄냈습니다.”
 1973년 8월 8일에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 사건은 납치만 
 크게 부각되고 왜 李厚洛 당시 정보부장(또는 박정희 대통령) 측이 
 납치를 결심했는가에 대해서는 의외로 깊이 있게 다룬 글이 적다. 
 그런 점에서 1987년 10월 新東亞에 실린 이후락 인터뷰는 좋은 자료이다.
  李鍾珏(이종각) 기자가 쓴 이 인터뷰 기사는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의 모임
  (공동위원장 韓勝憲, 尹順女)’에서 펴낸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이란 자료집에 실려 있다. 일부를 인용한다.
  <그럼 여기에서 유신이 단행된 직후 해외에서 反유신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김대중 씨의 어떠한 언동이 국익에 위해스럽다고 
  여겨져 이 사건까지 일어나게 됐는지를 물어보기로 하자.
  ―구체적으로 김대중 씨의 어떤 활동이 그토록 유해하다고 
  생각했습니까?
 
  “…하… 이건 내가 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내 입장을 한번 잘 들어봐 주세요. 
  내가 1972년 5월 24일날 김일성이를 만났을 때 김일성이 하는 말이
   “남쪽에는 통일방식을 달리 하는 민주인사들도 많데요” 
   이런 말을 합디다. 
   그때 내가 상당히 쇼크를 받았어요. 역시 통일문제에 대한 의견이 
   이러쿵저러쿵 나오는 것은 우리의 약점이구나 하는 것을 
   내가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뒤 내가 국회에 증언 나가서 김일성이가 말한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통일에 대해서는 발언을 상당히 주의해야 
   되겠다는 것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소위 ‘한국민주화촉진국민회의’를 
  만들어가고 있을 때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연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모이는 사람들이 다 민주인사는 아니고 정말 위험스러운 인사들도 
  있었어요….
   이 분이 캐나다에 가도 또 그런 것을 만들고, 또 이제 일본에도 
 만들고, 장차에는 유럽에도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또 그중의 어떤 사람들은 ‘국민회의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망명정부를 
 세우자’ 하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나, 솔직히 그때 남북대화에 미쳤어요. 내 목숨을 걸고 평양에 가서 
  인제 전쟁을 막고, 그리고 통일의 길로 서서히 나아가자는 일념에서 
  어떻게 하면 통일을 성공시키느냐 하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 무렵일 거예요. 월남에서 월남과 호찌민 군대 간의 회담이 
  끝내 베트콩이 참여하는 3자 회담으로 갔는데, 
  그 당시 LA나 일본에 보내지는 북한 지령은 자꾸 그 조직에 
  적극 참여하라든지, 관심을 표명하라는 지령이 많이 가고 있었습니다. 
  또 상당한 반한 신문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연락이 가는 첩보를 
  내가 탐지했고… 그럴 때, 나는 남북대화를 해오는 당사자로서 
  느끼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망명정부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간에 
  그건 다음 문제로 치고, 자칫 잘못하면 김일성이가 남쪽의 
  박정희뿐 아니라 해외에 있는 민주인사까지 포함시켜서 3者회담으로 
  나가자 하는 그런 가능성이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이북 놈들하고 대화할 때마다 통일에 대해서 
  딴 의견이 남쪽에 있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를 아주 밥 먹듯이 해요. 
  그것이 나에게는 큰 고충이고, 이러다가는 남북대화는 어렵다, 
  또 해외에서 무슨 조직이든 汎(범)세계적인 조직을 만들어서 
  反韓(반한) 활동, 反정부 활동을 한다는 것은 대화를 위해서는 
  도움이 안 된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일부 인사가 주장하는 대로 망명정부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이러한 기우도 나에게는 사실상 없지 않았어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결국은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람을 본국으로 데려와야 되겠다’ 하는 그러한 생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납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해외에서의 김대중 씨 활동이나 조직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은 아닌가요?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김대중 씨의 그 단체는 조직이나 기구를 제대로 갖춘 상태가 
  아니었잖습니까?
  “첩보보고가 들어왔어요….”
  ―첩보에는 어떤 경우 과장이 있지 않습니까?
 
  “과장이 있었는지 모르지… 여하튼 그런 보고를 읽었어요. 물론 내가 
  조금 과대평가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미치다 보면 조그마한 것도 
  크게 보이게 마련이에요. 내가 남북대화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유리한 고지에 서느냐, 하다 보니까 우리의 취약점이 크게 
  보일 수 있는 법이에요.”
  ―1973년 8월경이라면 이미 그때 북한과의 대화에서 우리 측과는 상당한 
  간격을 느끼고 있을 때 아닙니까? 이 부장께서는 그대로 남북대화의 
  장래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평가하고 계셨습니까?
 
  “남북대화는 결국… 그때 내가 볼 때는 전쟁의 위기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왜 높았느냐, 일선에서 우발적인 사고가 일어나기가 
  쉽더라고요. 그래서 여하튼 간에 전쟁은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되는 방법을 마련해야 되겠는데, 그것은 김일성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연락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해서 내가 그 길을 택했지요. 
  물론 북한은 남북회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겠지요.
  그러나 대화란 것은 길을 터서 어떻게 하든지 넓히기는 쉽지. 
  길을 한 번 연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여하튼 열어놓자, 열어놓고 
  자꾸 넓혀보자는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생각하고 대화가 추진되고 있을 때였지 않습니까? 
  북한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나는 남북대화를 넓혀보자 하는 
  일념뿐이었고, 사실 김대중 씨가 바깥에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든지, 
  또는 납치사건이 없었다든지 했으면 어느 모로나 진전이 있었지 
  않았겠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이미 남북대화가 제대로 되겠나 하는 느낌이 
  상당히 들 정도가 아니었습니까?
 
  “현격한 차이가 있으면 있을수록 이쪽 약점을 더 줄이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 무렵 김대중 씨가 공화국 연방제를 주장한 것도 납치 사건의 
  한 요인이 됐습니까?
 
  “그해 6월 23일 김일성이가 체코 총서기인가 뭔가가 평양에 왔을 때 
  고려연방제를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에 의한 통일론인 만큼 
  그것을 시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필이면 이름을 왜 공화국 연방제를 내걸어요. 나는 진짜 
  기절할 정도로 쇼크를 받았어요. 이제 남북대화는 다 틀렸구나 하는… 
  나는 너무나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사람이 아마 틀림없이 일본에 
  와서인가 일본에 오기 직전인가 아니었나 싶어요. 
  지금도 그 말을 들으면 온몸에 소름이 끼쳐요. 어떻게 할 수 없나 봐요.”
  ―공화국 연방제나 대중경제론도 하나의 논의인데,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까? 이런 논의도 있고 저런 논의도 
  있을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은 쉽게 그렇게 말하실 수 있죠. 그러나 항상 국가안보라는 
  것은 최악의 경우라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어요. 
  정말 그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고 하는 생각이 앞섰고….”
  ―박 정권이 종신집권이 가능한 독재체제로 되었기 때문에 
  김대중 씨는 反독재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런 비민주적인 요인이 없었더라면 김대중 씨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텐데요.
 
  “우리 요원들이 김대중 씨에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권고했어요. 
  또 한국으로 돌아가도 절대 아무 일 없다고 몇 번 권고했어요.”
  ―김대중 씨의 통일론이 문제였다면, 박 정권의 종신집권체제인 
  유신체제와 남북대화도 무슨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지금 이야기할 때가 아닌데… 남북대화할 때는 
  유신이란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었고, 다만 대화하다 보니까 
  통일방안이 남쪽에서 이게 나오고 저게 나오고 해서는 안 되겠어요. 
  그래서 내가 대통령에게 ‘이런 체제 갖고는 도저히 남북대화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통일주체국민회의란 것을 
  만들어서 여하튼 간에 통일방안을 하나로 집약해서 통일방안은 이거다, 
  이외에는 딴 의견이 없다 하는 방향으로 몰고 가야만 대화가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유신 헌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여러 가지 또… 딴 요소도 
  들어갔습니다만, 그때 취지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만들어서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그것이 최상이다 생각해서 발상한 거지, 
  혹자가 말하듯이 유신을 하기 위해서 남북대화를 한 것은 아니에요.”
  ―그럼, 유신체제 구상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한 것은 
  정확하게 언제입니까? 7·4 공동성명에서 10월 유신(10·17)이 
  나오기까지는 불과 3개월 정도밖에 안 되는데요. 7·4 공동성명이 
  나올 무렵인가요?
 
  “그것이 9월이에요.”
  ―9월 초순입니까?
 
  “8월 말, 8월 말이에요.”
  ―8월 말에서 10월 17일이 유신이니까 약 두 달쯤인가요?
  “두 달, 두 달은 안 될 거예요.”
  ―처음 구상단계에서부터 박 대통령과 상의했습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통대를 만드는 식으로 개헌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처음 대통령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시더구먼. 그러다가 한 열흘인가,
   보름 후에 김성진 비서관이 유혁인 씨하고 왔어요. 
   내가 얘기했다는 것이 어떤 내용인가 해서… 다시 되풀이 설명을 했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그 체제의 골격 구상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