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남인
바로 남보(南譜)다. 안동의 학봉(鶴峯) 선생 집안에서 한 세트를 복사해줘서 필자도 집에 보관하고 있다. 기호(畿湖) 지방에는 없는 족보이다. 조선 시대 경상도의 몇몇 남인(南人) 집안만 선별해서 수록해 놓은 족보이다. '남보'에 들어가 있는 집안들은 그 자부심이 강하다. 아주 명예로 여긴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 노론(老論)의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영남 남인의 절개를 지킨 집안이라는 긍지 때문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로 거의 300년 동안 노론(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300년 동안 경상도의 남인들은 끊임없이 탄압에 시달리거나 회유의 대상이었다. 당시 노론은 집권 여당이었고, 남인은 벼슬 끈이 떨어진 만년 야당이었다. 남인 중에서도 기호남인(畿湖南人)은 가끔 벼슬을 했지만 영남에 살았던 영남남인(嶺南南人)들은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과거에 합격해도 좋은 자리에 갈 수 없었고 미관말직이나 돌았다. 비중 있는 정승, 판서, 참판 자리에 경상도 남인들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양가 없는 변두리 보직을 전전하던 남인들은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고 말단 벼슬을 내던지고 향리에 내려와 책이나 읽으면서 여생을 보낸 사람이 대부분이다. 반면에 기호학파 노론들은 돈 생기는 좋은 자리를 싹쓸이했다. 노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남 지역에 도지사, 시장, 군수로 내려가 유력 남인 집안사람들을 설득하거나 엄포를 놓아 남인당을 탈당하게 해 노론당으로 입당시키려는 작업을 했다. 춥고 배고픈 데다 오랫동안의 야당 생활을 견디다 못한 몇몇 남인 집안들은 노론당에 입당원서를 낼 수밖에 없었다. 노론당의 신임 안동부사가 안동에 내려오면 명망가 집안들은 근심에 찬 표정으로 시내에서 가까운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번에는 무슨 꼬투리를 잡으려나. 절대로 압박과 회유에 넘어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 결과물이 '남보'였다. 여기에 들어간 집안들은 300년 칼바람 속에서도 남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킨 집안이라는 뜻이다. 영남에서 유독 탈당이나 신당 창당이 쉽지 않은 역사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서인(西人)과노론의 영수(領袖) 우암 송시열 주도한 서인 세력이 주장한 북벌론은 그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와 내부 결속을 위한 방편 이었으며, 이는 명분론과 구호론에 그친 북벌론에 지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우암 송시열은 유가(유교)의 교리를 주자와 다르게 해석을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면 절대 굽히지 않았다. 했다. 대립하는 관계가 된다. 결국 유배당했다가 사약을 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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