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5.18 진실과자료

<펌 카페 파란> 자료 2

modory 2006. 5. 20. 08:07
김재규(金載圭)  10월유신 직후인 1972년 말 군단장 시절 박대통령을 납치해 하야시킬 마음을 먹은 이후 10·26사건 전까지 3차례 시해할 계획을 세웠었다고 기록했다. ‘혁명’이라고 쓴 글에서 김씨는 “나는 1972년 10월 제3군단장으로 복무하면서....
대통령은 군단 연말시찰을 했다”며 “나는 이 기회에 대통령을 납치, 하야시킬 생각을 하고 모든 준비를 완료, 대통령을 만났으나 차마 결행할 생각이 우리들의 정리 때문에 사라졌다. 결국 못하고 말았다. 자신을 졸장부로 생각, 비웃었다”고 기록했다.
그 뒤 글에서 김씨는 “1974년 9월 14일 건설부 장관으로 사령장을 받는 자리, 청와대 접견실에서 대통령을 희생시키고 본인도 그 자리에서 자결하는 방법을 결심하고 당일 나는 권총을 몸에 품고 입장했다”며 “그러나 막상 결행하려고 하니 인정이 나를 가로막았다. 불발로 마치고 서글펐다. 자신의 못남을 뉘우쳤다”고 썼다.

김씨는 마지막 시해 계획에 대해서는 “1975년 2월 초도순시 건설부에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으며 나는 그 날도 완전한 준비를 해 놓았다”며 “또 마찬가지로 용기부족과 인정이 나를 막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단념하는 수밖에 없다고 유서와 태극기를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김씨는 자신의 중정부장 재직에 대해 “1976년 12월 4일 돌연 대통령께서 집무실로 부르셔러 갔더니 중정부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며 “그러면 이제는 순리적 방법으로 대통령을 설득하여 유신체제를 고쳐보자, 절호의 찬스다 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대통령의 의중을 탐색하는 데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는 “미련스럽게 틈만 있으면 슬슬 완화해보시도록 이야기해 보았으나 어림도 없었다”며 “누가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아 나는 이제 다 틀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혁명을 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김씨는 “1979년 4월 혁명을 결행하려고 했으나 여건이 좋지 않아 미루다가 10. 26일 드디어 결행하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金桂元실장은 盧국방과 鄭昇和육군참모총장에게 金載圭가 범인임을 통보, 장관들이 朴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고 돌아왔을 때는 金    이 체포된 뒤였다. 그런데도 崔총리는 한번도 金載圭가 범인이라는 얘기를 장관들에게 하지 않았고, 대통령이 총격으로 죽었다는 사실도 발설하지 않았다.
김계원 실장은 육본에서 걸려온 김재규의 전화를 받았다. 누가 들을까봐 조심하는 듯한 목소리로 {육본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김재규가 육본에 있다는 걸 알고는 일단 안심했어요. 위치를 알았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안심할 일이 아니었읍니다. [육군참모총장도 여기 있읍니다] [국방장관도 여기로 오고 있읍니다]하니 기가 막혔죠. 난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오라고 연락했는데! 또 조금 있다보니 국방장관이 그리고 갔고.
내가 김재규한테 [총리도 여기 계시니 오라]고 그랬죠. 그런 중에 총리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리로 갑시다]하데요}
이렇게 돼서 최총리, 김계원 실장, 박동진 외무, 구자춘 내무, 김치열 법무 등이 청와대를 출발해서 밤9시30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10.26일 당일 밤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했다」는 보고를 받았으면서도, 이 사실을 합수부 수사관이 조사하러 갈 때까지 숨겼습니다. 최대통령이 김재규 체포를 지시하고 박대통령 시해현장 바로 옆에 있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에 대한 조사를 합수부에 지시했어야 합니다. 』

최규하 총리의 김재규의 육본으로 오라는 명령에 따라 총리공관 이탈과 김계원 실장, 박동진 외무, 구자춘 내무, 김치열 법무 등과 함께 청와대를 출발해서 밤9시30분쯤 육본 벙커에 도착한 행위는 공범인가? 종범의 행위인가?



김지하 자서전에 1970년 중반 이후 모처에서 이종찬 정보부간부와 쿠데타를 모의했었다고 하였고
대통령은 김대중씨로하고 각료 3분의2는 김지하 쪽 사람으로 구성하고 3분의1은 이종찬씨 측 사람들로
구성하기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종찬씨는 일간신문에서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시인하였습니다.]
이종찬씨가 누구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의 제거는 정권의 심장부에서 절대 가까이 할수 없는 세력간에 일찍부터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국가조직의 실체는 그 중심부에서 상실되고 있었습니다.


  


金泳三 前 대통령은 언론이 알면서도 金大中씨를 봐준 예로 1980年代에 그가 全斗煥 前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쓰고 미국에 갔던 일과 韓民統 관련 사실을 들었다.
金大中씨는 全斗煥에게 살려달라는 각서를 쓰고 미국에 간 것 아닙니까. 全斗煥 정권은 1980年代 초반에 의도적으로 야당과 재야, 학생 지도자들을 돈을 주어 해외로 내보냈는데, 그것이 민주화 운동에 남긴 폐해는 정말 극심했습니다. 특히 金大中씨의 행동은 민주화에 큰 타격이 되었지요. 그랬기 때문에 그는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내가 설득하고 설득해서 귀국했는데, 우리 언론에서는 그의 그러한 행적을 드러내놓고 문제삼지 않았어요. 민주화를 위해서 덮어준 셈이지요. 金大中씨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습니다. 그러니 1923년생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1925년생이라고 한다면서요? 朴正熙가 그를 일본에서 납치하기 전에 金大中씨는 韓民統 멤버들과 손잡았는데 그들이 누굽니까.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 아니었습니까. 언론이 이런 사실을 눈감아주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것인데 그 언론을 상대로 보복을 하고 있으니…』
金泳三 前 대통령은 『朴正熙가 납치했기 때문에 金大中씨가 산 것이다. 내버려두었으면 아마도 金日成한테 이용만 당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우리는 일본에 가면 민단사람들만 만났지 조총련사람들 하고는 만나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들과 만나면 오해를 받는데 왜 만나요. 그런데 金大中씨는 그들과 합작을 했으니 참 위험한 짓을 했던 거죠』


[ 이미 알려 진 사실이지만, 최근 일본 사점가 등에선 노 무현의 좌익성- 김 대중의 북한 공작금 수령 등 사실들이 폭로되고 있어 주목.
본사가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73년 8월 3일 당시 이 후락 정보부장의 지시에 따라 김 대중을 일본에서 납치하기 전, 동년 4월 김 일성은 일본에서 온  한 우스노미야  도쿠마 현 정치인에게 "김 대중에게 전달해 달라"는 문서(돈 봉투. 2억 달러 ? 20만 달러 ? 본사는 20만 달러로 추정한다)를 전달했다는 것.  
그 후, 김 대중은 일본 조총련, 정치인들로 부터 수시로 공작금을 수령한 것으로 파악되었고(권 영해 안기부장 재임 때도 이 같은 사실 등 4개 범죄사실을 확인했으나 대선으로 인해 권 영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권 영해가 당했다) 김 대중 재임 전 김 일성- 김 정일로 부터 상당한 공작금 수령과 북한 공작원들을 만났던 것으로 파악.
특히 지난 해 9월 일본에서 발간된 한 책자에선 [김 대중은 북한 공산 핵심당원들과 접촉했으며, 대한민국에 대해 한 조각의 애정도 없는 인물]이라는 평이 쏟아져 있으며, 황 장엽 씨 까지 "김 대중은 김 일성 등으로 부터 공작금을 받고 있었다"고 폭로한 사실이 있었다.
한편 1968년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들이 김 대중과 접촉, 당시 김 대중의 국회의원 선거 지원을 했으며, 김 대중의 당선 후 북한 남파 간첩들은 북한으로 복귀, 국가영웅 칭호를 받았고, 1971년 2월 김 대중은 일본에서 조총련 국제국장 김 병식으로 부터도 20만 달러를 별도로 수령한 바 있고.....

그는 망명생활을 하며 1972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바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스노미야 의원 등 일본 국회
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 단체로 규정된 "한민통"을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등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金大中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0·26이 없었다면 10월29일엔 광주에서 터지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렇게 되면 일사천리로 북상했을 겁니다. 김재규(金載圭)는 그 민중운동의 맥을 끊어 놓았읍니다. 그런 방법으로 민주화는 절대 안됩니다』고 말했다.

金大中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이말은 광주사태는 이미 1979년 10.29일에 에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광주사태와 전두환 대통령과는 무관한 예정된 진행과정인 것입니다.
또한 이종찬 정보부 간부와 김지하간의 쿠데타 밀약과의 관련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난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북한 공수부대 등 특수요원(태천군관 학교. 황해도 소재) 2개 대대 병력 2천 명이 남파, 광주사태를 주도했다는 첩보가 조금 전 미국 LA에서 한 탈북자로 부터 미주통일신문이 입수.(수정 : 당시 태천군관학교 병력이 아니고 61, 62 저격여단 공수부대 요원과 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수요원들이었음으로 고침. 당시 대대장은 이 봉원. 그 후 태천군관학교 소장으로 승진)
13일 밤 제보자 탈북자는 북한 특수부대 요원으로써 중국을 거쳐 최근 미국에 들어 왔는데 평소 미주통일신문 기사를 읽고 본지에 제보.
그는 {광주사태 때 전쟁이 날 뻔 했다. 김 일성의 지시로 남침을 준비 중이었는데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대기했었다. 당시 우리는  "광주에서 부르면"즉시 전쟁을 할려고 했었다. 그러나 당시 약 1천 여명의 침투조가 사살 당하자  김 일성의 지시에 따라 1개 대대는 월북했다. 당시 남파 루트는 자기 집 안방 드나들듯 할 수 있어 남파는 간단했다. 당시 침투조는 거의가 공수부대에서 게릴라 전을 훈련받은 자들이었고 당시 광주에서 탱크를 탈취, 운전한 자들은 북한 군이었다..}고 부연.]

광주사태에 북한의 특수8군단의 정예공작부대가 참전 개입하였다는것은 한국사람만 빼고는 "상식"입니다.  그들이 광주왔다가 공작하고 올라가 문책을 받았지요.  왜 광주사태를 대전 서울로 "혁명을 확대못했는가"라고.
전문가의 입장에서 통탄하고 우둔한 백성이라고 봅니다.   또 이글에대하여 금방 반박하겠지요.  하세요.  그러나 "진리"는 하나입니다.   탈북자들가운데는 광주에 참전한 북한인민군 출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0.26이 발생한 때에는 군의 상당한 부분이 이미 좌익에 의해 포섶된 상태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국군도 좌익이 지휘했습니다. 6.25 직전 1-2주 전에 모든 부대를 재배치했습니다. 동에 있던 부대가 서로 가고, 후방부대가 전방으로 갔습니다. 지휘관 모두에 대한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6.25때에는 부하가 누구인지 상관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지형도 낯설었습니다. 6.24일 0시를 기해 50%의 병사에게 휴가를 주었습니다. 6.25일 밤에 모든 지휘관들을 육군회관으로 불러 댄스파티를 열어주며 술을 마시게 했습니다. 새벽 4시 남침 정보를 보고하자 참모총장 부관이 이를 묵살했습니다. 인민군이 서울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단 하나 있던 한강다리를 폭파했고, 입을 막기 위해 폭파명령을 수행한 공병 최대령을 비공개로 사형했습니다. 이게 좌익들입니다.


광주사태에 대해서도 「나는 지휘계통 선상에 있지 않았다」

1989년  11월12일 문안에서는   광주사태에 대해서도 「나는 지휘계통 선상에 있지 않았다」는 해명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1월 15일 저녁 全-盧 전화통화 이후에 全 전 대통령은 마음을 정리하고 『청와대쪽의 요구를 전부 받아 주어라. 盧대통령을 위해서, 그리고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내가 처참하게 당해야 한다면 당하지』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全 전 대통령은 해명을 포기한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시국관 때문이었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 -정치자금 등에 관한 사항이 소상히 공개되면 盧대통령뿐 아니라 양 金 씨도 위태해져 정국에 일대 돌풍이 불게 된다. 기성정치인의 힘이 약화되고, 재야·학생의 영향력이 커지면 사회혼란이 가중된다. 그러면 군대가 정권장악이 아닌 국체보존의 차원에서 개입할 우려가 있고 광주의 비극보다 몇배의 참극이 벌어질 수 있다.




위의 단편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추정해 볼때 10.26이 발생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신 그당시..
우리의 국가존체는 붕괴된 상황입니다.

우리들은 전두환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쉬운 역사심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 그많은 책임을 한 자연인에게 뒤집어 쉬울 수 있습니까?
거짓이 진실인양 활게치는 세상이 얼마나 더 지속되어야만 합니까?
어린 후대가 거짓을 진실인양 알고 행할 그 많은 잘못을 생각해 보십니까?

왜 지금의 정치위기와 경제위기가 발생 헀습니까?
국가체계의 붕괴를 획책한 자들을  민주주의자라고 착각한 그당대 세대들의 무지와 오류에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의 찬탈자이고 ...
독재자이고 살인마 이라는 ....
우리들의 무지와 오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이 지혜와 용기와 노력과 희생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서 깨달아서야만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께서는 우리들의 무지와 오류에 의해
퇴임후에도 너무나 많은 비난과 희생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찬 민주주의를 사칭하는 자들은 더이상 없어져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