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0~27일 광주/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5·18 체험기
내 고향이 충청도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1979년 10월17일 釜馬사태에 진압부대로 참가한 바 있어, 영남과 호남의 문제로 오해되기 쉬운 광주사태의 진술에 객관성을 높여 주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軍으로부터 받은 혜택이 全無한 지금의 이 시점에,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이 진술의 객관성을 높여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광주사태에 대한 공개적인 설명을 자제해 왔다. 망각 속에 덮어 두자는 생각에서였으나 오늘 육군의 권유로 이제 그 사태의 전부를 진술하게 됐다.
진술상 고지식한 표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려는 의도이지 결단코 과시가 아님이 전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여단은 육군 기동타격대로 現 주둔지에서 출동준비만 해놓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통상 군사작전에서 중앙대비(기동타격대)가 임무에 투입된 일이 없어서 「이번에도 영내에서 대기만 하다가 해체되겠거니」 하고 좋아했다. 출동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잠자리며 먹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사령부에서는 『시위진압 경험이 많고 지난해 10월 부마사태에 출동하여 깨끗하게 임무를 완수한 3여단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도대체 시위진압에 육군의 기동타격대가 가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전투복에서 얼룩무늬복으로 갈아입고 총과 탄띠와 실탄에 철모를 착용하면 준비완료다. 특별히 시위진압 출동이라 하여 장비가 달라지지 않는다. 敵 지역에 침투하는 장비로 출동하는 것이 규정이다.
내의 2벌, 예비 전투화, 치약·칫솔, 양말, 모포를 넣어 꾸리고 단독 군장으로 차량에 탑승하는 게 전부다. 대검은 개인지급하면 분실과 사고의 우려가 있어 지역대별로 창고에 보관하여 출동장비에는 빠져 있는 게 상례였고, 내가 공수단 10년 근무 중 대검을 지급받아 본 기억이 없다.
다만 이날 출동 때는 「만반의 준비」를 위해 개인당(장교는 제외) 가스탄 1발과 지역대당 미제 E-8 발사탄 1세트씩을 지급받고, 진압봉 1개씩을 추가 지급했다.
정웅 사단장은 패퇴한 장수처럼 초라하고 질린 표정으로 『공수단이 학생들을 마구 때린다』고 모기소리만 한 소리로 여단장에게 하소연했다. 여단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두 지휘관의 대화를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7여단 권승만 중령을 만났다. 오전에는 좀 나은 편인데 조금 있으면 시위 군중이 갈쿠리(갈고리), 쇠파이프, 몽둥이, 돌 등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공수단의 얼룩무늬복만 봐도 도망가기가 바쁜 게 이제까지의 시위 군중이었는데 도망은커녕 공격을 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조짐이었다. 아마도 열차 안에서 건빵 1봉지와 별사탕 댓 개를 먹은 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게 소위 비상식량이었으니까. 전남대학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던 우리는 곧 광주시내에 배치됐다. 우리 대대가 맡은 지역은 양동다리에서부터 광주고속에 이르는 광주의 남쪽 주요 도로였다. 장비가 젖고 추워서 무작정 도로에 서 있기는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병력을 팀 단위로 주요 교차점에 배치하고 양동교에 서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도청 쪽과 양림교, 충장로 지역에 배치된 11, 12, 13대대 지역에서 시민·학생들과의 잦은 충돌이 있다는 보고가 무전기에 들려왔다.
중간중간에 우리 병력 하나둘을 10여 명의 시민이 에워싸고 욕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세계 최강을 자랑한다는 무적의 공수단이 시민에 포위되어 욕을 듣는다니…. 병력이 너무 분산배치되어 힘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대대는 다른 대대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다른 대대는 많은 공격을 당했는지 배치고 뭐고 집어치우고 대대 전체가 집결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보호가 어려운 상태였다.
악몽의 5월20일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허기가 지고 입에서 냄새가 났다.
나는 대대 장병을 믿고 대대 장병은 나를 믿으며 버텨나갔다. 이때 『라면을 끓여 달라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공수부대에게는 안 끓여 주겠다고 하더라』, 『병력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성당 마당에 좀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신부가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군인은 광주에서 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軍 생활 15년간 얼마나 많은 훈련을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지역을 다녔는가. 김치·고추장·된장은 말할 것도 없고 힘들고 지칠 때면 주민의 도움을 받고 군인인 것을 보람으로 살아왔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직자의 덕목은 어디로 가고 철문을 굳게 잠근 채 안 된다고 돌아설 수 있는가?
비 맞고 지친 이 異邦(이방)의 군인, 집안이 어려워 특전하사로 자원입대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배고파 지친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식당의 미닫이문을 닫아 버린단 말인가?
집결하여 이동하는 것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7∼8명씩 열 지어 무표정하고 아무 일 없는 듯하되 발걸음은 빠르게 하여 광주역으로 모여들었다.
대대가 완전히 포위되어 시위 군중의 돌과 몽둥이에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내 병사들이 생각났다. 중령인 대대장이 이렇게 배가 고프다면 말단의 병사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지역의 방어에도 자신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나는 방어지역의 제일 선두에 있기로 했다. 내가 부여받은 3개 방어지역 중 제일 위험한 통로인 광주고속과 광주역을 잇는 도로 상을 방어하고 있는 데, 깜깜한 밤 느닷없이 도청 쪽 12대대 담당지역에서 버스 한 대가 터덜터덜 굴러 와서는 광주역 앞 분수대를 들이받고 넘어졌다.
얼룩무늬복에 베레모만 쓰고 차려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던 시위가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 도주 등 실로 6·25 戰史의 3군단 패퇴에 못지않은 치욕의 戰史가 기록되고 말았다.
찾아서 공격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허기져 있었다. 방향과 속도가 일정하니까 돌진 차량을 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배치된 대형에서 차량의 통로만큼만 열어 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배부르고 편안할 때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간헐적 공격과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늘 주의와 신경을 곤두세워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는 고함경고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잔영되었다. 敵은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부대 건재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배고파 지친 150여 명(1개 팀 평균 8명×20개 팀=160명─전남大 잔류인원)은 수백여 명의 파상공격 앞에 너무도 허약한 방어병력이었다. 우리와 근접한 폭도 대열의 유난히 공격적인 수 명은 몽둥이 몇 대로 제압하기에는 너무 힘들게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설사 폭도들을 체포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십 명이 필요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상황을 예상치 못하고 변변한 포승줄 하나 없이, 인계해 줄 경찰관도 싣고 갈 차량도 없이 몽둥이만을 방향 없이 휘저어대고 있었다. 『머리를 때리지 말라』,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멩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계엄군과 민주시민 항쟁의 차원이 아니라 죽이고 죽이려는 감정의 대립이었다. 폭도에 대항하여 정면 돌파를 감행하면서 함성으로 마지막 기세를 올리자 그들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최루탄 공격을 위해 방독면 착용을 구령했으나, 방독면을 착용할 힘마저 없어 가스탄 몇 개를 힘껏 던져 봐야 폭도와 함께 가스 속에 눈물만 흘렸다. 오히려 폭도가 가스탄을 주워서 다시 우리 진영에 던지면 발로 차서 겨우 풀밭으로 던져 두는 정도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다.
그 사이사이에 간헐적 차량공격도 피하거나 물리치고 한동안 적막이 있었다. 언제쯤 돌아가 라면을 먹게 될지 기약 없이 대기하는 사이에, 나는 공격이 뜸한 지역을 돌아봤다. 차량 안에서 졸고 있는 병사, 담배만 뻐끔대는 병사, 위엄 있던 대대장이 지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자 저녁 걱정을 해주던 연락병… 그리고 유일한 대대장의 기동수단인 지프차가 언제 또 폭도에 의해 불 질러질지 모르는 듯 길 옆에 대어 있었다.
공수단의 위엄과 자부심은 너나없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초라해진 지 오래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차 온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돌아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 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그는 내가 16대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선발되어, 제대를 며칠 남기고 광주에 출동했다. 자세한 상황은 보지 못했고, 상황이 끝난 후에도 그것을 물어볼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다만 16대대가 광주역 좌측 방향에서 반대 방향으로 포진하고 있는 사이에 돌진 차량이 시속 100km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으나, 대대장 운전병만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에 有人 돌진 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과연 화물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마치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았다.
최선의 공격이라고 떠오른 대대장의 전략(?)이라는 게 차량의 바퀴를 펑크 내는 일이었다. 얼마나 非폭력적인 방어대책인가? 또 그와 같은 생각이 순간적 발상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순수했던가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댔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될 상황을 예견이나 했겠는가? 총은 다만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분신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서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학에 남겨놓은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뿐이었다. 총을 꺼냈다. 탄창을 장진하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타이어를 조준하는 순간 차는 이미 분수대에 가까워져 명중되어 봐야 목적지까지는 쇠바퀴만으로도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준점을 차량의 연료탱크로 바꿨다.
우리 병력 사이를 이미 뚫고 지나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원한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에 연료탱크를 폭파시켜 차량이 뒤집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연료탱크를 조준했다.
제1차적 안전은 연료탱크와 내 총구 앞에 내 병력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다음은 실탄이 빗나가서 맞은편 가게나 民家에 피탄되었을 경우의 안전을 고려하여, 차량이 民家 지역을 통과한 후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올랐다. 만약 차량이 폭파하는 순간 운전을 하고 있는 저 폭도가 불에 타거나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탕」 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제발 명중하지 말아라」 하고 기도했다. 명중하라고 쏘면서 명중하지 말아라? 광주사태 해결이 운위되고 있는 차제에 있어서 왜 그것이 그냥 잊혀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가장 철학적 상황의 표현이다.
또 한편은 그대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심정은 폭도의 차량에 조준해 발사하면서 명중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 심정이 그것이다. 다행히(?) 차에 명중되지 않고 敵은 피해 없이 통과했다.
그 돌진 차량 운전사는 분수대를 들이받고 정지되어 12대대 병력에 체포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제 또 한 번의 차량공격이 예고되었다. 병력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앞 저 멀리 군중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2t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이 『차온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기억을 더듬는 지금 또 가슴이 뛰고 있다. 방법은 없었다. 총은 실탄을 제거하고 안전검사를 하여 도로 집어넣어두었다. 총을 꺼내 이번에는 틀림없이 명중시키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총은 아직 잡지 않았다.
아까와는 달리 직진이 아니고 병력이 피하는 쪽으로 향하면서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돌진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내 정면이었다. 100m, 50m, 30m… 명중시킬 곳이 없었다. 라디에이터에 명중시켜 봐야 돌진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바퀴는 잘 보이지도 않고 크기도 너무 작았다. 나는 여기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선택형 문제 하나를 출제하고 싶다.
공포에 질려서 심리적으로 두 발이 안 떨어진다.
다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간단하다. 내가 차량 앞으로 돌진하면 그대로 부딪혀 죽게 되어 있었고, 왼쪽으로 도망가면 운전사의 간단한 핸들조작만으로 나는 치어죽게 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도망가도 조건은 마찬가지이며, 뒤로 도망가도 절대속도가 워낙 차이 나기 때문에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짧은 0.1초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가장 끝까지, 죽음 앞에서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거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앞뒤의 선택은 이미 늦었고,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은 좌나 우 둘 중의 하나였다. 그는 축 늘어져 뻗어 있었다. 죽은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한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병력을 불러 치우게 하면 또 시체라도 짓밟을까 걱정이 되어 가만 놓아 두었다. 시선을 그 운전사에게 둔 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 차에 치어 광주사태가 끝날 때까지 다리를 절고 다니던 내 부하에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의도적으로 사격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한다는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광주사태에 참가한 대대장으로서 이만한 非폭력적 소신을 갖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나의 동료가 만에 하나라도 발포를 했다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은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3단 논법적 해석이 가능하다. 나는 군인이 아니며 이미 폭도의 편에 선 기회주의자다. 부하를 살리지 못한 지휘관은 이미 지휘관이 아니다.
하물며, 대대장 혼자 무장을 하고도 부하가 죽어가는 위험에서 이를 사용치 않았다는 것은 戰時에 총살당해야 할 비겁자이기 때문이다.
16대대가 전남대학 입구를 엄호하는 동안 우리는 전남대학교로 철수를 시작했다. 행군을 하면서 16대대 운전병이 치어죽은 과정의 단편과 차량 돌진 공격의 유형에서 「5만원짜리」와 「8만원짜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5만원짜리는 無人 돌격 차량 조작이고, 8만원짜리는 有人 돌격으로 공수단 대형을 한 바퀴 공격하고 오는 사람에 대한 포상이라고 들었다.
환각제 비슷한 약을 뺏어서 그 당시 군의관에게 확인시켰더니, 환각작용을 하는 약이 맞다고 했다. 따라서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고 조직적인 시위라는 것이었다. 어느덧 전남대학교에 도착했다.
전남대학교 숙직실에서 처음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살 것 같았다.. 숙직실 1평 방에 여럿이 다리를 포개고 잠이 들었다. 광주사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냈다. 16대대가 대학교 정문을 방어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날의 아침 햇살은 유난히도 밝았다. 09시쯤 전남대학 정문 앞 철교 위에 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수백 명이 되어 있었다. 점차 열을 지어 정문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돌과 몽둥이로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나는 군중에 대해 총격을 가하는 것은, 이 글을 쓰는 지금 가능한 상황의 예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 계획은 그 며칠 후 여단장에게 회고담으로 보고했다.
다른 어느 부대도 휴대 해 오지 않은 이 연막통을 3여단은 휴대하고 왔으며, 이 연막통이 바로 3여단만이 유일하게 폭도에 밀려 부대가 와해되지 않은 우연한 무기였다.
하물며 당시의 시위에는 처음 사용되었으니 그 위력이란 놀랄 만한 것이어서, 수천 명의 시위대가 전남大 정문에서부터 철교까지 연이어 있다가도, E-8 발사통 한 발이면 시위의 중앙부분을 가스지대로 만들어서 시위대의 몸통을 자르는 효과가 있어 쉽게 해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휴대한 발사통은 20여 개에 불과했다.
장갑차와 군용 차량에는 「全斗煥 물러가라」고 빨간 페인트로 어지럽게 씌어 있었다.
광주시민군에 참가했던 사람이 쓴 「5·18 광주사태」에 보면, 「나도 全斗煥이 누구인지 몰랐다」 하는 대목이 나온다. 바로 이것은 광주사태가 순수한 민간항쟁이 아니라, 권력의 내부까지 잘 아는 사람에 의해 조종되었다는 사실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전남대학이 점령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정문 앞에 각 2명의 보초가 잘 다려 입은 얼룩무늬복을 입고 위압감을 주면서 주민등록증을 확인하고 출입시키는 통상적 계엄업무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며, 정문과 샛문에서 심한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어젯밤 광주역 앞에서만큼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이었다. 정문에서 「敵」을 막아서는 어려운 임무가 16대대에서 13대대로 교대되었고, 가장 치열한 접전은 13대대가 수행했다. 나는 틀림없이 다음 임무가 우리 대대에 주어지리라고 판단하고 일찍 점심식사를 완료하도록 지시했다. 어제 밥 못 먹어 고생한 일이 생각나서였다. 정문 위주로 돌파하려던 「敵」은 이제는 전남대학 우측 능선의 철조망을 따라 게릴라식 침투를 시도했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시위군중이 학교 내로 진입하면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계엄군에게 붙잡혔다는 당혹감 때문에 도망갈 생각은 못 하고 서 있는 그 여학생에게 나는 얼른 나가라고 타일렀다. 지금 당장 나의 敵이고 상대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직접적인 대항을 하지 않아 실질적인 적개심이 우러나지 않았다.
시위 군중은 점점 많아지고 수십 차례의 충돌에서 부상자가 발생했다. 여단장은 상무대에 헬기로 날아갔다. 부여단장 정동인 대령이 여단을 관장하고 있었다.
부대의 와해가 목전에 다가오고 있었다. 병력은 지치고 敵의 시위는 점점 조직화되어, 정문으로만 돌파를 시도하려던 敵은 게릴라 수법의 침투를 시도했다.
『나도 고향이 광주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고 호소도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여러분 선량한 시민은 피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공격합니다!」는 등의 우리의 계획을 글씨로 적어서 시위 군중에게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사태의 경험이 없는 나의 상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시민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軍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軍에 공격을 감행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선량한 시민으로 시위에 참가했을 뿐인데 자신들을 자극해서 흥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목이 터져라 하고 호소했다. 최루탄 한 발을 쏴도 충분한 경고와 안전대책을 강구하고 발사했다.
러나 軍은 무고한 시민에 공격을 가한 게 아니다. 계엄군 앞에서 집요한 괴로움을 준 폭도에게도 끝까지 설득했다. 경고도 했다. 어찌 보면 극렬한 시위 분자들이 선량한 민주시민과 계엄군을 싸움 붙인 격이다. 그러나 그런 무고한 시민은 대피하라고 수없이 외쳐댄 후 공격을 감행했다. 이 양자의 주장을 전달해 주지 못한 것은 시위 속에 있는 혼란과 함성이다. 그래서 나는 善과 惡을 구분하여 善은 보호하고, 惡은 척결하기 위해 플래카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폭도들이 극렬하게 시위를 해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우리 여단이 폭도들에게 제압당하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3여단의 두 번째 행운이 시작되었다. 전남대학교 철수지시가 그것이었다. 엄격히 얘기해서 철수라기보다는 임무전환이었다. 상황이 어려워져서 대학교 확보가 아니라 광주교도소만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상급부대의 결정인 듯싶었다.
만약 그 시기에 철수하지 않았다면 우리 여단도 뿔뿔이 흩어져 무등산으로 도망가야 했다. E-8 발사통이 2발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광주교도소로의 임무전환으로 인해 여단은 패퇴의 치욕은 면할 수 있었다. 떳떳한 임무전환, 즉 폭도 너희가 무서워 도망가는 게 아니다. 대항하면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지만, 우리의 상급부대에서 다른 임무를 부여했다.
군장을 꾸리고 대형을 갖추고 차량을 열지워 전남대학 후문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를 눈치 챈 폭도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E-8 발사통 하나를 냅다 잡아당겼다. 우르르 흩어졌다. 30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이제 마지막 남은 E-8 발사통을 정문 후방에 고정시켜 장착했다. 병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본 폭도들이 또 한 번 공격을 감행했다. 마지막 E-8 발사통의 방아쇠를 당겼다. 「 우르르 쾅쾅」 소리와 함께 최루가스가 자욱했다. 이제 敵의 再공격까지 약 30분의 여유밖에 없다. 서둘러 장비를 챙기고 철수를 시작함으로써 내가 전남대학에 남았던 최후의 계엄군이었다. 그러나 맨 뒤에서 철수하던 병사가 『대대장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했다. 진정한 광주사태 시작을 알리는 신호등이었다. 이제 폭도가 총을 가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막느냐 못 막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죽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산을 타고 행군을 계속하면서 유사시 敵의 총격에 대비하여 산개할 준비를 갖추면서 서둘러 행군을 계속했다. 전남대학교는 일정한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보호를 받을 수 있었으나, 이제 허허벌판의 적진을 여단이라는 대규모가 보호 없이 행군을 시작한 것이었다. 행군 첨병은 전방에 시위 군중이 대치하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후방 경계병은 敵이 후방에서 추격하지는 않는지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우리를 향해 발포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그들은 고함만 지르고 통과했다. 시위 군중 속에서 총소리도 들었고, 멀리 군용차를 타고 카빈을 흔들고 지나가는 것이 목격됨으로써 폭도가 무장했음이 확인된 셈이었다.
광주교도소는 31사단 병력 중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다가 우리와 교대하기로 되어 있었다.
광주교도소가 가까워지면서 좀 안심이 되었다. 이제까지 충돌이 없었으니 다행이고, 광주교도소가 가까워졌으니 설사 충돌이 있다 하더라도 큰 피해는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동안의 긴장이 좀 풀리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선두가 광주교도소 정문을 들어서고 대형의 중간쯤에서 이동하던 내가 31사단의 대대장과 악수를 하고 주유소 앞을 통과하는 순간, 「탕!」 소리와 함께 무전병이 쓰러졌다. 나는 순간 놀라 뛰는 대대원들에게 주유소와 民家 지역을 수색하여 범인을 잡으라고 외쳐댔다.
정말 순간적이었다.
그 청년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우측 民家 지역은 골목마다 샅샅이 뒤졌으나 있을 리 없었다. 더벅머리 총각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청년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총질은커녕 만사를 제치고 행군하는 병력에게 물을 떠다 나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는 자신을 붙잡아 놓고, 범인을 대라니 친절 베풀고 뺨 맞는 것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탕!」 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것이었다. 범인은 그들이었다. 권총을 차고 배낭이 없는 나의 행색은 멀리서도 쉽게 지휘관임을 알 수 있었으며, 31사단 선임자와 악수를 하고 무전병을 옆에 대동했으니까 쉽게 지휘자로서의 표적을 제공한 셈이었다. 이 총격이 광주사태에서 내가 겪은 결정적인 죽음의 두 번째 고비였다. 죽음이 그렇게 쉬운가」 하고 반문하겠지만, 반드시 치명상을 입어야 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광주시내는 온통 폭도가 점령하고 있었고, 모든 도로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머큐로크롬 한 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저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황에 나 하나 살리자고 헬기가 뜰 형편도 못 되기 때문이다. 지금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그 무전병은 다행히 왼쪽 팔이 관통되어, 광주교도소 응급실에서 소독약과 소독솜 몇 장으로 하루를 보내고, 더 악화되지 않아 후에 완쾌되었다.
광주교도소에 도착한 우리는 이제 뚜렷한 방어목표가 생김으로써 작전을 한결 구체화시킬 수 있었고, 행동지침도 명확했다. 교도소를 디귿(ㄷ)자 형으로 방어하기 위해 우선 교도소 담벼락 중 民家를 마주보는 지역으로부터 건재 순으로 11, 12, 13, 15대대가 방어편성을 하고, 16대대를 예비로 보유하는 지역편성을 지시받고, 폭도들의 대량공격에 대비하여 양측 담장에 이르는 도로를 봉쇄 차단하고, 이 도로의 차단을 위해 2.5t 트럭을 도로에 가로질러 세워 두었다. 敵의 군사적 공격에 대비하여 양쪽 산에 경계병을 추진 배치하고, 교도소 옥상에서 전면으로 공격할지도 모를 敵을 감시하도록 했다.
개략적인 지역할당이 끝나고 장애물 설치도 완료되었다.
여단장이 상무대에서 헬기로 날아왔다. 우리는 광주교도소장실에 모여 차후 대책을 논의했다. 광주교도소장은 이 광주교도소 내에는 反共사범(소위 북괴 간첩)이 많이 있어, 이들이 탈출할 경우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대대장 중 하나가 불쑥 여단장께 이런 질문을 했다. 도대체 그런 질문을 한 대대장은 발포명령과 동시에 드르륵 갈겨대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발포 지시가 없으면 대대가 전멸을 당해도 안 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당시 상황으로 발포를 결정할 사람은 대대장뿐이라고 생각했다. 참모총장도, 대통령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교도소장은 담을 넘는 자에게는 현행 규정상으로도 발포하게 되어 있다고 답변했다. 나는 내가 알아서 하리라 생각하고 더 이상 여단장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를 불안하게 느낀 일부 극렬분자와 조직들은 그들의 강력한 지원세력을 얻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해 죄수들을 석방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각 지역에는 우선 책임지역 내에 호를 파라. 개인 호를 깊숙이 파고 들어앉아라. 만약 敵이 여러분 앞에 침투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먼저 발포하지 마라.
우리가 먼저 발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방어의 입장이고 敵은 공격의 입장이다. 우리는 정지해 있고 敵은 움직일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유리한데 일부러 먼저 발포할 이유가 없다.
둘째, 우리는 호 속에 들어가 있고 敵은 몸을 드러내고 공격해야만 한다.
셋째, 敵은 폭도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정규군이다. 사격술이나 각개전투 면에서 우리가 유리한데 굳이 먼저 발포할 이유가 없다. 만약 敵이 먼저 발포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우수한 사격술로 敵의 하반신 이하를 조준하여 敵을 제압하도록 하여라』 한 번은 아주 가까이서 들린 총성으로 敵의 침투가 임박했다는 첩보에 따라 전원 배치를 했고, 한 번은 12, 13대대 지역 전면으로 敵이 오고 있다는 첩보에 의한 여단 비상의 하나였다. 라디오와 상무대 첩보에 의하면 敵은 광주시내를 완전 장악했다고 한다. 광주시내 곳곳에 있는 건물에서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전남대학교에서도 불길이 치솟았다. 우리가 미처 가져오지 못한 매트리스를 모아 놓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 가끔 소방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기도 했다.. 우리 지역 산에 총을 든 젊은이들이 발견되어 敵의 침투로 알고 쫓아갔더니 다행히 상무대 병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부상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폭도들이 모든 도로를 차단해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온통 보리투성이에다 시커멓고 떡밥이었다. 民家 지역에서 얻어왔다는 김치를 한번 맛있게 먹은 것을 제외하면, 나는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날 오후 늦게 비행기에서 뿌려진 삐라(전단) 한 장을 주워 보았다. 폭도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으로, 그날 처음 계엄사령관 명의로 자위권 행사가 불가피함을 알리는 경고문이었다. 폭도들의 총격이 시작된 5월21일보다 하루 늦은 시일이었다. 그날 밤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폭도들은 역시 군인이 아니라서인지 야간활동은 뜸했다. 광주시내 곳곳에 모닥불을 피웠는지 군데군데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오전 늦게로 기억되는 시간에 20사단 1개 연대가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다. 우리가 입은 얼룩무늬복에 비해 해진 전투복에 온갖 잡동사니는 다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광주사태도 처음에는 공수단에 대한 적개심인 듯 출발했으나 사실은 사회 혼란으로 정권에 위협을 주자는 조직적 계획이 분명한데, 「공수단 때문에 광주시민이 불만이라니 공수단을 철수하면 되는 게 아니냐」 하는 발상은 근본부터 광주사태의 진의를 모르는 조치였다. 어쨌든 광주 도착부터 열차 전복이니, 갈고리, 곡괭이, 돌, 차량 돌진, 총기 등으로 시달림을 받아 지칠 대로 지친 우리들에게는 매우 고마운 조치였다. 광주교도소 작전에서 비교적 한가했던 우리 대대가 첨병의 임무를 받았다. 광주 중심을 피하는 외곽으로 행군로를 선정하고 출발했다. 봄나들이와 같은 따뜻한 초여름의 시골길 행군이 언제 총격을 받게 될지 모를 위험부담 때문에 긴장과 스릴의 행군이었다. 民家를 지나가게 되면 더욱 무표정하게 행동하여 당신네들과는 아무 적대감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사소한 충돌이 확대되면 또 피를 흘릴지도 모를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젊은 녀석만 봐도 섬뜩했다.
행군 전면에 아무 이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별일 없이 행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부여단장은 도로상에 폭도들이 TNT를 매설했다는 첩보가 있고, 11여단이 당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첨병에게 그와 같은 첩보를 전달했다.
11여단은 폭도들의 교활한 허위첩보 제공으로 상호 교전케 하여 대대장의 팔이 달아나고, 16대대에 같이 있다가 고등군사반 교육 후 11여단 대대 작전장교로 간 나의 부하가 즉사했다.
공군에서 보기 드문 勇將(용장)이었다.
상급부대 지시도 지시지만 공수단이 가기만 하면 폭도들의 공격목표가 되게 마련인데 우리를 흔쾌히 받아 주었다. 他軍에 비교적 배타적이라는 공군치고는 의외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식사도 장교식당에서 하게 되었고, 격납고에 바람막이를 치고 일개 대대가 몽땅 들어가니 마치 호텔에 온 듯이 포근했다.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아나운서의 안내방송과 음악이 섞여 방송되고 있었다. 격납고에서의 생활은 기약이 없었다. 이 혼란이 평정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일이 더 걸리게 될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서울에 전화연락을 해서 가족의 안부를 묻고 우리들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이 소화차량에서 내뿜는 가스에 맥주를 놓으면 순식간에 얼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어서, 폭도가 침투하는 곳에 뿌리면 폭도가 그대로 냉동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각 초소에는 실탄이 지급되어 접근하면 발포하라고 지시되어 있었다. 허약한 공군인 줄 알았더니 공수단보다 더 강력한 방어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단의 철수만으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시내에 생필품이 모자라고, 강도가 준동하여 불안하고, 젊은이들이 총기를 갖게 되어 오발사고도 많다고 들었다. 우리만의 문제 해결이 중요한 게 아니라 광주시민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 것이며, 또 이 사태가 정국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북괴의 남침 가능성, 무장간첩의 광주침투 등 불안한 요소는 수없이 많았다.
공수단이 매도되어 쫓겨와 생활하는 지금, 일등병에서부터 장군까지 모두 풀이 죽어 있는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자신에 찬 그의 표정을 보고 나는 한없는 격려를 느꼈다.
나는 그 분이 예하 각 여단이 전교사에 배속되어 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 책임 없는 제3자적 입장에서의 여유이고 자신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5월26일의 탈환작전을 강력히 주장했다는 얘기를 듣고, 책임회피나 방관자적 입장에서의 만용이 아니라, 진정 통이 크고 용기가 있으며 책임질 줄 아는 훌륭한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26일이라고 하는 날짜는 최고의 작전개시일이었다. 각 여단에 폭도들이 점거한 주요건물에 대한 탈환임무가 주어졌고, 광주의 핵심지점인 전남도청은 전투력이 가장 우수하다고 인정된 우리 여단에 부여되었다. 우리 여단에서는 11대대가 지명됐다.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였다. 우리 대대에 임무가 떨어졌다면 나는 또 선두에 섰을 것이고, 두 번씩이나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행운은 더 이상 없었을 것이다. 상황실로 들어오는 무전내용만 듣고 별일 없이 상황이 끝나기를 고대할 뿐이었다. 02시경 전남도청 가까이에 별 이상 없이 도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제 대대장이 결심하고, 대대장이 실행해서, 대대장이 책임지면 그뿐이었다. 무전할 필요도 시간도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죽은 11대대 병사는 2층에서 폭도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즉사했다고 전해 들었다.
새벽 먼동이 트기 전에 공수단은 얼른 철수하고, 일반 전투복의 20사단이 광주를 인수했다. 거리의 청소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11대대도 돌아왔다. 환영을 해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열차는 폭도가 레일 위에 가마니를 깔아서 전복시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필요 없었다. 복면을 한 시민군의 사진이 실린 신문을 보다가 접어두고 잠이 들었다. 광주 출신 병사들은 그 후 내내 괴로운 고향길이었을 게다.
상관은 상관대로 『나는 하급자에게 발포하라고 한 적이 없다』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 여론은 그것을 부하에게 떠넘기는 비열한 도피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군인을 매도하는 광주시민의 함성이 있을 때, 나를 치어죽게 하려다 달아난 지금 30이 되었을 청년은 나 같은 합리적이고 선량한 국민의 군인도 있었다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민간인을 총으로 쏠 수 있느냐고 울부짖는 사람 앞에 광주교도소에서 나를 저격한 대학생은 자신이 총을 쏘았다고 자백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광주사태의 규명이다.
피해자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보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죽음의 양으로만 하자면 교통사고로 죽는 인명이 더욱 국가가 슬퍼해야 할 양이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의 억울함과 죽음의 애절함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낮았더라면…」 하는 역사의 가정이 무의미하듯 「광주사태가 없었더라면…」 하는 가정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역사에 있었던 불행을 화해와 용서로 망각해 가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방법이다.
뒤에 숨은 뜻은 호남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면서, 겉으로 주장하는 바는 광주사태의 해결이라면 피해보상만으로 광주사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청년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어떤 보상을 바란 건 아니었다. 군인의 길이란 희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1987년) 겨울 내내 온통 신문과 잡지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더니, 금년 초부터는 또 광주사태의 책임 등으로 여론의 흐름이 軍의 잘못을 질타하고 지나갔다. 내 총상은 이미 치료되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총상만 물적 증거로 남아 있다.
물론 상관의 지시에 맹목적인 복종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내 나름대로의 시국관과 「군인으로서의 朴正熙」를 흠모했던 관계로 능동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군인으로서 떳떳하지 못한 일은 한 적이 없다. 전선에서 죽는 일은 있어도 이제 다시는 국가의 혼란에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軍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젊은 후배에게 미루고 나는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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