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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상도와 잔리도 얼마나 골이 깊은가?

modory 2016. 12. 26. 09:30

경상도의 남인


조용헌 살롱- 南譜 : 조선일보 2016.12.26 
경상도의 뼈대 있는 상류층 집안에 갔다가 특이한 족보가 하나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남보(南譜)다. 안동의 학봉(鶴峯) 선생 집안에서 한 세트를 복사해줘서 필자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기호(畿湖) 지방에는 없는 족보이다. 조선 시대 경상도의 몇몇 남인(南人) 집안만

선별해서 수록해 놓은 족보이다.

'남보'에 들어가 있는 집안들은 그 자부심이 강하다. 아주 명예로 여긴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 노론(老論)의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영남 남인의 절개를 지킨 집안이라는 긍지

때문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거의 300년 동안 노론(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300년 동안 경상도의 남인들은 끊임없이 탄압에 시달리거나 회유의 대상이었다. 당시 노론은 집권 여당이었고, 남인은 벼슬 끈이 떨어진 만년 야당이었다. 남인 중에서도 기호남인(畿湖南人)은 가끔

벼슬을 했지만 영남에 살았던 영남남인(嶺南南人)들은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과거에 합격해도 좋은 자리에 갈 수 없었고 미관말직이나 돌았다. 비중 있는 정승, 판서, 참판 자리에 경상도

남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양가 없는 변두리 보직을 전전하던 남인들은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고 말단 벼슬을 내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책이나 읽으면서 여생을 보낸 사람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기호학파 노론들은 돈 생기는 좋은 자리를 싹쓸이했다. 노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남 지역에 도지사, 시장, 군수로 내려가 유력 남인 집안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아

남인당을 탈당하게 해 노론당으로 입당시키려는 작업을 했다. 춥고 배고픈 데다 오랫동안의

야당 생활을 견디다 못한 몇몇 남인 집안들은 노론당에 입당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노론당의 신임 안동부사가 안동에 내려오면 명망가 집안들은 근심에 찬 표정으로 시내에서

가까운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번에는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나. 절대로 압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결과물이 '남보'였다.

여기에 들어간 집안들은 300년 칼바람 속에서도 남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킨 집안이라는 뜻이다. 영남에서 유독 탈당이나 신당 창당이 쉽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25/2016122501533.html
노론 알기 /위키백과 사전  https://namu.wiki/w/%EB%85%B8%EB%A1%A0

서인(西人)과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 
 
  
숭명반청, 친청배금, 사대주의, 북벌, 예송논쟁, 소인배, 송자(宋子), 당쟁을 조장한 인물, 서인의 영수, 노론의 영수, 성리학의 대가 등 우암 송시열(1607~1689)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우암 송시열은 당대와 후대의 당파와 학자에 따라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받는 등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조선의 주자가 되기를 꿈꾼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선조 30년~숙종 15년) 족적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그 족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은 율곡 이이,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지는 서인(西人)계열이며, 퇴계 이황 등 동인(東人) 중심의 영남학파와 구별하여 서인 중심의 기호학파다. 서인은 스승 우암 송시열과 제자 윤증과의 갈등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된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시대의 흐름은 조선의 성리학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인조반정을 주도한서인과 노론 세력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거부했다.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을 내세운 우암 송시열은 중화 사대주의로 무장하여 효종이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에 표면적으로는 동조한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정권을

주도한 서인 세력이 주장한 북벌론은 그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와 내부 결속을 위한 방편

이었으며, 이는 명분론과 구호론에 그친 북벌론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우암 송시열과 서인(西人)들은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을 원수로 여겼을 정도다.
윤휴(1617~1680)와 허목(1595~1682) 등과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당쟁을 초월하여 정치인, 학자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은 유가(유교)의 교리를 주자와 다르게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면 절대 굽히지 않았다.   
주자학을 강화하는 한편 수구사상인 예학을 강조하는데 그 중심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기해예송논쟁(1659년)과 갑인예송논쟁(1674년)으로 정권이 바뀌고 피바람이 불기도

했다. 
우암을 비롯한 서인들은 강력한 신권정치로 기득권세력, 즉 조선 사대부의 권익을 대변하는 일에 급급했다. 
서인(西人)은 스승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제자 명재 윤증의 소론으로 분파된다.
송시열의 제자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명을 스승인 우암에게 부탁했다.
 
우암 송시열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에 대해 지난 시절 못마땅했던 점을 말하며 칭송하는 글을 적어주지 않았다.   
이 문제로 윤증은 스승 송시열과 사제(師弟)관계를 끊고, 학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된다. 
우암 송시열은 사후(死後)에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 등과 같은 자(子)를 붙여 송자(宋子)라 부른다.
자신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자부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았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원자로 정하려 하자 우암 송시열은 부당함을 주장하였고,

결국 유배당했다가 사약을 받는다. 
 
 서인과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과 남인의 영수 미수 허목은 정적관계였다.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으며 사상가이며 정치인이었다. 
우암 송시열이 중병으로 백약이 무효해지자 미수 허목에게 자신의 병에 맞는 처방을 부탁하였다.
허목은 일반인이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양의 비상(독약)이 첨가된 처방전을 보냈고, 송시열은 미수 허목을 믿고 처방대로 약을 지어 먹고 회복됐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였다.
조선의 대학자이며 사상가였던 두 사람은 서로의 인품을 믿고 신뢰하였다.
 



출처 : 방비워(방송비평워크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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