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안녕 하십니까 라는 책을 받고
2014년 6월, KBS에 파업이라는 혹독한 폭풍이 일어 안녕하지 못 한 상황인데
‘수상집 아나운서 이정부의 방송 안녕하십니까’와 ‘서금랑의 매니큐어그림
이야기’라는 두권의 책을 우체부로부터 받았다.
소포 표지에는 보낸 이가 異政夫였다. 한자로 그렇게 썼지만 필체를 보고
李政夫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소포 껍데기에서부터 내가 알던 李政夫의 才氣의
한 편린을 보였다.
우편 번호와 받는 이와 보낸 이의 이름과 주소를 적게 되어 있는데 연락처
(전화 번화) 쓰고 그 밑에 (집 홋수 한번 좋습니다 1111 )라고 써 놓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홋수가 401동에 1111이란 숫자라 집 홋수가 좋다는 코멘트를
달아 놓았다.
껍데기를 뜯고 수상집 앞 표지와 뒷 표지를 보았다. 책에 대한 말씀(書評)들 중
이규항 아나운서 말씀이 내 생각과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 중에
'아나운서를 대표하는 몇 안 되는 문장가' 라는 말과‘그가 글로서 생각을
전하는 건 누구나 기다렸던 일이다’라는 구절은 늘 생각하고 있던 것이였다.
나의 인생 역정 중 방송을 업으로 삼고 먹고 살던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이정부 아나운서였다. 라디오 방송 시절 지역 방송에서 PD로서 재능있고
유머 넘치는 화가 아나운서 이정부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중고등 학생을 대상으로 만들던 버라이터 공개 방송 프로그램‘젊은이의 광장’
이란 프로그램을 만들 때를 잊을 수 없고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던 아나운서가
이정부였다.
대구 시절을 끝내고 서울 여의도에서 20여년을 KBS라는 한 건물에서 방송이라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나는 PD로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
편성하는 일을 했고 그는 아나운서였기때문이었다.
훌륭한 사람을 가까이 두고도 느끼며 교류하며 살지 못한 아쉬움이 책을 받는
순간 잔잔한 파문을 일게 했고 자주 만나지 못 했음이 참으로 애석하였다.
그의 책을 다시 느끼며 읽을 생각이지만 우선 몇 개를 읽어 본 소회는 역시
다재다능하고 정감이 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시적 수필이라는 이름을 짓고 쓴 ‘대한민국의 새벽이여 그대에게 묻습니다’
라는 것은 단연 멋지고 힘찬 제목에 내용도 감동이 있는 시임에는 틀림없다
며칠 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러시아 시 100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 시인 ‘안드레이 밸리’가 쓴 ‘조국’이나 ‘표드로 튜체프’가 쓴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네’라는 시를 읽었다. 그 시를 읽으며
참 좋은 시라고 가슴에 담고 메모를 해놓았는데 이정부의 시는 그 시를 뛰어
넘는 훌륭한 시였다. 이제 시인의 타이틀을 부쳐도 무난하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책 중에 'TV 창에 비친 이름들' 을 읽으면서 왜 박정희라는 이름을
빼놓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빼놓아야 할
이름일지 모르지만 나는 가끔 그 이름이 떠오르고 이정부 아나운서를 생각하게
했다.
1970년대에는 동인동 파출소 뒤에는 한복 곱게 차려 입은 아가씨들이 옆에
앉아 술시중을 들며 젓가락 장단을 치며 유행가를 불러제끼며 흥을 돋우던
술집이 많았다. 그 술집 가운데 박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술집 여주인이 있었고
‘젊은이 광장’ 녹음을 마치는 날이면 가끔 이 집에서 통음을 했다.
지금은 동인동 갈비찜 골목으로 명소가 되어 있다.
어느 날 인사불성이 되도옥 술을 퍼 마시고 모두 쓰러져 잤다. 텔레비전이
대중화되지 않았고 대구 방송에서는 텔레비전 방송도 하지 않았지만 아나운서라면
텔레비전에 출연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술집은 양옥이었지만 방문은
한식이었는데 가운데는 20인치 정도의 창이 있어 그 앞에 앉으면 텔레비전 화면과
똑 같았다. 새벽녘 목이 칼칼하여 눈을 떴는데 이정부 아나운서가 방문 창에다
얼굴을 내놓고 아침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며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하는
시늉을 하여 모두 일찍 잠을 깬 일이 있었다. 그 이후 가끔 박정희 술집에 가면
박정희는 이정부 아나운서 정말 텔레비전에 나오더라며 기뻐했다.
지금 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상한 권투 중계’는 2014년 6월 지금 KBS 상황이다. 1990년 4월
그 때도 KBS 현관 로비에서 파업 데모가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이정부 아나운서의 글을 보고 미세한 한 부분을 알았지만 나는 그때 텔레비전
편성부장으로 텔레비전 3개 채널 편성에 정신없었다.
1채널 뿐만 아니고 3채널인 교육 방송도 현재 EBS에 이관하기 전이라 3개 채널
편성을 Y차장과 함께 했다. 파업 후반에는 Y차장마저 노조원에 눈치가 보인다며
현관 로비로 내려갔다. 사전 제작도 되어 있지도 않았고 외주 제작도 활성화
되지 않아 그날 벌어 그 날 먹고 사는 하루살이 방송 제작 시스템에서 파업은
방송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위기였다. 공영 방송의 중단은 국가의 존망이라는
중단할 수 없어 뉴스는 단축하고 다른 생방송은 중단하고 다른 프로그램들은
과거에 방송했던 명작을 찾아 재방 편성을 했다. 지금이야 컴퓨터를 두들기면
재고 목록이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그 때는 컴퓨터 시절이 아니라 방송 목록
찾아 재방 가능 테잎을 확인하는데 밤을 새워야 했다.
KBS는 그 때의 어리석음을 지금 재현하고 있다. 관전자 입장에서 보고 있지만
그래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노조의 파업을 보면 늘 말한다. 싸우지 말라고.....싸우면 싸우는 당사자둘은
승자도 패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두 상처만 입고 패자가 되며 이득은 다른 데서
거두어 간다고 말한다. 이정부 아나운서가 권투 중계를 했지만 특히 권투는
어느 누구도 코피를 흘리지 않는 선수가 없어 견토지쟁(犬兎之爭)의 대표적인
스포츠인데 다정다감한 그의 성격에 맞는 스포츠 중계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 세상이다.
李政夫 아나운서의 책을 읽으면서 李政夫가 아닌 異政夫를 보면서 앞으로는
시인 李政夫가 되어 異政夫 시집 한권 받기를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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