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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modory 2016. 6. 5. 17:14

       

    영화 곡성




    <추격자> <황해>에 이어 자신만의 색깔로 또다시 신작을 들고 온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보았습니다.


    영화의 연출에는 흠잡을데 없을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하고 손에 땀을 쥐게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단순히 보는 것 이상으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이 영화를 결론부터 내고 이야기해보자면 '답은 없다'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간만에 리뷰해보는 것은 보고난 이후 혼란스럽고 정리가 되지 않는 찝찝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자 차근차근 짚어보려고 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난무하고 있습니다만, 스포일러 당해놓고 봐도 딱히 나쁘지 않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독의 메세지가 잘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의 관점으로 영화를 보고 이해해도 말이 되는, 그야말로 어마무시한 영화이기 때문이죠. '보이는 것만을 맹신하고 믿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꼬집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당한 스포일러는 2종류였는데, 영화를 보고나면 그 사람들은 영화를 그렇게 봤을 수도 있겠고 이렇게 봐도 영화가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마을 사람들 전체가 귀신...?' 다른 하나는 '황정민이 범인!'(ㅋㅋ)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스포당했을때는 화가 났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런 '의심'을 가지고 영화를 보면 더 재미나게 즐길 수도 있는 희한한 영화이네요.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은 공권력의 무력함, 사회라는 시스템의 오작동이라고 표현 가능합니다. <추격자>와 <황해>에서는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그야말로 겉돌기만 하였고, 주인공은 고군분투를 해야했으니 말이죠. 이번 영화 <곡성>에서 조금은 특이한 것이 주인공 '종구'(곽도원)가 경찰이면서 주인공이라는 부분입니다. 종구는 영화가 시작되면서 지극히 사건의 바깥에서, 공권력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딸이 저주에 걸리면서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가 극을 풀어내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죠. 나홍진 감독의 작품세계관에서 무기력하고 제 몫을 못해내던 경찰이, 그와 같은 사회적인 신분을 벗어던지고 아버지라는 가정의 역할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사건에 개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의 변화를 보여주려는 생각이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장면은 영화를 보는 관점을 주는 중요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영화일수록 오프닝 시퀀스는 그야말로 명확한 프레임을 제시해주죠. <곡성> 역시도 오프닝 시퀀스의 성경구절 중 하나가 눈에 띕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종교적인 색채와 무속신앙의 접점에 닿아있는 오컬트 장르의 영화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오프닝 시퀀스의 구절은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울테니, 관객 여러분은 믿고 싶은대로 보십시요' 라는 가이드 라인같이 느껴진다. 감독 역시 공식적인 코멘트로 영화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고 애둘러 말하며 작품에 담고자했던 메세지를 일관되게 던지는 느낌이네요.


     

    <곡성>에 대해 글을 쓸때 각 인물의 관점별로 나열을 해볼까 하다가... 가장 의문스럽고 중점적인 부분들을 중심으로 엮어 리뷰해보고자 합니다. 각 부분들마다 서로 모순되거나 양립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자체가 애매모호하고 모든 하나하나 자체가 가능성이 있으며 의심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


     


    1. 일본인(외지인)은 과연 악마일까 ...?


     쿠니무라 준이 연기한 '외지인'은 악마일수도 있고 귀신일수도 있고 악마숭배자일수도 있고 예수일수도 있다고 보는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야말로 뭐로 보든 다 맞다는 거죠... 외지인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들이 많은데 다 맞는 말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곡성이라는 마을 전체에 저주를 내리기 위해 외부에서 들어온 악마이거나 귀신이 씌인 일본인, 또는 자신의 몸을 바쳐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악마숭배자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죠... 영화에서 외지인에 대한 정체는 그 누구도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감독조차 관객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현혹하기만 합니다.


     일본에서 온 교수니 스님이니 하는 마을 사람들의 소문부터 미쳐버린 주민들을 저주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주인공 종구가 직접 찾아가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외지인은 여행중이라는 애매모호나 대답만을 하고, 동굴로 찾아간 부제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도 '넌 네 의심을 확인하러 왔다.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죠. 이처럼 외지인에 대한 해석은 보는 이들에 따라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믿는 대로 보게 되는' 외지인이라는 존재인 것입니다.


     많은이들이 외지인이 영화 막판 이마에 뿔이 달린 악마의 모습으로 현신하기에, 결국 외지인의 존재는 악마가 아니었냐하는 반응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악마이지만 부제를 현혹하기 위해 손과 발에 성흔을 보여준 것일까요..? 부제는 카톨릭 사제라는 관점에서 외지인을 바라보았고, 외지인이 예수의 재림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다가 이내 악마라는 확신을 가졌을 때 악마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 아니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정체를 말해달라고 그럼 믿겠다고 할때는 부제에게도 '믿음'이란 것이 살짝은 비쳤지만 이내 '의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원래 생각하던대로 악마로 의심한 것이 아닐까하는 부분이죠. 그가 악마를 물리치기 위해 낫과 묵주를 들고 온 것을 보며, 그리고 그것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은 그가 의심을 처음부터 의심을 하였고 끝내 그 의심을 뿌리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어쩌면 외지인은 진짜로 악마여서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른 형상을 보여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을에 저주를 내리는 일본무당으로 생각할 때는 그리 보이고, 마을 사람들의 피를 말려 하나씩 죽이려는 귀신이라면 그러한 모습으로 자꾸 보이는 것이죠. 무명(천우희)의 말대로 '그것이 눈에 계속 보이는 것은 그것이 니 피를 말려죽이려는 것'이라는 대사는 결구 너의 의심, 너의 생각이 스스로를 옥죄게 만든다는 힌트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외지인이 마을의 아낙네에게 '음탕한 암캐년'이라 하고 겁탈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이나, 그가 주술에 사용하는 염소의 머리는 그가 악한 인물을 가리키는 공통된 단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외지인과 대립되는 무명(천우희)의 존재에도 의문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지인이 악한 존재라면 무명은 선한 존재이고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이죠. 그녀 역시도 산신령이나 절대자의 매개체로 보는 의견들이 많지만, 실존하지않는 '착한 귀신'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선과 악이 구분되어 결정되면 영화의 꽤 많은 부분들이 설명가능해지니 말이죠.


     


    2. 선과 악의 대립, 그 중간에서 이를 의심하는 인간의 나약함


     외지인이 악을 상징하고 무명이 선을 상징하여 주인공의 가족을 수호하려 한다는 대립구도라는 가정하에 영화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외지인은 악마를 숭배하며(혹은 그가 악마이거나) 곡성의 마을 주민들을 희생양으로 바쳐 악마의 현신을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무속신앙)이 병에 걸린 마을 주민들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이에 의심을 가진 인간들(대표적으로 주인공 종구)로 인해 수호하지 못하고 하나둘 희생된다... 무명의 대사중 "사람을 의심하여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에서 앞의 사람은 자기를 말하고 뒤의 사람은 의심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표현한다고 봅니다. 결국 자신들을 지켜주려는 사람을 귀신보듯이하여 믿지 못하였기에 악마의 현혹과 저주에 목숨을 잃는다는 것을 종구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실제 마을사람들 중 희생된 일가족들은 모두 굿을 하고 몰살당합니다. 굿을 한 직후에 몰살되어 우물에서 시체로 발견된 가족을 보면 그 단서를 제공하고 있죠... 용하다는 무당으로 등장하는 일광(황정민)은 애초부터 악의 편에 있던 조력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반전이라면 반전일 것 같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정작 의심할 곳을 의심하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진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일광이 굿을 하며 장승으로 보이는 것에 정을 7~8곳 박는 모습, 염소를 죽여 굿을 마치려는 모습 등이 보입니다. 이는 달리보면 애초에 일광의 굿이 효진(종구의 딸)의 굿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저주였으리라 보입니다. 효진을 도우려는 마을의 신령을 묶어놓고(장승에 정을 박음) 외지인의 주술(악마숭배)과 마찬가지로 염소를 이용한다는 부분에서 말이죠. 살을 날린다는 것이 애초에 외지인을 향한 살이 아니라 무명(천우희)에 대한 살이었으며 효진에 대한 저주가 아닐런지 싶네요. 일광은 부정타는 짓을 하지 말라며 역살을 맞을 수 있다고 종구에게 경고합니다. 결국 염소를 죽이기 전 종구가 부정타는 짓으로 일광의 주술을 막고 딸을 살려내며 역살을 맞습니다... 그 역살을 일광이 맞았다고 본다면 종구네 집을 다시 찾아갔다가 무명에게 호되게 당하는 장면을 보면 이해가 되고... 종구가 역살을 맞았다고 본다면 결국 무명이 선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지겠습니다.


     외지인과 일광은 영화내내 접촉하거나 접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둘이 같은 편이라고 의심하기도 어렵고 둘이 애초부터 악한 편이었을까하는 의심까지 들죠... 그러나 둘의 의상차림이 비슷하고, 희생자의 사진을 찍는 행위가 동일합니다. 또한 까마귀를 이용한다는 부분이 동일합니다. 외지인의 집 위에는 까마귀가 득실거리고 외지인의 개가 죽었을때 까마귀가 날아들어 이를 먹어치웁니다. 반면 일광이 종구의 집에서 발견한 것은 죽은 까마귀이며 종구가 역살을 맞고 자신의 집에서 발견한 것은 죽은 까마귀 떼였습니다. 까마귀에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흉조이지만, 일본이나 다른 문화권에서는 길조이기도 합니다. 외지인과 일광이 선한 편이라면 무명은 악한 편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종구네 집 장독대 안에서 죽은 까마귀는 일광이 외지인의 존재를 알게 해주는 실마리가 되는 것은 확실해보입니다. 장독대에 죽은 까마귀로 인해 몰랐던 같은 편이 이 집에 저주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것이죠. 어쩌면 이 까마귀는 무명이 일광에게 던지는 경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이 집을 자신이 수호하고 있으니 물러가라는 의미이기에 일광은 종구를 설득하여 무명을 물리치려는 천만원짜리 굿(이라 쓰고 저주, 주술이라 읽음)을 제안하는 것이구요...


     결과적으로 종구도 그러하고 관객도 그러하고 자신들이 보고 느끼고 믿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끓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신기한 영화입니다... 종구는 효진이에게 '아빠가 경찰이다. 아빠는 다 알 수 있다. 아빠가 다 해결할게'라고 되뇌이지만 효진은 되려 '뭐가 중한 것인지도 모른다'며 오히려 타박합니다. 이처럼 종구로 대변되는 인간은 자신들이 진리를 알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신 안의 의심을 알 수 없다는 것이죠. 경찰로 대변되는 시스템이나 공권력 역시도 사건해결에는 무쓸모이며 주인공 역시도 후반부로 갈수록 경찰 옷은 집어던지고 충실히 아버지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영화 후반부 무명과 마주친 종구의 심리적 갈등도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됩니다. 일광은 하얀 옷을 입고 있는 그 여자가 귀신이라고 하며 어서 집에 돌아가 효진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일광이 악마의 속삭임이라면 무명은 덫(저주를 잡기 위한)을 놓아뒀으니 닭이 3번 울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며 종구에게 자신을 믿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러나 무명의 발밑에 보인 효진의 소지품(머리핀)을 보고 의심은 커져 결국 자신의 가족이 몰살하는 화를 불러오죠. 애초에 그 머리핀은 종구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경찰서에서 효진이 흘렸으니 말입니다... 결국 무명이 효진을 저주했다는 의심을 뿌리치지 못한 종구는 집으로 향합니다.(무명이 효진에게 저주를 건 악한 편이라면 종구의 의심은 합당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가족이 몰살하게 된다는 점에서 천우희가 맡은 역할이 선한 역이라는 것에 더 많은 설득력을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또한 이 장면은 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베드로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3. 그 외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의 지성이나 진리, 이성같은 것은 하나같이 무기력하게 사건에 접근합니다. 공권력은 독버섯으로 인한 환각작용으로 사건을 종결내고, 종교는 효진이가 아픈 것은 의사를 믿으라며 한발짝 물러납니다. 악마를 퇴치하고 신을 수호해야하는 카톨릭이면서도 말이죠. 종구가 만난 신부는 결국 믿음이 없고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는 나약한 인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제 역시도 외지인을 두려워하며 결국 영화 종반부에 가서 구마를 하기 위해 묵주와 낫을 들고 동굴을 찾아가지만, 자신의 삼촌(종구의 동료경찰)의 죽음을 보고 발길을 향하므로 종교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한 행동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영화 속 의사 역시도 효진의 두드러기를 보고 명확한 진찰을 하지 못하고 종구에게 침을 놓는 한의사 역시도 낮술먹지말라며 진실을 외면합니다.(종구의 마비증세는 대문앞에 죽은 검은염소?양?을 걸어놓은 저주로 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에 현대과학, 종교로 대변되는 인간의 진리는 사람이 갖게 되는 마음 속의 의심앞에 얼마나 소용없는 것이고 부질없는 것인지 보여줍니다. 구마를 중심으로 한 <검은 사제들>에서 보여준 종교의 역할과는 꽤나 상반된 이미지였습니다.


     건강원 주인이 벼락을 맞은 것은 꽤나 임팩트가 강했던 장면이었습니다. '벼락=천벌'이라는 공식에서 보면 건강원 주인은 결국 벼락을 맞아 천벌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보면 악(외지인)의 소행으로 볼 수도 있고, 외지인의 집으로 종구를 안내한 건강원 주인에게 선(무명)이 내리는 천벌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그는 저주에 걸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으니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건강원 주인은 이 영화에서 꽤나 중요한 인물입니다. 종구에게 진실을 보여주겠다며 텅빈 냉장고를 엽니다. 단순히 웃고 넘어가는 장면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한, 감독의 메세지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쪼록 그는 종구에게 미끼를 던진 악에게 길을 안내한 안내자가 되는 꼴입니다. 외지인이 선한 존재라면 악한 존재인 무명이 벼락을 내려 건강원 주인을 벌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편집을 오묘하게 교차하여 일광의 굿과 외지인의 주술이 서로가 싸우는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일광의 굿은 무명과 효진에 대한 굿이었고, 외지인의 주술은 자신의 가족을 죽인 '박춘배'에 대한 것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감독의 코멘트에서 외지인의 의지로 박춘배가 되살아난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외지인이 악한 존재라면 박춘배의 육신에 악마를 소환하고자 하였던 주술을 감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고, 외지인이 선한 존재라면 저주에 희생된 자를 위한 위로라고 볼 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물론 이에 대한 대척점은 무명(천우희)이구요. 박춘배를 되살리려고 하였든 그 혼을 위로하려고 하였든간에 그는 좀비로 되살아납니다. 좀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장치이고 이는 그들의 행위가 저주의 완성을 위한 것인지 부활을 위한 것인지 불명확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어쩌면 죽이려는 저주에 맞선 무명의 영향력으로 인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르지요. 결국 박춘배는 저주에 걸려 병원에서 죽는 다른 희생자와 마찬가지로 죽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외지인이 '죽음의 저주'를 내리려는 것이었다는 부분에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좀비가 날뛰는 장면에서 외지인이 숨어 중얼거려 밤중에 못다한 저주를 완성했다면 말이죠.


     


    4. 이 모든 것은 적그리스도의 짓이다


     영화를 성경으로 바탕하여 바라보면 영화 속 캐릭터들과 장치는 성경에서 유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을의 저주를 풀기 위해 주술을 외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마을 주민들을 인신공양하는 외지인의 모습은 적그리스도. 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담아 저주를 풀기 위한 굿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니 악마의 하수인이었던 일광은 사탄. 종구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적그리스도에 쫓긴 무명은 그리스도, 예수의 현신. 마지막으로 끝내 그리스도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의심으로 가족읠 몰살을 가져온 종구는 베드로.


     영화 오프닝 시퀀스의 성경구절을 기억하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누가복음 24장 37절-39절)


     적그리스도(외지인)는 동굴에서 제에게 손과 발을 보여주며 자신의 성흔을 보여준다. 그리하며 부제의 의심과 두려움을 자극하고 너가 보기에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되묻는 모습에서 외지인은 적그리스도임을 보여준다.


     또한 적그리스도가 하던 주술의식인 희생자들의 생전 모습과 죽은 뒤의 모습을 사진찍는 것을 이어 받아 완수하는 것이 바로 사탄인 일광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베드로(종구)로부터 악한 존재가 아니냐고 의심받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사진들을 모두 태워버리죠. 후에 이 사진들은 일광에게서 발견됩니다. 외지인이 일광에게 보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둘이 같은 일을 하던 것이었거나, 외지인은 죽은 뒤 적그리스도로 부활하며 희생자에 대한 임무완수를 사탄에게 맡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탄인 일광이 그리스도의 출현(무명)을 마주하고 피와 내장의 오물들을 뱉은 뒤 곡성을 도망가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나방? 새똥?으로 인해 방해를 받아 결국 다시 곡성으로 향하는데... 이것 역시도 적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두려워말고 임무를 완수하라는 지시와 같아 보입니다. 결국 종구 가족의 사진을 찍어(영혼을 가둔다는 의미) 일을 마치죠.


     


    5. 역사적 우화로 보는 시각

     

     영화 속 외지인이 일본인이라는 설정을 고려하여 이를 일제시대의 한민족에 대해 보는 시각도 있어서 흥미로워 적어둔다.


     먼저 마을의 저주를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는 외지인은 일제국주의를 의미하며, 그를 신봉하는 무당 일광... 그의 이름을 일본의 빛으로 해석하면 일제앞에 선 친일파로 해석이 가능하다. 종구를 도와주는 척하며 결국 죽음을 위한 주술을 하는 일광의 모습은 교만하기까지하다. 또한 흰 옷을 입은 무명은 이름없는 독립운동가 또는 유관순으로 상징되는 백의민족을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매하여 친일파를 집안으로 끌어들인 장모는 당시 무지했던 민족의 모습이며 의심이 많아 결국 화를 부른 종구는 무기력하게 유린당한 민족, 그의 딸 효진은 위안부와 같이 당시 희생된 소녀들을 상징한다. 또한 하나둘 저주에 걸린 마을 주민들은 당시 행해졌던 마루타 실험을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너무 억지라고 볼수도 있으나 이 영화 자체가 의심을 만드니 이런 의심도 꽤나 합당해보이기까지 한다.




     6. 무명은 과연 선한 존재일까

     

     앞에서 얘기하면서도 간간히 의심을 하며 넣은 부분입니다. 외지인이 적그리스도, 악마, 악마숭배자 등 악한 편이라는 기조라면 과연 무명은 선한 존재일까 하는 것이다. 무명의 첫 등장에서 무명이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박춘배의 옷이다. 박춘배는 후에 좀비로 되살아나고 종구에게 살인현장을 목격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소문을 믿지 않은 종구는 무명의 이 말을 듣고 점점 의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 뒤에 효진이 아프기 시작하니, 종구의 의심은 무명으로부터 생겨 화를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무명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존재하는 듯 보인다. 그녀는 대부분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따금 나타나 알 수 없는 소리만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무명은 종구에게 죄없는 자를 의심하여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죄없는 자가 외지인일지도 모릅니다. 외지인은 그리스도이고 무명이 적그리스도 일수도 있고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선악의 반대입장 어디에 서도 이야기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죠.

     

     닭이 2번 울고 종구는 집으로 가 결국 아내와 종구는 죽었습니다. 디테일을 챙기는 감독의 특성상 실수가 아니라면 일광의 사진도 역시 두장이었다. 효진과 장모는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장모가 애초에 이 저주의 조력자였다면, 그래서 효진이 아프자마자 병원이 아닌 일광을 불렀다면...? 애초부터 이 영화에는 무당이 셋이나 등장하고 각 자의 목적이 달랐으며 일광이 외지인에게 조력하는 것이라면...? 이런 식으로 간다면 영화는 2류 3류 영화가 되버릴 것입니다

     

    참고로 불교에서 무명의 의미는 아래와 같다고 하네요.

     

    무명 - [명사] <불교> 십이 연기의 하나.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이른다.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 보통 어리석음을 말함





    마치며... 이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종구의 손을 잡고 제발 가지말라는 무명의 모습이다.


    의심으로 인해 결국 악마가 던진 미끼를 삼킨 종구. 그를 비롯한 관객들은 일광의 말대로 무명의 손을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가 자신의 가족을 구하길 바라게 만든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닭이 3번 울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갔다면 과연 가족이 살아남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종구가 삼켜버린 미끼는 결국 인간이 가진 의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는 인간의 욕망이며, 악마가 인간에게 던진 선악과이다.


    결국 <곡성>은 테레즈 라깽을 원작으로 한 박찬욱 감독의 <박쥐>처럼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악마의 놀음으로부터 어떻게 파멸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성경의 많은 구절들은 인용했다는 공통점이 있기도하다.


    이 영화는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처럼 영화를 보고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다른 반응과, 다채로운 해석과 관점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영화 <곡성>의 역할은 충실히 수행한 듯하다. 영화 중간중간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나 불명확한 건너뛰기는 이를 본 관객들의 상상, 관객들이 본 것을 바탕으로 한 의심으로 영화를 완성하고 결말을 회자시키고자 한 나홍진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이 영화 오컬트 영화일까? 오컬트는 신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괴기, 초자연, 마술적, 신비적인 것을 총칭하여 오컬트(Occult)라고

    하며 신비주의로 해석이 된다. occult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없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 또는 그러한 현상을 일으키는 기술.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건 '컬트영화'때문일 꺼구요...컬트영화란 '록키호러 픽쳐 쇼'처럼 저예산으로 상업적 배급경로를 타지 못하고, 특수 일부 매니아 계층에서만 광적으로 숭배하는, 반사회적이고 잔혹한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출처 :훌리건 천국 원문보기   글쓴이 : 드래곤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