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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연인- 리즈 굿바이

modory 2011. 3. 24. 08:15


★★
굿바이 리즈! ★★

2011.03.24일자 조선일보에서

  사랑을 사랑한 여인, 잠들다 라고 조선일보 김현진 기자는 기사를 썼다. 1932.2.27~2011.3.23…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망그는 아름다움이었다. 때론 하얀 순수(純粹)였고 때론 붉은 정염(情炎)이었다. 그는 사랑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시대를 초월한 세기의 여신(女神). 그가 23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하늘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한 햇수는 79년.


▲ 1948년 미국 라이프지 표지모델로 등장한 16살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데뷔한 지 6년째 되던 해이다. /매그넘포토
 

2004년부터 앓아온 울혈성 심부전증이 결국 그를 우리로부터 떼놓고 말았다. 2009년 수술 뒤 "새로운 심장이 몸속에서 뛰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라며 삶을 기뻐하더니 결국 하늘의 부름을 뿌리치지 못했다.

1932년 영국 런던 햄스테드 출생. 1939년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1944년 영화 '녹원의 천사'로 아역 스타가 됐다. 이후 1960년과 1966년 두 차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한 사생활이 화젯거리였다. 노년에는 에이즈 퇴치 등 사회활동에 힘을 쏟았다. 이제 은막의 여제에게 할 말은 이것뿐. "굿바이 리즈!"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영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2차례… 은퇴후엔 에이즈 퇴치 운동이제 우리는 그의 를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의 화사한 웃음을 들을 수도, 풍부한 유머와 여유 있는 연설을 들을 수도 없다.

'세기의 미녀(美女)' '전설적 여배우'. 23일 타계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겐 항상 이 말이 앞에 붙었다. 그만큼 사연 많고 굴곡 많은 인생사였지만 테일러만큼 예술과 영화와 인간을 사랑한 여배우도 드물었다.


바이올렛색 고혹적인 눈동자 리즈의 아름다움은 스크린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1932년 런던에서 출생한 테일러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전직 배우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테일러는 10세 때 영화 '귀로'(1942년)에 처음 출연했고, 소녀 시절 '녹원의 천사' '신부의 아버지'(1950년) '젊은이의 양지'(1951년) 등에서 수려한 외모와 연기력으로 일찌감치 이름을 날렸다. 그는 1963년 후일 자신의 남편이 된 버튼과 호흡을 맞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미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단독작품 개런티 100만달러를 넘는 기록을 세웠다.대표적인 작품 '자이언트'(1956년) '클레오파트라'(1963년) 등에서 마치 빨아들일 듯한 눈빛과 글래머 몸매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세기의 연인'이었다. 테일러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서양인으로선 자그마한 키(163㎝)였지만 아름다움과 우아함, 은둔자의 신비 등을 두루 갖추었다.

테일러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다만 엄청 운이 좋았고, 사랑과 아름다운 일들을 겪었다"고 했었다. 


 아카데미는 1960년 '버터필드8'과 1966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그에게 두 번 여우주연상을 주었다.

▲ 30代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영국의 장미’가 23일 졌다. 30대 중반에 영화‘말괄량이 길들이기’(1967)에 출연한 엘리자베스 테일러. /로이터 연합뉴스




그는 1985년 친구였던 유명 남자배우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에이즈 퇴치 운동에 뛰어들었다. 에이즈 퇴치를 위한 연구와 치료에 돈을 기부하고, 향수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사교의 여왕이기도 했다. 특히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비난을 받았을 때 그를 지지하는 발언을 할 정도로 나이를 뛰어넘어 우정을 쌓았다. 그는 생전 한국에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리즈의 남자들


사람들은 그것을 '남성 편력(遍歷)'이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에겐 사랑을 찾기 위한 여정(旅程)일 따름이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결혼사(史), 리즈의 남자들 이야기다.
'영국의 장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7명의 남자와 8번 결혼하고 이혼했다. 리처드 버튼(Burton)과는 두 번 결혼했고 두 번 모두 이혼했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관계는 지구와 금성만큼이나 멀다"고 했지만 테일러는 "가장 사랑했던 남자"로 버튼을 꼽았다.


테일러는 버튼을 만나기 전 네 번 결혼했다. 18살 때인 1950년 힐튼 호텔 창업자의 아들인 콘래드 힐튼(Hilton)과 첫 결혼식을 올렸다. 힐튼의 알코올 중독과 가정 폭력 때문에 이듬해 바로 헤어졌다. 두 번째 연인은 영국 배우 마이클 윌딩(Wildling). 1952년 결혼식을 올리고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1957년 이혼했고 한 달 만에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 토드(Todd)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58년 딸을 낳자마자 토드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리즈는 이듬해 고인이 된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수인 에디 피셔(Fisher)와 결혼식을 올렸다. 6년 가까이 이어지던 결혼 생활은 버튼 때문에 끝이 났다. 둘 다 기혼자면서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에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사랑에 빠졌다. 마침내 1964년 3월 6일 테일러는 피셔와 이혼하고 10여일 만에 버튼과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로 지내는 동안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고 10년간 살다가 버튼의 알코올 중독 문제로 1974년 헤어졌다. 이혼한 지 14개월 뒤 이들은 다시 결혼했다.

버튼과 헤어진 이후 테일러는 꽤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해나갔다. 1976년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존 워너(Warner)와 결혼식을 올렸고 1982년까지 함께했다.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테일러는 결혼하지 않다가 1991년 20세 연하인 공사장 노동자 래리 포텐스키(Fortensky)와 마이클 잭슨(Jackson)의 목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시대를 초월한 세기의 여신(女神). 그녀는 2011년 3월 23일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하늘로. 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한 햇수는 7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