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5.18 진실과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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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ory 2017. 11. 8.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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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8의 眞實-5.18 관련 증언





당시 11공수 62대대 지대장 중위 신 동국 (목사)

 

<1>나는 보았다, 당했다, 사격(명령)했다, 그리고 ~~

해는 내일도 동에서 뜨고 지구는 돈다.

1》 요즘 한창 흥행하고 있는 영화 <택시 운전사>는 노무현 당시 영화 <화려한 휴가>와 여러 가지 면에서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보여 진다.

본 영화 역시 진실을 무시한 채 흥행 내지 일부 의도에만 맞춰 제작된 영화로서 관람객이 오백만을 넘니 칠백만을 넘어가느니 심지어는 천만 명을 넘어 간다는 가공의 보도들이 연일 나오고 있다.

이에 국가가 혼란할 당시 특전사 장교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 국가의 부름에 의해 참가했던 진실한 내용과 체험담을 헌재 판결문의 토대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깔아준 멍석(518 진상 재조사 ㅡ최고 상부의 국정 과제로 선정 등)위에서,

당시 ROTC 초급 장교의 예리한 눈으로서, 목회자의 양심으로, 시대와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대한민국 역사의 진실을 당당히 증언하고자 한다.

아마 이는 시대를 밝히는 코페르니쿠스 적 증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얼마 전 피곤한 상태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영화 관람한 후 이를 입증하기 위해 역사의 현장 광주 등지로 37년의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2》 이제 본 영화의 왜곡성과 비현실성을 짚어가면서 5.18에 대한 핵심적인 사안들에 대해 역사에 비추어 진솔하고 당당히 증언하고자 하며,

그 중 아직 잘 밝혀지지 않은 비화들은 추후 발간될 <이제는 말할 수 있다>로 혹은 추후 연재칼럼으로 다 밝혀 나갈 예정이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일반 국민들이 잘 모르는 몇 가지ㅡ발발 동기, 고정 간첩들의 유언비어, 북한 특수군의 선제공격, 그에 매수되어 추종하는 끄나풀 폭도,

그들에 대한 정당한 사격 (명령), 최후 저지선의 붕괴,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산넘어 강건너), 패잔병 된 특전사, 추후에 활개 치는 유언비어, 광주교도소로 기수를 돌린 북한특수군, 청주 유골 430은 말한다, 그 외 사북사태 진상 등에 대한 실상을 지면이 허용하는 대로 밝히고, 결론 부분에 가서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3》발발 동기,

혹자는 과잉진압이 발발 동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으나 실상은 그게 아닌 것이다.

그 정도의 진압은 비상계엄 하에서 서울 •대구•부산 등 전국 각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믿는 자들이 많은 것은 다 고정간첩과 추종자들의 유언비어와 왜곡된 방송언론 탓이다.

김대중 일당은 북과 사전에 치밀한 음모를 했다.

그리고 당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 퇴진을 압박하면서, 8057일 성명서를 발표하며 광주 폭동을 획책했으며,

그 후 516일에 성명서와 대규모 군중집회를 하며 만약 신현확 총리 내각이 19일까지 총사퇴 하지 않으면 광주 사태를 일으키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그 후 김대중 체포). 이 직후에 전국 대학은 휴교령이 내려지고 계엄군이 투입됨)

이에 5.17 자정을 기해 전국에 확대비상계엄을 선포 [: 동시에 전국 대학은 계엄군이 투입되어 휴교 지시] 하게 된 것은 당시 시국 상 당연한 인과응보였던 것이다.

우리가 청량리 야간열차를 타고 송정리역에서 내려 트럭에 분승하여 조선대학교로 가던 날 새벽 조용했다고 증언하는 이들도 있으나 원래 큰 시위 후와 전은 조용한 법이다.

이런 시위를 틈타 북의 특수군 들도 이미 해제된 경계망을 피해 영광 등 해안과 육로를 통해 자연스럽게 엄청난 숫자가 침투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당시 운전사 김사복은 한민통 공작원으로서 본업이 일본의 어떤 조직과 줄이 닿는 조사원으로 힌츠페터와 사전부터 접선에 의해 연계하게 되었던 것이다.

4》북한 특수군 & 최후 저지선 붕괴 관련

4-1> 북한 특수군 5.18때 정말 왔었나?

-내가 보고 우리가 당했다–

문대통령은 5.18 기념식에서 "진상을 추가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여기에는 <북한특수군 출몰> 여부 및 그들의 만행과 <사격(명령)> 관련이 뜨거운 감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군과 <특전사의 패주> 그리고 <사선을 넘어 도피 및 탈출> 등도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광주교도소 습격과 북한 특수군 들의 '청주 유골 430'도 밝혀지고 알아야 할 것이다.

세계의 민주시위에 교도소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풀어주어 폭도에 가담시키고자 했던 역사가 있는가?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새로써야 한다

영화에서나 <5.18 기록관> 관련 사진 어디에도 이런 장면들은 없는 것이다.

2012 대법원 판례에서 "5.18 시 북한 특수군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우리 부대원들이 직접 북한 특수군 을 보고 그들과 싸우고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특전사의 눈에는 아무리 사복을 입고 시민군 행세를 하며 출몰한 어떠한 북한 특수군 이라 할지라도 정확하게 보여 지는 법이다.

특수군의 출몰 시간은 지만원 박사의 증언의 이동하는 육군 모 부대, 지휘부 폭파, 아세아 자동차 침투 시간대와 그 후 이동시간 1시간 정도 후로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이들 관련 상세내용은 지만원 시스템클럽 참조)

그들은 우리가 최후 저지선으로 방어하고 있는 금남로 도청 분수대 전방 100 m근처 (아마 지금 <5.18 기록관> 부근으로 추측 됨)까지 군중 사이를 비집고 장갑차와 수 십대의 트럭을 몰고 대오를 갖춰 진격해 와서 일단 최후 저지선 상 오른쪽에 멈춰 섰다.

(추가증언 위계).

이제 이를 당당히 증언하게 되면 '5.18 유공자'는 자연 빛을 잃게 될 것이다.

동시에 '민주화 운동'이라는 미명도 여러 '5.18 관련 법' 등도 사라져야 될 것이다.

광주는 음녀의 도시로 변하게 될 것이다. 거대한 맘모스공룡 자취만 안고 있는 텅빈 도시로 변하게 될 것이다.

관련 좌익세력과 북 추종자, 종북 정치인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게 될 것이다.


4-2> 특수군 들과 고정 간첩들의 만행과 유언비어 유포

특수군 들은 고정간첩단과 접선하면서 혼란을 틈타 민간인복 혹은 대한민국 특전 복으로 갈아입고 30~50명씩 단위로 바다로 육지로 침투해왔다.

이동 간 전투행동을 하며 보이는 대로 죽였다.

양민은 물론 임산부도 죽였다. 이들은 누가 죽였는지 모르게 감쪽같이 보이는 대로 죽였다.

대개 우리 특전사가 죽인 걸로 위장했다.

특히 고정간첩들과 추종자들은 "특전사가 우릴 다 죽이려 왔다, 경상도 군인들이 술 처먹고 여자 유방을 도려내고 ~~" 등으로 선동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며 군과 특전사의 소행으로 몰아 부치며 폭동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많은 주민들은 이런 선동을 믿고 추종하기 시작했다.


4-3>놈들의 선제공격 -내가 당하고 우리가 몰살 위기에 -

수많은 고정간첩들의 선동과 폭도 화 된 수십만 추종세력들과 팽팽히 대치하고 있는 금남로 대치선 상에서 2111시경 특수군 들은 시위대를 비집고 장갑차와 수십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우리 특전사가 방어하고 있는 최전방전선에 접근해왔다.

나는 맨 앞에서 중간에 2대의 장갑차와 함께 예의 주시하며 사랑하는 부대원들 (지대ㅡ중대ㅡ지역대ㅡ대대원)과 최고도로 긴장한 상태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며 응징하고 독려했다.

이제 최후의 보루 전남도청과 경찰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를 죽음으로 사수해야 하는 것은 우리 임무다.

특수군의 임무는 정규전보다 적 후방 교란과 비정규전이다.

그에 대비해 우리는 대비정규전 훈련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의 특수군의 출현과 선제공격을 우린 막아낼 수가 없었다.

팽팽하게 맞선 대치선상을 깨고 장갑차를 탄 북한특수군 쪽에서 우리 군을 향해 최후저지선을 넘어 먼저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혹자는 무조건 특전사가 선제공격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정한 공격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이 우리 군을 향해 화염병을 먼저 투척했던 것이다.

그중 한 발이 우리 장갑차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장갑차 안 햇지에 떨어진 것이다. 이런 솜씨는 일반인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훈련된 솜씨다.

이에 그 장갑차가 불길과 화염에 싸여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최후전선의 공백(취약지점)을 뚫고 특수군 장갑차가 돌진해 오면서 그 뒤에 수십 대의 트럭과 수백 명의 폭도들이 뒤따랐다.

특별히 잘 훈련된 솜씨로 장갑차를 휘몰아갔다.

이는 당시 예비군들이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햇지에 비친 특수군의 인상도 험상궂고 검붉게 탄 얼굴들이었다.

뒤따르는 트럭에 특수군, 추종자 및 종북 폭도들을 태우고 군을 향해 맹공을 가해 왔다.

그들은 일시에 공격해 오면서 실탄도 없는 군을 향해 화염병과 병•돌들을 마구 던졌다.

어떤 이는 쇠파이프와 각목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에 맞아 얼굴이 피투성이로 변하는 자들도 속출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4-4> 최후저지선 붕괴 -일시에 최후저지선이 붕괴되었다-

일반 시민이나 폭도들만으로 무너질 특전사가 아니다.

북한 특수군 놈들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진격했기에 최후 전선에 합류해 있던 경찰기동대 •육군은 물론 최 일선을 지키던 특전사까지 후퇴(작전상 후퇴)와 더불어 최악의 작전인 36계 도망작전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최전방 전선 후방에 적들이 대기한다는 것은 죽여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이에 거대한 군이 북한 특수군과 간첩 및 폭도들에 의해 거침없이 당하고 퇴각하고 36계로 도망쳐야만 했다.

이때 어느 누구도 '퇴각 명령' 을 내린 자가 없었던 것이다.

놈들의 선제공격으로 군이 와르르 무너지는 바람에 목숨 부지를 위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 무너져가는 부하 동료들에게 "퇴각하라" 명했지만 그 소리가 입안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크게 울려나지를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경찰기동대들은 총까지 버리고 도망치는 자도 더러 있었다.

군이 전멸의 위기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도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음을 도청 앞 분수대 가까이 까지 도망가서야 알게 되었다.

이제 군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특전사 천명이 북한군과 폭도들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다다른 것이다.

", 주여! 저희들을 살려 주소서.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소서." 간절히 속으로 기도했다.


4-5> 특수군 과 그 추종자들의 만행

북한특수군 과 그 추종자들을 태운 장갑차와 수십 대 트럭들은 군 본대에 엄청난 피해(사상자 속출)를 끼치고 분수대 앞에서 우측 길로 빠져 나갔다.

그리고 전남 일대 경찰서 지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 등에 침투해 순식간에 소총 수 만정과 실탄 수십만 발을 탈취했다.

대항하는 경찰 및 양민들을 무조건 학살 등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아울러 고정간첩과 추종자들은 각종 유언비어와 위협 등으로 더 많은 추종자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5》대응사격(명령)

1차 선제공격을 가한 북한특수군 과 추종 세력들의 장갑차와 수십 대 트럭이 최후 저지선을 지키고 있던 군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쏜살같이 군 본대를 물러가게 난 뒤,

이제 2차 잔류 특수군 을 선두로 고정간첩과 수십만 추종자와 폭도들을 이끌고 북의 깃발과 머리띠를 두르고 김일성을 찬양하며 구호를 외치며 진격행렬이 시작되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행렬이 지금도 눈에 그리고 귀에 선하다.

1차 공격도 막지 못한 터라 2차 본대가 공격해오고자 할 시 엄청난 위협이 당시 전군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의 노도와 같은 물길을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다.

우리 군과 특전사는 중과부적으로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이제 장갑차와 트럭으로 무장하여 공격한 선제 공격팀 들은 전남 일대 지파출소를 공격하여 수만 수십만 총과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제 우리는 모두 나라를 지키다 죽기 직전의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주여 저희들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런데 우리 군 본대(대대본부 혹은 여단 본부)에서는 망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최후 전선이 빵구나서 최대의 위기에 처해진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몇몇 하사관과 병 고참 들이 나에게 "지대장님 이거 이대로 두면 우리 모두 죽겠습니다. 사격을 하도록 해줘야 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러함을 인지를 했던 것이다.

이에 상사께 건의했다.

"지역대장님 이거 이대로 모두 엄청난 위기에 처해졌습니다. 사랑하는 부하들을 모두 잃겠습니다. 사격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당시 중대장은 보이지 않았다. 중대장은 광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진압작전을 열심히 펼쳐 탈진했던 모양이다.

그때 여단 본부에서 대형 마이크로 시민들 진정하시라는 방송이 나가는 듯했다.

긴박한 와중이라 어렴풋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이어 상사께 보고했던 내용은 대대장께 보고되고 바로 경계용 실탄 20발씩 배정되어 졌다.

이제 마지막 생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 지역대 별로 주위 건물을 지형지물로 하여 거점을 확보하게 했다.

우리 4지역대는 지역대장을 중심으로 하여 분수대 앞 수협빌딩으로 진입했다.

많은 수협 직원들이 걱정스런 모습으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사태를 다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옥상 거점을 확보했다.

사격 명령은 누가 내린 것도 아니지만 각자 사격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상당수는 공중을 지향했지만 일부는 자연스럽게 총구는 특수군 과 폭도들의 우두머리 쪽을 향하게 되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막상 총구는 불순분자와 특수군 놈들을 향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 누군가(내가) 신호탄 격으로 최초의 1발을 쏘았다.

이와 동시에 산발적으로 사격은 실시되어졌다. 내가 상사께 실탄 배분 요청에 의해 실탄이 배분되어졌고 사격 신호탄 격으로 먼저 한 발을 쏜 것에 의해 다들 사격이 개시된 것이다. 이것이 5.18 당시 <최초의 사격명령>이 되는 셈이다.

일부 5.18단체나 검찰, 정치권 등에서 전두환 이희승 등으로 사격명령자를 찾고 있으나 이들은 연목구어를 하는 어리석은 작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초급장교 내지 현장 지휘관들이 생존권 차원에서 그리고 내 조국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 사격명령을 했고 정의의 불을 뿜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선량한 시민을 향해 쏘지 않았다.

북한특수군 과 고정간첩 그리고 그들에 동조하는 우두머리 적성분자들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소한의 사격을 했다. 혹 일반 시민들이 단 한 명이라도 다칠까봐. 그리고 공포로 위협사격을 했던 것이 대다수였다.

이제 적들의 진격이 주춤해졌다.

잠시 후 전남대 부근에서 굉장한 총성이 울렸다.

우리 쪽을 향해 갈기는 총성이었다. 곧바로 시가전이 전개될 것 같았다. 위협을 느끼면서 분수대 앞에 재집결하게 되었다.


6》사선을 넘어 도피 및 탈출 –그 후 퇴각과 숙영지를 버리 고 무등 을 넘어-

최초 사격이 있은 후 잠시 소강상태가 진행되었다.

이제 적들은 수만 수십만 총과 실탄을 접수하고 장갑차와 각종무기를 확보하고 있음을 안 후 아무리 강력한 특전사도 소총만으로 대항할 수 없다는 상황인식을 하게 되었다.

잘못하면 전체가 몰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사격으로 잠시 소강상태를 만들어 놓은 이틈을 타서 이제 최후의 보루(도청과 경찰청)를 버리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도청에서 숙영지 조선대학교까지 이동조차도 사선을 넘는 것 같았다.

건물 뒤에 숨어서 우리를 향해 어디선가 사격하는 적들이 있을 것 같았다.

어렵게 숙영지 조선대학교로 퇴각한 후 불필요한 소지품들을 소각한 후 최소 장비만 휴대한 후 무등산을 넘어 밤새도록 개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도피 및 탈출이 시작되었다.

밤에 온 시가는 불타고 있었다. 로마 대화재 참사 같았다.

혹자는 신라와 백제의 전투 후 패배하여 퇴각하는 패잔병 같았다고 한다.

가끔 장갑차가 출몰할 시에는 전 단위부대가 논두렁에 엎드려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몸을 은폐했다.

합류 못한 어떤 장병은 총기 다 버리고 빤스 바람으로 도망쳐온 이도 있었다.

여단장 운전병도 죽고 여단장은 무등산 미군통신대에 의해 구출되어졌다고 한다..

국군과 특전사가 북한특수군 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쫓겨 패잔병같이 밤새 도피 및 탈출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 후부터는 지면 관계상 다음 회로 돌리고자 한다.


7》 광주 교도소로 이동-연속 패배 후 최초의 영광된 승리-

북한 특수군은 육군 모 사단 폭파 성공, 아세아 자동차 습격 성공, 장갑차 트럭 탈취 성공, 최전방 전선 진출 성공, 화염병 투척과 선제공격 성공, 특전사 초토화 성공, 전남 일대 경찰서 지 파출소 습격 성공, 엄청난 무기 노획 성공, 고정간첩들과 합세하여 선무활동 성공 등등 북한 특수군의 거침없는 승전보가 이어져 나갔다.

계엄군과 특전사는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여기에 한 줄기 빛이 비추어졌다.

김일성은 이에 이를 더욱 확실하고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여 광주지역에 확실한 적화통일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교도소 수감자들을 해방시켜 폭동의 동력을 확보하라"는 지령을 내리게 되었다.

당시 광주교도소에는 비전향 장기수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 등 사상범 180명을 포함한 2,700명의 수감자가 수용돼 있었다.

광주에 침투한 북한특수군 600명은 대한민국 특전사 격파, 전남 일대 경찰서 지파출소 공격 무기 노획 등 승승장구의 기세로 군을 얕보고 교도소 수감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교도소로 집결했다.

521일 밤 그들은 6회에 걸쳐 결사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런 통신을 사전에 감청하여 즉시 공수부대(3공수)를 투입해 참호를 파고 북한특수군(당시는 시민군이라 불림)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에 만난 3공수 친구 K 중위, "그날 사전에 정보를 감청 후 대대장의 지시로 낮에 호를 파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9시경 이후부터 그 놈들은 철조망을 넘어 당당히 공격해왔다. 철조망 신호에 의해 침투조가 왔음을 감지한 후 대기하고 있다가 침투 인원이 어느 정도 되었다는 판단이 되었을 때 신호에 의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적은 그들은 이런 식으로 6 차례나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나 다 격퇴했다."

그날 여기에서 그들은 교도소를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고 얕보고 과감히 공격했던 것이다.

그날 적 공격 주력 부대 거의가 전멸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 계엄군이 거둔 최초의 승리의 개가였다

이 단 한 번의 승리로 인해 김일성 적화 야욕에 쐐기를 박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교도소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더라면 수많은 사상범들의 출현과 더불어 광주는 바로 그들의 거점 도시로 됨과 동시에 폭동 평정이 어려워졌을 것이고, 이로 인해 북한의 남침이 즉시 이어 졌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제26.25 화마 속에서 파괴되고 수백만의 전사자가 속출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들 당시 최초의 승리를 확보했던 용감한 3공수 용사들에게 유공자로 선정하여 국가훈장을 하사해야 마땅하리라 본다.

당시 북한이 광주에 파견한 인력은 맥가이버 능력을 갖춘 특수군 600명 말고도 또 다른 600여 명의 정치공작조가 따로 왔었던 것이다.

이들은 광주로부터 200km 떨어진 청주의 깊은 야산에 가매장했다. 광주 지역에 묻으면 금방 발굴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이런 내용을 김대중과 광주 5.18 단체, 그리고 노무현을 지나 현 정권에까지 쉬쉬하고 있는가?

왜 이를 당당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가? 당시 계엄군 당국에서도 왜 보도 통제를 했을까?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했던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이제 이들의 주된 목표는 광주 교도소이다. 수백 수천 명이 갇혀 있는 교도소를 습격하여 그들로 하여금 폭동 앞잡이를 만들기 위해서다.

처음 300명 정도가 광주교도소를 몇 차례 공격했다.

용이하지 않았다. 공수 3여단과 일부 육군 모 사단에서 합동으로 지키고 있었다. 특히 3공수에서 지킨 작전이 빛을 발했다.

육군 모 사단 공격하고 아세아 자동차에서 장갑차와 수십 대의 트럭을 탈취해서 11공수가 방어하고 있는 최후 사선을 뚫는데 자신을 얻은 북한 특수군은 전남 일대 무기고를 일순간에 다 뚫고 경찰과 군을 궤멸시켰던 것이다.

특수군은 이제 자신감을 얻어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던 잔당들과 합세하여 교도소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만하게 보고 쉽게 탈취할 것으로 생각하고 광주교도소를 6차례 공격했으나 3공수가 호를 파고 완강하게, 지혜롭게 지키고 있어 이를 뚫지 못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던 것이다.

청주유골 430은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600여 명 중에서 430명의 사망자와 그 외 사상자를 포함 500여가 희생된 후 이들은 지령에 의해 유골들을 청주에 적당히 암매장한 후 북으로 은밀히 복귀했던 것이다.

이들 청주 유골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기 위해 또 다른 청문회를 열어야 할 것이 아닐까}

금남로에서 장갑차를 몰던 용감한 용사라고 영웅 취급하며 각종 언론이 예찬한 것은 물론 5.18기록관, 도청, 망월동 묘지, 광주시청 등에 버젓이 올라와 있고, 광주가 애타게 찾고 있던 그들 몇몇 용사들은 광주교도소 공격 당시 430구중에 포함되어 희생되어졌던 것이다.

이 미련한 것들 광주 폭동 주동자들아! 죽은 시체들 더미에서 유공자 북한 특수군 용사를 찾아라!!

아이러니하게도 북한에서는 이들 430 용사가 현재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과연 광주에서 기념하는 5.18

국민들이여! 문재인은 내년 지자제 선거 때까지 헌법을 개헌하여 이렇게 왜곡된 5,18 광주

사태를 헌법전문에 넣겠다고 했습니다!!!

우대받는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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