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미주알고주알

[스크랩] 돈 그리고 법정스님의 무소유

modory 2010. 3. 20. 08:53
돈은 필요 없는 것이며, 정말 무소유를 주창했던 법정스님의 생각이 맞는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 두 아이템을 스크랩을 해놓았다. 옳고 그름. 나쁘고 좋고의 개념이 아닌 이런 생각 저런 생각도 있다는 판단에서 스크랩 해놓았다.
 

법정스님은 정말로 무소유였나?◈

2010-03-16 지만원
법정스님이 돌아가셨다. 그의 영혼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의 이름은 구름 위로 승천하여 찬란한 존재가 됐다. 
무소유라는 언어를 창조해 아름다운 글 솜씨로 
주로 여인들을 감동시키는 서정시를 썼기 때문인 것으로 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얽매임에서  해방되고 훨훨 날듯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무소유 이론인 모양이다. 
 필자는 ‘움켜쥐고 있는 끈들을 놓으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 것으로 알며 살아왔다. 
골동품을 집안 가득 채운 부자는 행여 식모가 깨트릴까 
도둑을 맞을까 걱정하여 집을 나가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골동품의 노예가 된 것이다. 
예쁜 강아지나 예쁜 화초를 소유하고 있으면 
집을 오래 비울 수가 없게 되고 많은 자유가 구속된다. 
여기까지는 무소유 이론이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무소유(無所有)이고 어디까지가 유소유(有所有)인가?   
강아지와 골동품과 화초는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집을 버리면 잘 곳이 없다. 
무소유가 정말로 무소유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선동적(煽動的)인 언어(言語)의 
유희(遊戱)일 뿐이다. 
번거로운 것들을 버리면 자유로워진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향유(享有)해서 얻는 ‘기쁨과 행복’도 ‘자유로부터 
얻는 행복’에 못지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면 자유 공간이 줄어든다. 그러나 결혼은 행복도 주고 시너지도 준다. 
무소유도 행복을 주겠지만, 유소유(有所有)도 행복을 주는 것이다. 
다만 그 소유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병적인 개념으로 치닫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법정 스님은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신경 쓰는 것이 
번거로울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지 않고 시간이 남는 사람들에게는 취미생활活이라는 것도 있다. 
취미생활活을 하려면 무소유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필자가 좋아하는 황야의 무법자도 외견상(外見上) 무소유자(無所有者)다. 
하지만 그는 어디를 가도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무소유자인가? 그에게는 당대의 최고 수준으로 총을 잘 쏘는 
능력이 있었다. 
그 능력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한, 그리고 그런 능력을 필요로 하는 
시장이 있는 한, 그는 말 위에 주렁주렁 달고 다닐 필요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외견상으로 본다면 황야의 무법자도 무소유자요, 노숙자도 무소유자요,   
법정스님도 무소유자이다. 그러나 이 세 사람들은 엄연히 다르다. 
황야의 무법자는 자기 능력으로 필요한 만큼의 돈을 벌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능력이 곧 소유인 것이다. 
이런 소유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노숙자들에는 그런 능력조차 없다. 이런 무소유는 아름다울 수도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다. 돈이 없으면 자유공간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법정스님은 정말로 무소유자였으며, 어떤 종류의 무소유자였을까? 
그는 글을 써서 사람을 매료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수십억원의 인세(印稅)를 받았고, 신도들로부터 각종 보시금들을 받았다. 
그가 다니는 곳에는 언제나 비서들이 있었고, 보시자들이 있었고, 
자유자재로 해외여행을 하면서 즐겼다. 무소유有라는 것은 거짓이요. 
무소유이론은 기존의 불교 가르침을 선동적인 용어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그 가 말하는 무소유이론은 가급적 물질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유혹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히 단절해서 자유인으로서의 행복을 느끼며 깨끗하고 
간소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살아갈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마치 김일성이 광장에 나타나면 발광들을 하듯이,
그렇게 병적으로 ‘무소유’이론에 환호하는 것일까?
가장 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오웅진 신부님과 
꽃동네에서 피와 고름을  날마다 만지는 수녀님들은 
세상에 많은 것을 봉사하고 있는 분들일 것이다. 
진을 빼며 과학을 공부하여 국가과학에 기여하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많은 것을 기여하고 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 나라의 운명을 위해 빨갱이들과 싸우는 사람들도 세상에 기여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법정스님은 남들에게는 이렇다 베푼 것이 없으면서 
자신만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승려가 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해 남들의 노력과 남들의 재산으로 일생을 가장 편하고 가장 자유롭게 
살다 간 무임승차자요, 빚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간 뒤에도 그는 삼성병원에 6,200만원의 빚을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는 쏠림 현상이 병적으로 심각하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이론이 광신도들에 의해 각광을 받자 벼라 별 승려들이 
마이크를 대고 무소유이론을 강론하여 돈을 긁는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얼마나 무소유적(無所有的)이었나? 
어느 스님의 기고에 의하면 법정스님은 김대중을 추종했고, 
북한체제와 인권에 대해 침묵했으며, 박정희를 증오했고, 월맹공산주의와 
싸운다는 이유로 파월장병들을 미워했고, 진보승려(進步僧侶)들의 배후 
총사령관이었다고 한다.

1994년 4.10 승려대회(僧侶大會)는 서암 종정을 불신임 결의한 사건으로, 
1,500명 대중이 총무원 청사를 점령했던 말 많은 사건이었다 한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여기에 투쟁적으로 관여하여 자기 측 승려들에게 
종권을 넘기는 결과를 이룩했다고 한다.

사실이라면 그의 무소유이론은 속임수요, 무소유가 사실도 아닌 것이다. 
한 가지 더 보탤 것이 있다. 법정스님 법정스님 하고 너무들 소란을 피우기에 
필자는 법정스님이 굉장한 분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TV에서 조명해주는 그의 말과 몸놀림과 얼굴을 보면서 
얼마간의 실망감을 갖게 되었다. 
무게감도 느낄 수 없었고, 평화롭고 자애로운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것이다.
법정스님의 이  무소유이론은 천하의 거짓말쟁이 김대중에게도 영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아래는 1997년 10월 8일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직전에 관훈클럽"에서 
행한 연설문이다. 
“이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저희는 이번에도 저희 자식들 재산까지 다 공개했는데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자식 뿐 아니라 형제의 재산까지도 공개를 하고 
이렇게 해서 정말 무소유가 되겠습니다. 
정말로 내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우리 가족은 무재산 가족이 
될 것입니다. 돈은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 영등포의 땅과 
경기도 수원의 땅은 장애인을 위해 내놓았고요. 저희 집 현재 살고 있는 것도 
가족회의에서 이미 내놓기로 결정이 나 있습니다. 
여러분! 믿어 주세요. 저는 일생에 거짓말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이것은 약속을 못 지킨 것이지 거짓말 한 것은 아닙니다.
거짓말 한 것하고 약속했다가 못 지킨 것하고는 다릅니다." 
김대중의 무소유는 “무재산 가족이 되겠습니다”라는 말로 표현됐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는 “내 호주머니에는 먼지뿐일세”라는 말로 표현됐다. 
무재산 가족이 되겠다는 김대중에게 어째서 사람들은 택시까지 팔아다 돈을 
바치는 것이며, 무소유자가 되겠다는 법정에게 어째서 사람들은 굳이 돈을 
갖다  바치는 것일까?  
 ◐지만원의 원문 보기 ☞  http://systemclub.co.kr/

◈돈 우습게 본 ‘먹물’ 들이 20세기 재앙 불렀다 ◈2010.03.20

지식인과 자본주의
앨런 케이헌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519쪽, 1만9000원

“오! 돈, 그 무서운 독, 영혼을 말라 죽이는 돈! 돈은 모든 잔인함과 비열함의 원인이며, 무시무시한 악….”

19세기 말 프랑스를 무대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돈’은 부르주아 세력과 돈에 대한 경멸·적개심으로 그득하다. 부르주아는 위선과 욕심으로 뭉쳐진 돼지인데, 그들에게는 돈이 곧 종교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런 거부심리는 19세기 지식인 그룹의 특징이다. ‘과시적 소비’란 말을 만들어낸 톨스타인 베블렌, 그 이전의 칼 마르크스 모두 자본주의 혐오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지식인 특유의 이상주의·허위의식과 함께 묘한 엘리티즘 탓이다.

이 책이 환기시켜주듯 기독교의 돈에 대한 비판은 더욱 혹독했다. “하느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것 아니던가? 돈·부자에 대한 공격은 고대 그리스·로마는 물론 근대 이전 모든 문명이 그러했다. 일테면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키케로 역시 돈과 부자를 우습게 봤다. 키케로의 경우 의사·건축가·교사는 존경할만하지만, 음악가·조리사 등 ‘쾌락 종사자’나 세리(稅吏)·사채업자 그리고 특히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꾼은 멀리하라고 했는데, 조선시대와 어찌 그리 닮았는지.

‘정신과 돈, 그 갈등의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서양문화사 여러 권 합친 것보다 시야가 넓고 정보량도 빵빵하다. 매우 논쟁적인 이 책을 읽다가 내팽겨치거나 씩씩거릴 독자도 상당수이겠지만, 반대쪽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지난 세기 말 뒤늦게 이념의 홍수를 경험했던 한국사회의 오늘을 위한 성찰로 딱 좋다. 그만큼 ‘지식인 위선의 역사’ 혹은 ‘쾌도난마 서구 좌파이념의 역사’로 읽어도 문제없다. 저자의 말대로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사회과학이나 정치이념이라기보다 얼치기 신흥종교다.

 
  돈에 대한 경멸은 지식인의 표상이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 사상가 장 자크 루소, 공산주의를 낳은 칼 마르크스, 철학자 에리히 프롬(사진 왼쪽부터) 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글북스 제공]

“마르크스는 역사에는 예측 가능한 끝이 있다고 가르쳤다. 최후의 날들이 있고, 부르주아 계급의 종말, 아니 모든 계급의 종말이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후 이 주장이 더욱 그럴듯하게 비쳤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혁명을 거치는 길이며, 그리 멀지 않는 미래에 승리와 천국이 보장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신(神)을 믿는 무리다. …공산주의는 과학이기도 한 종교이다.”(292쪽)

저자는 이 대목에서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의 미신”이라는 멕시코 현대작가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넌지시 소개한다. 19,20세기를 쥐고 흔들던 마르크스 레닌주의란 고대그리스 역사 이래로 부자와 돈 그리고 사유재산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이라는 지적인데, 문제는 지식인이다. 그들은 체질적으로 “혁명과 곧잘 열애에 빠진다.”(334쪽) 혁명이 좋기보다는 몸 안의 반(反)자본주의 DNA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지식인들은 지난 2세기 동안 소모적이고 잘못된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일으켜왔다. 이 과정에서 혁명가 노릇을 했건 단순동조자 역할에 그쳤건 20세기의 정치적 재앙에 지식인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문제는 반(反)자본주의 태도가 요즘 사회운동·문화운동으로 모습을 바꿨다는 점이다. 반미주의·반세계화운동·페미니즘·대항문화운동이 그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최악의 반기업 정서가 똬리 틀고 있다.

어찌 보면 이 책은 뜬금없이 나타난 책이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등장 타이밍이 딱 좋다.
죽은 지 이미 오래인 좌파 이념, 그러나 아직 유령처럼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좌파 이념에 대한 깔끔한 사망진단서로 의미 있다. 내공이 느껴지는 저자는 알렉시스 토크빌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의 역사학자로 미 라이스대학을 거쳐 지금은 파리 아메리칸비지니스스쿨 교수로 있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출처 : 방비워
글쓴이 : modor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