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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ory 2006. 5. 20. 08:04
파시스트 조갑제의 악랄한 '5.18 역사왜곡'
[프레시안 2005.02.28 10:18:03]
[박태견/기자]조갑제 <월간조선> 대표가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군인의 절반이상은 전라도 출신이었으며, 공수부대의 광주시민 학살이 시민들의 돌팔매에 공수부대원들이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발발했다고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주장을 펴, 역시 <월간조선>의 대표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월간조선>은 80년 5.18직후 광주시민을 "폭도"라고 매도한 이래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군인들이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몽둥이 진압"
  
  조갑제 대표는 주말인 26일 오후 조선일보 광화문빌딩 9층 강당에서 <월간조선>사 주최로 행한 '조갑제의 현대사 토요강좌 - 10•26 사건의 후폭풍, 12•12에서 5•18까지'이란 제목의 강연에서 이같이 주장했다고 <월간조선> 김경수 기자가 취재기 형식으로 보도했다. 이 글은 <월간조선> 홈페이지 및 조 대표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조 대표는 이날 강연에서 지난 사반세기 동안의 각고의 노력끝에 진상이 밝혀지고 국회 광주청문회 등에서도 역사적 실체가 규명된 5.18의 진실을 악의적으로 곳곳에서 왜곡했다.
  
  그는 우선 5.18 시민학살의 원인을 시민쪽으로 돌렸다.
  
  그는 "5월18일 광주 학생 소요 사태에 공수 7여단이 진압을 시도했다. 사격 명령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들 군인들은 시위 진압 경험이 전혀 없었다. 방패도 없었다. 날아오는 돌덩이에 속수무책이었다"며 "젊은 군인들은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대낮에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고 이를 본 시민들은 흥분했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광주학살이 사격명령을 받지 않았고 시위진압 경험이 전무하며 방패도 없었던 공수부대원들이 '내가 시민들이 돌맹이를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발발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5.18 기념재단이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역사적 진실은 조갑제의 주장과 180도 다르다.
  
  5.18 기념재단의 공식기록인 '5.18광주민중항쟁 전개과정'을 보면, 1980년 5월18일과 19일의 충돌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8일 오전 10시 등교하던 1백여명의 학생들에게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5월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당시 전라도 출신 군인들이 반 이상이었다"
  
  조갑제는 또 이날 강연에서 석가탄신일이던 5월21일 공수부대의 금남로에서의 발포에 따른 대응으로 시민들이 무장하는 과정도 철저히 왜곡하고 있다.
  
  조 대표는 "시민들은 급기야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 총으로 무장한다. 군인과 시민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며,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약 먹고, 술 마시고 진압했다', '2000명 넘는 시민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북한 공작원의 선동이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등의 소문은 모두 거짓말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민간인 200여명과 계엄군 23명이 사망했다. 전투 경험이 없는 양쪽 모두 같은 편을 사살하기도 했다"며, 급기야는 "당시 전라도 출신 군인들이 반 이상이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조갑제의 이같은 주장은 한마디로 역사를 어떻게 은폐, 왜곡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압권적 사례라 하겠다.
  
  그는 우선 시민들의 무장과정과 관련, "시민들은 급기야 예비군 무기고를 탈취, 총으로 무장한다. 군인과 시민 간의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만 보면 시민들이 먼저 무장을 했기에 불가피하게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식이다.
  
  그러나 '5.18광주민중항쟁 전개과정'을 보면, 5월21일 공수부대의 첫 발포와 이에 따른 시민의 무장과정 및 조갑제의 '모두 거짓말'이라고 주장한 당시 진압과정은 그의 주장과 다르다.
  
  "5월20일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밖에 5.18현장에 있었던 많은 증인들은 진압군의 입에서 술냄새가 났다는 등의 증언을 하고 있다. 또한 조갑제가 거짓말이라도 지적한 '북한 공작원의 선동이었다'는 말은 시민들이 한 말이 아니고,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발표한 내용이었다. 또한 '2천명의 시민을 총으로 쏘아죽였다'는 당시 소문은 훗날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는 공수부대의 사격으로 수많은 시민이 사상을 입는 과정에 정확한 피해가 파악되지 않은 까닭에 나돈 소문이었으며,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는 소문도 출산을 하러 병원에 가던 임산부 부부를 공수부대가 폭행하는 과정에 나돈 소문이었다. 비록 과장되기는 했으나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소문이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전라도 출신 군인들이 반 이상이었다"는 조갑제 주장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지역주의 발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지역별 인구비례상 전라도 출신이 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 따라서 조갑제 주장대로 한다면, 신군부가 공수부대 등 진압군을 차출할 때 각 부대에서 전라도 출신들만 특별히 골라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군의 어떤 기록이나 진압에 참여했던 군인들의 증언에도 이런 대목은 없다. 도리어 당시 진압군 지도부가 전라도 출신 군인들을 동원하는 데 대한 우려를 한 대목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따라서 조갑제의 이같은 주장은 악의적인 지역주의 망언인 동시에, 영남 출신인 조갑제 자신의 '역사적 컴플렉스'의 산물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낳는 대목이다.
  
  "5.18은 반공민주화운동"
  
  조갑제의 역사왜곡의 극치는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한 대목이다.
  
  "나는 5ㆍ18 때 현장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그는 "김대중 지지 구호는 거의 없었고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를 많이 들었다. 5ㆍ18은 반공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시 광주시민들은 집회등에서 "김일성은 오판말라"는 구호를 많이 외쳤다. 그러나 이는 조갑제 주장대로 '반공의식'이 투철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조선일보 등 온갖 매스컴을 동원해 "북한 공작원이 광주사태를 배후조종하고 있다" "현장에서 북한 공작원을 체포했다" "광주사태가 계속되면 김일성이 쳐내려올 것"이라는 흑색선전을 해왔기 때문이다.
  
  요컨대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왜곡에 대응해 "김일성은 오판말라"고 주장한 것이었지, 5.18항쟁이 조갑제 주장대로 '반공민주화운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조갑제가 왜 이같은 황당한 주장을 했는가는 그 다음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광주민주화운동은 이후 학생운동 좌경화와 반미화의 계기가 된다. 젊은 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확대 해석한다. 미군이 진압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한 것을 두고 반미 감정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반미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5.18항쟁을 '젊은 학생'들이 반미운동으로 악의적으로 왜곡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자신의 철저한 친미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갑제에게는 역사 왜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두환은 죄의식으로 인해 더 열심히 일했다"
  
  조갑제의 파시즘적 역사의식은 광주학살을 범한 전두환 신군부를 합리화하는 것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12•12와 5•17에 이르는 사건들을 볼 때 '누가 악인이다'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역사를 꼭 도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한국인이 권력을 보는 시각에는 잘못된 점이 있다. 반드시 선한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은 아니다. 선한 사람이 권력을 잡는다는 인식은 '군주는 선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에서 비롯된 환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가장 부지런한 사람, 가장 강한 사람, 어쩌면 가장 무자비한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이 현실"이라며 "권력은 선한 존재라야 한다는 국민들 인식 속에서 정치인들은 위선적으로 변하게 된다. 정치에서 도덕을 제외할 때 정치는 더 도덕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마키아벨리적 '군주론'을 편 그는 이어 전두환 신군부에 대해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집권한 전두환은 12•12에서 비롯된 죄의식으로 인해 더 열심히 일했다"며 "물가 안정 정책으로 위기의 경제를 살려냈고, 마이너스 성장률에서 시작해 1980년대 평균 경제성장률 10.5%라는 세계 1위의 경이적인 기록을 남겼다. 1987년 6•29 선언은 이러한 경제적 풍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전두환을 적극적으로 합리화했다.
  
  조갑제의 이같은 주장은 그의 역사관이 파시즘의 근간을 이루는 마키아벨리적 군주론에 입각해 있는 동시에, 그가 전두환 신군부가 통치하던 80년대 <월간조선>에 입사해 쿠데타를 꿈꾸던 김진영 수방사령관 등 군부내 극우세력과 결합하면서 승승장구한 대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조갑제의 이번 망언은 단순한 망언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 정통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거센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게 확실하다.
  
  5.18기념재단의 '5.18광주민중항쟁 전개과정'
  
  다음은 5.18 기념재단이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5.18광주민중항쟁 전개과정'이다.
  
  계엄군의 주요이동 상황
  
  최초 충돌, 전남대 정문 앞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최초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교문 안에 있던 공수부대는 메가폰을 통해 두어 차례 해산을 종용한 후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을 향해 돌진해 왔다. 5·18민중항쟁의 최초 충돌이자 과잉진압의 시작이었다. 공수부대는 달아나는 학생들을 잡기 위해 인근 주택을 뒤지기도 하고 이를 저지하는 시민들까지 구타하였다. 이런 공수부대의 포악한 진압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것이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시민의 분노와 저항, 금남로
  
  5월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졌던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학생들이 시내에서 가두시위를 하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무력 진압행위를 만류하는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에게도 무차별 곤봉세례를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진상을 알기 위해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19일 오전 2∼3천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게 되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한 지 30분 정도 지나서 11공수여단 천여명이 트럭 30여대로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작전명 "화려한 휴가"라는 말 그대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만행을 목격하고 전해들은 광주시민들은 맨주먹 또는 몽둥이, 각목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하였다.
  
  항쟁의 확대와 첫 발포
  
  5월 20일 항쟁 3일째,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그 승리의 절정을 향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잔학한 만행
  
  공수부대에 의해 최초로 희생된 김경철은 공용터미널에 다녀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붙들려 무수하게 구타를 당한 채 트럭에 실려 후송되었으나 다음날 사망했다. 김경철은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는 농아였다. 이는 수백명의 사망자, 부상자 중의 한 예에 불과하다. 여성들에 대한 성추행도 무수히 저질러졌다.
  
  시민들 앞에서 어린 여학생들의 옷을 찢고 발가벗기는 만행을 보고 격분한 장노년층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공수부대를 몰아내자는 결사적 항쟁의지로 발전했다. 신군부의 만행은 전남대 교내에서도 학생들에게 사격을 가하여 시신을 암매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 연행되어 온 시민들을 교도소 안에서 구타, 사망케 하여 암매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계엄군의 만행은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계엄군의 퇴각과 양민학살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하여 사격을 하였다.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들 수십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이때부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고 서둘러 무장하기 시작했다.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퇴각하면서 무차별 발포하여 사상자를 내고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설치한 기관총(LMG)의 위력은 계엄군의 퇴각을 서두르게 하였다. 전남대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교도소로 퇴각했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또한 송암동으로 이동하던 계엄군과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전교사 병력간의 오인사격으로 군인들이 희생되자 그에 대한 화풀이로 원재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중학생에게 총질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청년들을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무장시민군의 등장
  
  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광주의 참상을 알렸다. 전남의 여러 지역에서 응원 시위부대가 왔다. 광주시위의 진압에 동원되어 텅 빈 지서, 경찰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M1소총, 카빈소총, 기관총과 탄약, 화순광업소의 TNT까지도 날라져왔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제 싸움은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으로 전개되었다. 최신식 무기의 정예부대와 비조직적이고 낡은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광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다.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전개된 시민군과 계엄군과의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되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었고 일반차량을 통제하는 등 시민군의 활약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
  
  시민공동체의 발현
  
  항쟁 5일째 되는 22일,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어지러운 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등 질서를 회복해가기 시작했다. 시장과 상점들도 문을 열고 전기, 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의 지원으로 해결되었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랐고 황금동 아가씨들까지 자청하여 제공했다.
  치안력이 없는 상황에서도 은행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한 건도 없었고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도 별다른 사고가 없었다.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차량통행증, 유류발급증, 상황실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 자체방위를 맡은 시민군과 유대를 갖고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수습책위원회의 구성과 역할
  
  5월 22일 거센 시민의 항쟁에 밀려 계엄군이 일시 퇴각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엄청난 사태 앞에서 쌍방 모두 슬기로운 수습이 요망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5·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조직은 명망가이자 민주인사로 알려진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고 선봉에 선 학생들 중심의『학생수습대책위원회』와 종래의 명망가 중심의『일반수습대책위원회』도 출범하였다. 민주인사나 유지급 중심으로 구성된 수습위에서는 주로 계엄당국과의 대화나 건의, 협의 등을 맡았고 학생중심의 수습위에선 대민 업무를 맡아보았다. 그들은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의료반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또한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300여정의 무기를 회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무성의와 그들의 각본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무기회수문제도 수습대책위원회의 의견 불일치로 결국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항쟁지도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민중항쟁의 확산
  
  5월 18일에 발발한 민중항쟁의 소식은 언론보도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전남일원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8일 오후와 19일에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행해진 무자비한 계엄군의 살상행위는 시외버스 승객들에 의해 퍼져나갔다. 또 시위대중 일부가 아시아 자동차공장의 차고에서 차량을 대거 획득 운행하면서 도내 각 지역에 직접 알리고 응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의 항쟁은 전남일원의 호응 속에 각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5월 21일의 집단발포 소식은 전남도민의 의분을 사기에 충분했고 이에 화순 나주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일원으로 확산되었다. 시위대는 전남뿐만 아니라 전북 등 전국적인 진출을 시도했으나 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계엄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광주는 목마르게 응원군을 기다렸지만 전남 이외의 지역과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시민군의 결사항쟁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하였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했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가운데 마지막 선택이 요청되었다.
  항복이냐, 죽음이냐, 민중항쟁의 결전에 서서 전열을 가다듬으며 홍보부에서는 계엄군의 침공사실을 가두방송으로 알렸다. 27일 새벽 4시, 도청 주변에서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왔고 도청탈환을 향한 계엄군의 기관총 소리는 밤하늘을 찢는 듯 했다. 구식 무기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지도부는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갔다. 진압 끝! 그리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신군부의 무력진압
  
  수습위의 건의사항도 묵살되고 대화도 평화적인 해결도 거부당한 채폭동을 일으킨 총기소지의 폭도로 지목된 시민군들은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생존자는 모두 체포되어 군부대로 끌려갔던 5월 27일 새벽, 공수부대원들은 시체더미 위에서 승리가를 합창하며 충정작전을 끝냈다.
  
  도청탈환을 목표로 조직된 특공대는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로 조선대학교 뒷산에서 최종점검을 마친 뒤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잠입,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 시 외곽에서도 시내 중심가를 포위한 채 시민군을 압박해오고 있었다. 전화선은 모두 끊겼고 탱크 지나가는 소리만 금남로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되었다. YMCA, 계림초등학교도 총검과 군화발 아래 유린되었다.작전개시 1시간 30분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렸다.
  
  연행 구금과정과 잔학상
  
  5·17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와 함께 이루어진 예비검속으로부터 항쟁기간과 그 이후에 연행된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연행, 구속된 사람의 숫자는 수천을 헤아린다. 광주의 전지역을 쑥밭으로 만들고 초토화시킨 토벌작전 그대로였다. 항쟁기간 중 난데없이 들이닥친 계엄군은 집, 사무실, 학원, 도서관, 식당, 시위주변의 길거리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을 총 개머리판과 곤봉 등으로 구타하여 트럭에 실어 교도소나 상무대로 연행하였다. 심지어 팬티바람으로 줄줄이 묶어 폭도취급을 하였다. 전남대나 광주역 부근에서 붙잡힌 사람들은 전남대 본관과 이학부 건물에 수용했다가 21일 3공수여단이 교도소로 철수할 때 함께 이송되었다. 또한 상무대로 끌려간 사람들은 상무대 안의 교회와 연병장의 임시막사에 수용되었다. 굶주림과 구타, 비좁은 공간에 몇 백명씩 공동 수감되는 등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날의 참상을 두고 사람들은 "나는 그때 인간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죽음과 삶의 갈림길
  
  상무대로 붙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짜여진 각본에 맞춰 내란음모 선동 등의 죄명으로 수사를 받았다. 특히 신군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한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으로부터 폭동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후에도 오랜 시일동안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 등 그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풀려난 후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왔다.
  
  김대중 내란 음모조작
  
  이 사건은 5·18민중항쟁의 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기 위해 신군부 세력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공수부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5월 21일 저녁, 신군부 세력은 TV를 통해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였다. 당시 신군부 세력은 "광주사태는 간첩 김대중으로부터 사주를 받은 광주지역 불순분자들이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선동하여 일으킨 내란 폭동이며 김대중으로부터 거사자금을 받은 정동년이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켜 학원소요사태를 민중봉기로 유도 발전시켰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동년은 광주상황이 발발하기 전인 5월 17일 저녁에 예비 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5·18민중항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반란을 통한 정권장악을 목적으로 김대중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김대중의 지지 기반이었던 호남인들의 반발을 회피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건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5.18 광주민중항쟁과 미국의 역할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 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신군부는 5월 20일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연합사에 부대이동을 문의하자 위컴은 미국정부와 협의한 후 동의(agreed)함으로써 작전통제권을 이양하였다.한편 5월 22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또 미행정부는 "광주사태가 더 악화될 경우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고 일반국민에게 광주민중항쟁을 부정적으로 부각시켜 신군부를 두둔했고 무력진압을 합법화시켰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은 민주주의나 양민보호보다 미국의 이익을 위한 체제 옹호적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박태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