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5
조선일보에서
마지막 황제 순종은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무더기 훈장 수여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비밀리에
합병조약을 체결하고 공표 절차만 남겨둔 절박한 시기에 순종은 고관들에게 훈장 수여행사를 계속했다. 8월 25일에는 장례원경 성기운, 규장각경
조동희 등 11명에게 훈장을 주었고, 이튿날에는 민병석(궁내부 대신), 이완용(총리대신), 박제순(내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이용직(학부대신) 등 대신과 고관 10명에게도 훈장을 내렸다. 8월 27일에는 이재각·이준용·이해창·이해승 등 황족 4명, 8월 28일에는
윤숙영(규장각 제학) 등 16명의 목에 훈장을 걸어주었다.
합병이 발표되던 대한제국 최후의 날인 8월 29일에도 훈장 수여는 멈추지
않았다. 한창수(내각 서기관장), 백우용(장례원 악사장), 조재영(재무관)이 훈장을 받았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고관들에게 무더기로 훈장을
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순종의 황후도 훈장 수여를 거들었다. 8월 21일 이완용의 처를 비롯하여 고관들의 아내와 상궁까지 합쳐
40명이 넘는 여인들에게 훈장 수여식을 거행했다.
훈장은 연금이나 일시 하사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훈장조례, 1900.4.17.)하고 있었는데
나라가 망하던 때에 준 훈장에 어떤 금전적인 보상이 따랐는지 알 수 없다. 없어진 나라의 훈장을 차고 나설 곳은 어딘가〈참고
사진(오른쪽)·시종 박용숙에게 내린 훈장증/화봉책박물관 자료제공〉.
훈장은 침략자들에게 먼저 수여했다.
부통감으로 부임했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曾�Y荒助)〈왼쪽 사진〉에게 내린 훈장이 그런
것이었다. 순종은 1908년 1월 18일 소네에게 '이화대수장'(李花大綏章)을 수여했다. 병으로 통감을 사임하자 이번에는 최고 등급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했다(1910.7.30.). 황실의 친척 또는 문무관 중에서 특별한 공훈이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에 황제의
특명으로만 수여할 수 있는 최고 등급 훈장이었다.
통감부 소속 일본인 관리들에게도 훈장을 쏟아 부었다. 1907년 12월 26일
통감부 철도 관리국 장관 오야 곤페이(大屋權平)를 비롯하여 일본군인 등 36명에게 훈(勳) 1등에서 5등까지 서훈했다. 12월 30일에도
경무국장 마쓰이 시게루(松井茂)를 포함하여 일본 관리와 군인 등 43명이 훈장을 받았다. 1908년 1월 29일에는 일본의 추밀원 의장 육군
대장 야마가타(山縣有朋), 총리대신 사이온지(西園寺公望)를 비롯한 일본 각부 대신 등을 망라하여 훈장을 보냈다. 2월 7일에는 경시총감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경찰 임무에 근신하여 뛰어난 공로를 세웠다'하여 특별히 훈 1등에 올려 서훈했다. 일본인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통감부 기관지 '서울프레스' 사장 즈모토(頭本元貞)도 1909년 4월 초 서울을 떠나기 직전 훈(勳) 3등
태극장을 받았다. 통감부에 봉사한 공적을 표창한다는 명분이었다. 고베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신문 '재팬 크로니클(1909.4.29.)'이 이를
비웃었다. '즈모토는 일본의 한국 침략을 옹호하는 펜을 놀린 인물인데, 한국 황제가 훈장을 주었으니 웃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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