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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최영오 일병 사건

modory 2015. 6. 13. 11:49

- 사건 발단 

서울대 천문기상학과 4학년에 재학중이던 최영오는 휴학하고 
1961년 8월 3일 단기 학보병 신분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62년 4월 5일 보병 제15사단 
106무반동총중대 제1소대에 전입되어 복무했다.
 학보병은 '학적 보유병'의 준말로서 60년대초 조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인재들이 군복무를 
 빨리 마치고 사회에 나가서 일해야한다는 명분으로 만든 제도인데, 군복무가 36개월로 
 3년이나 되었던 당시에 1년6개월만에 장기휴가 형식으로 제대시키는 제도로서 
 명문대 재학생들에게 준 특혜였음. 
그 당시는 대부분의 병사들이"못배운 것도 한인데, 배운놈들이라고 절반만 군대 생활 시키고
제대 시키는 세상 정말 거지같네..."라고 생각하여 학보병들은 짧게 하는 대신, 
상사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때 최영오의 어머니와 애인 장현숙으로부터 자주 편지가 왔는데, 같은 중대의 병장 정방신, 
상병 고한규, 상병 이석현 등이 편지를 뜯어보고 여러 사람 앞에서 희롱하여 서로 알력이 있었고, 
이로 인해 최영오는 잦은 기합을 받았다.
사건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도착한 애인의 편지를 짖궂은 선임병들이 먼저 가로채 뜯어보았고 
최일병은 소원수리를 통해 이에 항의하다가 고참들에게 구타당해 상처를 입고 심한 조롱을 받았다. 
7월 7일 일석점호 때 사소한 일로 정방신에게 구타당한 최영오는 분을 참지 못하여
그날 저녁 사단사령부에서 열리는 위문공연을 보려고 정방신과 고한규가 연병장을 향해 
서 있을 때 이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고 자신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군사법정에 끌려온 최 일병은 ‘두 사람을 살해한 순간 나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인간 이하의 노리개처럼 갖고 노는 잔인함을 향해 총을 쏘았을 뿐’ 
이라고 울부짖었다. 
상사살해로 군법회의에 기소된 그는 사형판결을 받았고 대법원에 항고했으나 대법원도 
사형판결을 확정 지었다. 
수많은 서울대 학생들과 문인(文人)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당시는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지 불과 몇년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군부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 시절이었기에 사회 각계 각층의 탄원도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듬해 3월 19일, 그는 서울 수색의 군 사격장에서 총살당했다. 
최일병은 죽기 직전에 "내 가슴에 붙은 죄수번호"를 떼어달라고 말했고,
‘나의 죽음으로 비인간적인 군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군대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최일병의 사형은 급하게 치루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처형 3시간 전에 형인 최영수씨가 최?일병을 면회했는데 
"다음 면회때는 어머니와 조카를 데려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걸로 보면 최일병 자신도 
3시간 뒤에 자신이 처형되는 걸 몰랐던 걸로 보인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사별 한 뒤 20년간 혼자 그를 뒷바라지한 어머니(당시61세)는 사체 
인수 통지서를 받아들고 충격을 받아 그 날밤 11시 50분 쯤 한강 절벽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했다. 
평소 자주 빨래하던 마포 강변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안에는 ‘높으신 선생님들, 
내가 영오 대신 가겠으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주십시오’라고 적힌 유서가 들어 있었고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의 집안은 1987년 8월까지 용공분자 집안으로 낙인찍힘으로 사회로부터 격리 조치되었다.


최영오군이 사형당한 다음날 서울 아현동 최일병집에 이웃주민들이 모여 애통하는 모습
서울대 천문기상학과를 다니다 휴학하고 단기 학보병 신분으로 입대한 최영오는 명문대생이라는
 점 때문에  사회적으로 상당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유현목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성일,엄앵란,김승호,독고성 등이 출연한
'푸른별 아래 잠들게 하라'라는 영화로 제작 되었다

 출처 : http://cafe.naver.com/dieselmania/10149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