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의 역주행 5년 ◆
★한국 "우리가 꼬붕도 아닌데" 미국 "한국은 도망가는 동맹" ★
2005년 9월10일 워싱턴.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 간 정상회담이 예정된 날이었다. 백악관의 한 관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정상회담 7시간 전인 새벽 4시30분. 4시간 전에 한국에서 50대 여성이 주한미군 트럭에 치여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미 국방부 측의 긴급 연락이었다. 오전 6시30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실에는 국방부에서 보낸 관련 자료가 도착해 있었다. 정상회담 준비팀은 부시 대통령이 정상회담에서 공식적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3년 전 반미 감정을 촉발시켰던 효순·미선양 사고의 악몽 때문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오전 11시 백악관에 들어서는 노 대통령에게 인사를 건네자마자 이 사건에 대한 조의를 표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노 대통령 일행이었다. 사고가 났다는 소식이야 알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미국, 노대통령을 ‘깨지기 쉬운 유리잔’ 간주
이는 미 행정부가 노무현 대통령 5년 재임 동안 한·미관계를 얼마나 예민하게 다뤘는지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반미면 어때?"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당선자 시절인 2003년 2월 정대철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대미 특사단에게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내용의 TV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보고 가라"고 한 일도 있었다. 2005년 4월 터키에서 "상당히 유식한 한국 국민이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얘기하는 게 제일 걱정스럽고 힘들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 11월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일리 있다"는 'LA발언'은 미 조야에 큰 충격을 던졌다.
미 행정부는 이런 노 대통령을 '깨지기 쉬운 유리잔'처럼 생각했다는 것이 미 관리들의 얘기다.
- ▲ 2005년 6월1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후 웃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두 대통령은 겉으로는 웃었으나 회담에서는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DB
노 대통령은 5년 내내 미국과 덜컹거렸다. 그중에서도 2006년은 한·미관계가 벼랑 끝으로 달려간 한 해였다. 한국은 미국의 북한 정책을 공공연하게 '고립압살정책'이라고 부르면서 정책 전환을 압박했고, 미국은 북한 압박에 미온적인 한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터뜨렸다.
2006년 5월11일 카스피해 연안 국가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노무현 대통령을 수행해 이곳을 방문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그는 북핵 6자 회담의 장기 교착상황과 관련 "미국에 우리의 운명을 맡겨둘 수는 없다"면서 "미국은 솔루션이 아니라 슬로건 아니냐"고 했다.
이 얘기는 노 대통령이 5월9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나는 북한에 대해 완전히 열어놓고 있다.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고 말한 것을 설명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었다.
솔루션(Solution)은 해법이고 슬로건(Slogan)은 구호다. 부시 행정부가 북핵 해법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북한을 밀어붙이기만 한다는 뜻이었다. 미 행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된 적은 한·미 외교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청와대 관계자는 최근 "미국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판단을 한 상황이었다"면서 "'솔루션'과 '슬로건' 발언은 그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었고 노 대통령의 발언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문제를 풀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은 청와대의 '기대'를 저버리고 7월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한다.
그 직후 이번엔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나섰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미사일 발사로 미국이 가장 많은 실패를 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국회에서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노 대통령은 "한국 장관은 미국이 실패했다는 말도 못하냐"고 거들었다.
충돌은 노 대통령과 미 라이스 국무장관 사이에도 있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직후인 2006년 10월20일 라이스 장관은 한국을 방문한 길에 노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는 게 정부 고위관계자의 얘기다. 노 대통령은 라이스 장관 면전에서 '(한·미) 동맹 현안을 모두 해결했는데 이게 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부시 행정부가 대북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아 북한이 핵실험을 하는 사태까지 왔다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 관계자는 "라이스 장관이 충격을 받고 돌아갔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전날 송민순 안보실장이 한 강연에서 "미국은 전쟁을 가장 많이 한 나라"라고 말한 것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럼즈펠드 국방방관이 "미국이 치른 전쟁에는 3만명의 젊은이가 희생된 한국전쟁도 포함돼 있다"고 공박할 정도로 미 행정부에 던진 파장은 컸다. 노 대통령은 송 실장을 11월3일 외교부장관으로 임명했다.
2006년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기 직전에도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비공식 자리에서 사태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동안의 경위를 봐라. 클린턴 대통령 때는 아무 일 없다가 부시 행정부 들어서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했다.
백악관의 한 관리는 "노 대통령은 정상회담 석상에서도 선을 넘나드는 얘기를 많이 했다"면서 "두 대통령이 싸우고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뒤처리하느라 혼이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 ▲ 2006년 9월 정상회담 직후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실린 삽화(데이비드 사이먼스 작)다.‘ 어색한 동거인’이라는 제목이 달렸다. /조선일보 DB
비슷한 시기 한국을 잘 아는 미국 인사들이 한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대사는 2005년 7월 "한국은 도망가는 동맹"이라고 했다. 미 기업연구소(AEI)가 발간하는 'The American Enterprise'에는 "미국과 한국은 이제 우호적 이혼을 할 시점이 됐다" "노무현 정부는 한국 역사상 가장 반미감정이 강한 정권"이라는 글까지 실렸다. 미 NSC 인사가 "한국은 나이브하기 짝이 없다. 전략도 전술도 없다. 많이만 주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정보를 주미대사관이 청와대에 보고한 일도 있었다.
이런 갈등은 2006년 11월 북한의 핵실험 후의 대응에서도 공공연히 표출됐다. 비단 PSI 참여를 둘러싼 이견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 정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의 전면중단을 요구했고 한국 측이 거부하자 마지노선으로 금강산관광 중단을 요구했다.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이종석 당시 통일부장관에게 직접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그러나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사일 발사 후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을 비롯해 북한 측에 지원을 중단한 물자가 3억5000만달러에 이른다는 자료를 만들어 미 정부에 보냈다.
한·미 갈등은 북핵 문제에 대한 이견 차이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었다. 동맹 재조정 현안들 및 이라크 파병 문제 등 한·미간 주요 현안 마다 부딪쳤다.
첫 파열음은 이라크 파병 과정에서 나왔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보름 남짓 만인 2003년 3월13일 부시 미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통해 공병(서희)·의료(제마)부대를 이라크에 파병하겠다는 결정을 전했다.
노 대통령은 2월말 파병 요청을 받은 직후 이미 파병을 마음속으로 결정해 놓고 있었다. 북핵 문제는 물론 무디스 등 신용평가기관의 국가 신용등급 하향 조정 움직임 등 경제위기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러나 마음을 숨긴 채 내부 토론에 부쳤다. 반대론을 지렛대로 파병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청와대 비서실과 NSC 사무처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미국을 자극할 만한 얘기가 나왔다. 한 수석급 인사가 "우리가 미국의 꼬붕도 아닌데…"라고 사석에서 말한 게 언론에 보도됐다. 다른 인사가 "왜 부당한 전쟁에 파병하느냐. 우리 군인들이 인간 방패냐"고 말한 사실이 또 파다하게 퍼졌다.
# 자주노선 추종한 관료들만 승승장구
민간인이 아닌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 행정부는 극도의 불쾌감을 표시했다는 것이 당시 외교관계자들의 얘기다. 결국 외교부·국방부 라인과 청와대의 반기문 외교·김희상 국방보좌관 등이 강력하게 파병을 주장하면서 결국 파병 쪽으로 결정났지만 상처가 작지 않았다. 반기문 보좌관(현 UN 사무총장)은 당시 비공식 자리에서 "파병을 안 했더라면 5월 방미 정상회담도 어려웠을지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다른 관계자는 "당시 미국은 파병을 동맹의 가늠자로 보는 분위기였다"고 했다.
파병을 둘러싼 갈등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9월초 미국 측이 추가파병을 요청하면서 또 갈등이 격화됐다. 노 대통령이 추가파병과 북핵 해결을 연계시키겠다는 뜻을 정한 때문이었다. 정부 내에서는 은밀하지만 강렬한 갈등이 발생했다. 윤영관 장관을 비롯한 외교부 라인은 강한 반대 입장이었다. "연계하는 것은 동맹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굳이 연계하지 않더라도 나중에 결과로서 얻으면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과 NSC 사무처 팀은 연계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대로 결정됐다.
9월25일 워싱턴을 방문한 윤 장관은 노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파월 미 국무장관에게 '북핵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해달라'는 취지의 얘기를 했다. 파월 장관은 불쾌감을 강하게 표명했고, 뉴욕타임스가 이 사건을 일부 보도하면서 한·미 동맹 파열의 상징적 사건이 됐다. 이후 노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고받고 연계 요구를 포기했다.
이외에도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 주한미군 감축 협상 과정에서도 사사건건 충돌했다.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 비용 협상과 관련해 한국 정부는 이라크 파병 비용을 한국 측이 대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독일·일본의 경우와 다른 기준을 요구했다. 또 미 측의 요구 조건이 계속 유출되자 8군 사령관이 직접 나서 반박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동맹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은 우리 정부 내에서도 터졌다. 2003년 이라크 파병을 북핵과 연계할 것이냐, 파병을 한다면 규모를 어느 정도로 할 것이냐를 놓고 대립했던 NSC와 외교부는 2004년 1월 초 정면 충돌했다. 조현동 당시 외교부 북미3과장(현 인도대사관 참사관)이 술자리에서 노 대통령에 대해 '반미적'이라고 말한 사실을 부하 직원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투서한 게 발단이었다. 투서한 사람은 북미3과의 K외무관이었다. 투서 내용에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NSC에 자리잡은 386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한미관계를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 K 외무관은 평소 한국 외교가 지나치게 종미(從美)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부하가 상사를 밀고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결국 민정수석실이 대대적 조사를 벌인 끝에 장관·차관·북미국장·북미3과장이 한꺼번에 옷을 벗거나 징계를 당했다.
당시 청와대 정찬용 인사수석은 윤영관 장관 경질 사유에 대해 "자주적 외교정책의 기본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고, 윤 장관은 이임식에서 이를 받아 "자주외교의 대전제는 국제정치의 흐름을 꿰뚫어 알고 그 안에서 자율 영역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후 대미 외교 라인에 있던 관료들은 아예 입을 닫았다. '자주 노선'에 추종하는 사람들만 남았고 이들이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깨질 듯 위태롭기만 하던 한·미관계는 2006년 하반기 미국이 이라크에서의 외교실정을 만회하기 위해 대북 정책 노선을 바꾸고, 한국도 한·미FTA를 통해 '경제동맹' 수준으로 나아가면서 파국은 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