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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북 세력들 - 김대중과 정연주

modory 2011. 3. 9. 08:59

정연주가 누군가.

아래 글은 인터넷 뉴스인 오마이뉴스에 KBS 사장을 지냈던 정연주씨가 "정연주의 증언 52 - 지독한 모순 한나라당과 엄기영의 동거"(원문 보기 ☞) 란 글에 독자인 한사랑님(아이디: dhakdl)이 달아 놓은 댓글이다. 한번 읽고 새겨 볼 글이다.

KBS 사장 정연주씨가 사내 신년사에서 “오만한 권력,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시 노무현 정권은 KBS 사장에 대단한 인물을 골랐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정연주가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 48시간 쉴새없이 탄핵반대 선동 방송을 지휘한 사람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국민 세금과 시청료를 받아 대한민국 건국 원훈들을 친일파로 모는 드라마를 공영방송 전파에 띄워 보내며 이 정권의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 캠페인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이 정권 386 실세들의 반미 코드에 맞춰 남미의 독재자 차베스를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투사로 치켜세우며 한국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그린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내보내 혹세무민했던 사람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여당의 노무현 후보와 야당의 이회창 후보가 맞섰던 2002년 대선에서 한겨레신문 논설주간으로 야당 후보 아들의 병역 면제를 ‘神신의 아들들에게나 돌아가는 혜택’이라고 몰아붙였던 인물이다. 그는 야당 후보 아들의 병역면제가 불법 부정의 특혜라고 고발했던 김대업씨와 함께 당시 대선의 최대 공신이었다. 그의 활약상은 시중에서 ‘左좌대업 右우연주’로 회자되기도 했다. 물론 야당 후보 아들 병역의혹은 조작 왜곡으로 밝혀져 훗날 김대업씨는 유죄선고를 받고 복역했지만 정연주씨는 KBS 사장으로 2006년 연임까지 성공하며 승승장구했다.

정연주가 누군가.

남에겐 “미국 국적 취득은 특수계급의 특권적 행태”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미국 살던 자기 두 아들의 병역면제 서류를 직접 주미대사관에 접수시켜 병역을 면제시켰던 사람이다. 두 아들의 미국 시민권 취득 사실도 공개됐다. 정연주가 누군가. 2002년 총리로 지명된 장상씨 아들의 미국 국적 취득이 문제되자 “특권적 행태를 보이는 인사가 고위직에 갈 수 없다”고 썼으면서도 자기 아들 미국 국적 취득과 병역면제에 대해서는 “그게 KBS 사장 자리를 내놓아야 할 문제냐”고 뻗댔던 인물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 2005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아들이 미국에 내린) 뿌리를 뽑아 (한국으로) 옮긴다는 게 불가능했다.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했던 정씨의 큰아들은 그가 이런 말을 하기 석 달 전 이미 한국에 들어와 삼성전자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들이 병역의무와 국적을 버렸던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곁에 데리고 살면서도 마치 떨어져 있는 것처럼 “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연극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2006년 11월 KBS 사장에 연임된 그를 KBS 노조가 “낙하산 정연주는 KBS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막자 지하주차장 出口출구로 차를 진입시켜 ‘출근’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정연주가 누군가. 그는 2005년 2년 내리 적자가 예상되자 사원들에게 자신을 포함한 임원진 임금의 20% 삭감과 “뼈를 깎는 반성”을 약속했다가 이듬해 1월 이사회에서 6개월 동안 삭감 반납했던 임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해 받아냈던 인물이다.

그 KBS 사장 정연주씨 입에서
“오만한 권력,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말이 터져 나왔다. 말이 타락했다 해도 이럴 수는 없다. 국민을 아예 눈 멀고 귀 먹은 것으로 취급한다. 정말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다. 국민이 무서운 게 뭐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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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를 보니 햇볕이라는 요술로 북 정권에는 한없는 퍼주기를,
북 인민에게는 10년 이상의 더 혹독한 고통을 준 김대중이 생각난다. 적국에 퍼주기를 해서 우릴 고통 속에 빠뜨린 김대중이 한 짓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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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2월, 그는 일본과의 어업협정에 관심조차 없었다.3,000여 척의 어선이 졸지에 일자리를 잃었다. 어민들은 슬퍼했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다음날 어선들을 북한에 보내자 했다. 같은 해 3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해서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기계를 뜯어다 북한에 설치해주자 했다.


99년9월, 그는 타임지에 말했다. "식사 때 음식이 남으면 북한 동포들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괴롭다. 충분히 돕고 싶지만 국민여론이 부정적이어서 애를 먹고 있다"고...

그가 쓰러진 중소기업의 기계들을 뜯어다 북한에 설치하자고 하자 한전이 그의 뜻을 따랐다. 연간 5조의 적자를 내면서도 북한이 그 기계들을 돌려야 한다며 5,000억 원을 들여 발전소를 지어주고, 송전선을 세워, 남한 전기를 보내겠다고 했다. 2000년10월. 60만 톤의 식량을 북에 날치기식으로 보냈다. 3,120억 원어치였다.98년4월부터 그의 임기 중에 여섯 차례에 걸쳐 104만 톤의 비료가 갔다. 4,660억 원어치였다.
<어느 날 우리 농민이 말했다."하루아침에 비료가격이 2배로 올랐다. 알고 보니 북한에 비료를 보내느라 비료가 동이 나서 현재 재고물량이 없어 가격이 올랐다고 하더라"고..>


2001년10월, 전국 보건소에 있는 결핵 백신을 한 병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다가 북한에 주었다.30만 명분이었다. 그리고 보건소에는 입단속을 시켰다. <이때도 한국 사회가 요동쳤지..우리 애들한테 줄 백신이 없어서..>


2000년, 러시아 대통령에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에서 받을 14억7천만 달러를 받지 않을 테니, 러시아도 북한에서 받을 50억 달러를 받지 말아달라는 제안이었다.(국민 눈 속이는 퍼주기 잔꾀) 정부가 사용한 남북 협력기금이 매년 5,000억 이상이었다.최초 2년간만 해도 1조864억 원이 집행됐다. <이때도 국민여론이 안 좋자 曰: YS 당시보다 북에 퍼준 돈이 적다고..>


현대에 이어 다른 재벌들도 닦달하여 북한에 투자 명목으로 퍼준 돈이 5,960억 원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북한에 간 돈은 2조5,500억 원이다.금강산사업은 사업이 아니라 적장에게 군자금을 대주기 위한위장사업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임기 중 금강산을 통해 10억 달러 이상이 갔다. 여기에 더해 몰래 준 돈도 있다. 얼마의 달러가 갔는지 누구도 모른다. 단지 미국이 그 중 5억 달러를 찾아냈을 뿐이다. 적장은 이를 가지고 남침용 무기를 구매했다고 미국이 발표했다.

금강산 사업은 김정일에 돈을 대주기 위한 사업이었다. 한 사람이 하루 입산하는 데 100달러를 바치기로 계약을 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관광객이 있으나 없으나 무조건 연간 50만 명이 간 것으로 쳐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현직 재직시 두 번에 걸쳐 금강산 관광 권유(?)를 정중하게 거절>이유는 간단: 나 자신이라도 북에 돈 주기 싫어서..나 대신 누군가가 가야만 하지만..나는 싫어서..


그뿐이 아니다. 99년부터 2004년까지 6년에 걸쳐 '존재하지도 않는 금강산 독점사업권'을 명분으로 하여 9억4,200만 달러를 주기로 했다. 그 돈을 주고 우리 관광객들은 어떤 관광을 했는가? 바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제재를 받고, 카메라도 빼앗기고, 민영미 여인처럼 1주일씩이나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한국"과 "대한"은 북한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이유로 한국일보 기자는 "한국"이라는 낱말 때문에 H일보라는 명찰을, 대한매일은 "대한"이라는 낱말 때문에 D일보라는 명찰을 달아야 했다. 관광이 아니라 굴욕이었다.


관광객이 없어도 북한에는 자동적으로 매년 3억7백만 달러가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관광객이 없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주면 비난이 쏟아진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국민 총동원령이었다. 학생도 집단적으로 보내고 노인들도 공짜로 보냈다. 금강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등극하는 반면 설악산과 한라산은 초라하게 허물리고 말았다. 산을 가진 우리 지역경 제가 망가진 것이다.


북한 땅이 성지가 되고, 북한 정권이 상전으로 탈바꿈했다. 북한은 이 엄청난 돈을 가지고 무얼 했는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신예전투기 50대를 구입했다.

스커드 미사일을 500기에서 600기로 늘렸다. 휴전선 대포를 25% 증강했다. 전차와 화학무기도 전방으로 추진했다. 휴전선에 전진 배치된 군사력을 65%에서 70%로 늘렸다. 10년 이래 최대 규모의 훈련도 했다. 이런 기막힌 정보는 미국이 알려주었고 우리 정부는 쉬쉬했다. 정부가 북한에 남침용 군자금을 대준 것이다.


북한은 또 우리가 퍼준 돈으로 북한강 상류와 임진강 상류에 8개의 댐을 건설했다.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총 100㎞의 "지하수로"를 만들어 우리에게 흘러와야 할 물을 머나 먼 원산 앞 바다로 빼고 있다. 이로 인해 북한강 상류에 유입되는 수량이 5분의 1 정도로 줄었다. 최근에는 임진강 상류인 황강에5개의 댐을 만들어 그 물을 개성공단으로 돌리고 있다. 이로 인해 경기 북부는 심한 식수난과 홍수에 고통을 받고 있다.


2001년 6월, 북한 상선들이 제주해협을 유린했다. 대통령이 UN사 자동교전규칙을 박탈하여 우리해군의 손발을 묶었다. 그래서 북한 선박 한 척에 우리 함정 6척이 31시간이나 따라다니며 제발 좀 나가달라고 애걸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에게 남해 통항권을 인정해 주자했고, 바다의 휴전선인 북방한계선이 너무 넓으니 일부를 북한에 양보하려 하다가 저항에 부딪쳤다.


1999년6월15일 발발한 연평해전은 우리 해군의 화려한 완승으로 끝났다. 그런데 전투에서 우리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 장군들은 곧바로 천대를 받아 군에서 나갔다. 설욕전을 벼르던 북측은 3년 뒤인 2002년6월29일 서해교전을 일으켰다. 우리 장병 6명이 전사하고19명이 부상당했다. 일방적인 참패였다.


대통령은 국가를 지키다 장열하게 생명을 바친 용사들을 괄시했고 바로 그 날 빨간 넥타이를 매고 임동원과 함께 일본으로 월드컵 구경을 나갔다.

북한 함정은 구식이고 우리 함정은 신형이다. 북한 함정에 장착된 총포에는 자이로 시스템이 없어 배가 파도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총 끝이 요동을 친다. 하지만 우리 함정에 장착된 총포는 배가 아무리 흔들려도 총 끝이 목표를 꽉 물고 있다. 이러한 "자이로 조준시스템"은 2001년 12월, 북한의괴선박을 몇 초 이내에 침몰시킨 일본 순시선에도 있었다. 우리 해군 총포의 위력은 이런 순시선이문제가 아니게 크다. 우리에겐 더 정교한 미사일도 많다. 우리 함정은 북한 함정보다 10노트 이상 더 빠르다. 싸우면 북한의 함정은 적수가 되지 않는다.


*6.29에서 참패한 것은 김대중이 지휘관의 소관사항인 야전작전권을 박탈한 데서 기인했다.

김대중은 "절대로 먼저 쏘지 말라", "쏘려면 청와대에 보고부터 하라"는 기막힌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더해 군 수뇌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을 만들었다.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 보면 당시의 군 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됐던 아래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 교전 규칙을 뒤엎은 것이었다.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1999년 6.15 연평해전 당시에는 매우 이상한 "교전규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관장 부서는 합참이니 합참의 누군가가 만들었을 것은 분명한데.. 그 교전규칙이 어떤 것인지를 음미해보면 당시의 군 수뇌는 한국군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적의 포구에 가슴을 정면으로 대주고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제정됐던 아래의 교전규칙은 기존의 UN사 교전규칙을 뒤엎은 것이었으며, 현장지휘관의재량권을 통째로 빼앗은 것이었다. 일단 북한에 먼저 맞으라는 노골적인 지침을 만든 합참 관계자가 누구였는지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첫째, 북한선박으로부터 소총 유효사거리인 450m-500m 떨어진 곳에서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6.29에서 북한이 발사한 85 미리 포의 명중 사거리는 8km나 된다, 450m 앞에까지 다가가서 경고방송과 시위기동을 하라는 것은 아예 얼굴을 갖다 대주라는 것이다.


두 번째 규칙은 200∼500m 사이의 공간에서 차단기동을 하라는 것이다. 적함은 선수를 보이고 있는데 한국 함정은 기다랗게 늘어진 옆구리를 보이며 적의 앞을 가로질러 가라는 것이다. 심장을 적의 총부리에 내주고 한동안 옆걸음을 해서 통과하라는 것이다.


북한의 처분만 바라라는 명령이다. 이에 따라, 해군의 교전 절차는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5단계로 구성되어 있었고 6.29당시에는 바로 이 제2단계 수칙을 수행하다가 비참하게 테러를 당했다. 교전규칙은 처음부터 맞아죽으라고 만든 것이었다.


이러한 교전규칙은 1999년6월15일 연평해전에서도 강요됐던 교전 룰이었다. 그런데 1999년에는 어째서 대승을 거두었고, 2002년에는 대패를 당했는가?

1999년에는 제2함대 사령관인 박정성 제독의 과감성과 조성태 국방장관의 배후 지원 덕분에 손발을 묶은 교전규칙을 거의 무시했기 때문에 대승했고, 그 결과 그는 조용한 곳으로 좌천되어 군을 나가고 말았다.

연평해전에서 해군이 대승을 이루자 김대중은 2함대 사령관을 내보내는 것으로 군에 좌익분위기를 형성한 데 이어 군에 “4대 교전 수칙”을 하달했다.

1) ‘북방한계선을 지킬 것’

2)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

3) ‘상대가 먼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할 것’

4) ‘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 것’이었다.

이 4대 규칙은 무슨 뜻인가?


우리 장병들은 즉각적인 위협을 감지하더라도 적의 선제공격이 있기 전엔 먼저 공격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고, 지휘관들에는 ‘문제를 확대시키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로 받아 들여졌다. 김대중이 내린 4대 교전 수칙은 우리 해군의 손발을 완전히 묶어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2002년 6월 29일에는 우리가 북한과는 게임이 되지 않는 현대식 무기를 가지고도 일방적으로 당한데다가 김대중이 드리운 검은 그림자에 겁을 먹고 북으로 도망하는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여론이 들끓자 합참은 7월 2일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의5단계 대응을 3단계로 단순화하는 내용의 새 작전지침을 해군의 모든 작전부대에 지시했다.

방어와 함포사격에 유리한 공간을 확보하고 적 함정이 퇴각요구에 불응할 경우 격파사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상황에 따라서는 원거리 함포 공격력을 갖춘 초계함과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공군 전투기 및 지상군을 투입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또 다시 노무현에 의해 변질됐다.


2004년 6월 남북장성급회담의 합의에 따라 합참은 작전예규에 ‘경고통신’ 단계를 포함시켰다. 상호 통신으로 NLL 무력화 의도 여부를 사전 탐지한 뒤 실력행사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합참의 누가 언제 5단계 교전규칙을 만들었는지 규명해야 할 것이다. 김대중을 역적으로 (규명할 재판을 열어서 공정하게 재판을 한 뒤에) 처벌해야 할 것이다.

바다에서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장렬히 전사한 6명의 전사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로부터 마치 역적이나 되는 것처럼 괄시를 받다가 사건 6년만인 이명박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2008년 6월 29일에야 비로소 국가추모일로 지정됐다.


2000년 6.15일, 김대중은 모든 국민에 말했다. "앞으로 전쟁은 없다".

2002년 4.3-4.6일, 임동원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북한에 가서 5시간동안 김정일과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다."북한을 의심하지 말자,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다".


2002.5.24일, 김동신 국방장관이 主敵(주적)개념을 땅에 묻겠다고 선언했다.


敵(적:원수)을 의심해야 할 위치에 있는 이 세 사람이 국민과 군에게 의심을 풀라고 강조하면서 북한을 적이라 부르지 말라한 것이다. 적을 의심해야 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 적을 의심하지 말라고 명령하면 그가 바로 의심받아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는 국보법을 철폐하여 좌익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해 주려 했다.


反美(반미). 反日(반일) 감정을 선동하여 [쇄국주의]와 [주체사상]을 식목했다. 주한미군과 주월한국군을 殺人集團(살인집단)으로 매도했다. 용공세력을 비호하고 용공주의자들을 요직에 중용했다. 국가보안법에 걸려 8년간 옥살이를 했던 전직 국회의원이 버젓이 국회에 다니며 무기구매에 간여했다. 간첩 활동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옥에 갇혀있던 사람을 끄집어내서 장관을 시켰다.


노동당 창당 55주년 기념행사에 가서 축사를 읽고, 파주에 있는 인민군 묘소에 가서 참배 한 사람들이 부총리가 되고, 장관이 되고, 대학총장을 했다. 그의 분신, 임동원은 대법원에서 반국가단체로 판결난 [범민련]을 對北(대북) 연락창구로 이용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11명의 방문단을 날치기식으로 보냈다.
그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 그래서 그는 2000년 9월3일, 국회에서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김대중은 국회와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불과 1주일 만인 9.11일에 직제에도 없는 장관급자리를 청와대에 만들어 놓고, 그를 앉혔다. 그는 남북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동을 계속했다.2001년8월부터 전교조가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념교육을 시키기 위해 불법 교육지침서“이 겨레 살리는 통일”을 내놓고 가르쳤다.
책에는 '인민군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통일사회'가 그림으로 영상화돼 있다.

북한은 불쌍한 우리 동포이고, 우리의 주적은 미국과 미국을 추종하는 냉전세력이며 이들 냉전기득권 세력은 우리의 적이라고 가르치라 했다. 개인의 삶에 불편을 주는 국가안보는 부정돼야 한다고 가르치라 했다.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경찰관 17명을 불태워 죽인 동의대 사건 등 반정부 데모 사건들은 민주화운동으로 둔갑시키는 반면, 정작 국가의 부름을 받고 나가 싸운 정부군을 박대하고 멸시했다. 당시의 군경은 국가폭력배로 규정했고, 군경과 그 가족들을 무참하게 살육한 사람들을 민주화 열사로 규정했다. 어제의 충신이 역적이 되고 어제의 역적이 충신이 된 것이다.

이는 국가가 망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2001년 10월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그는 6.25를'실패한 통일 노력'이라고 말했다. 한국전 역시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뜻이다.

국가의 정통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반면 북한 정권에 새로운 정통성을 부여하려 했다.


9.11 테러 이후 북한은 미국의 주적으로 떠올라 있다. 북한은 세계에서 테러기술과 테러무기를 가장 많이 가진 불법무기 소지자가 됐다. 미국은 세계 각국을 향해 미국편에 서든지 테러 편에 서든지 태도를 확실히 하라 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주저 없이 북한 편에 섰다.


2001년 4월3일부터 3박4일간 임동원 특사가 평양을 다녀왔다.
갈 때에는 대량살상무기로 인한 미-북간의 전쟁을 막으러 간다고 했지만 돌아온 그는 전혀 다른 것을 내놓았다. '쌀 50만 톤, 비료 30만 톤을 주겠다'고 했다. 경원선과 동해선을 개통하여 철의 실크로드로 연결하는 "철로연결"이 평양방문의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전쟁을 막으러 간 것이 아니라 전쟁을 열려고 간 것으로 보였다.


실크로드는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2002.4.8일자 도쿄 신문은 러시아철도 기술연구소가 북한 철도의안전성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보도했다. 두만강에서 원산. 평강을 잇는 동해안철도 700km의 전 구간이 위험한 상태이며 터널 130군데, 교량 742군데의 보수가 시급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원선은 어떤가?


철로지반이 약해 7대의 화차만 다닌다. 전기가 불충분하여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남한에서 1시간에 가는 거리를 3-4일간 간다. 대통령이 그토록 선전했던 실크로드는 어디에도 없다.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결국 남침 길을 열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상천외의 생각으로 150조의 공적자금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200여조의 국가채무를 졌다,


100여조의 연기금을 마구 풀어헤쳤다. 그는 이런 돈을 풀어 가장 먼저 금융기관을 국유화했다. 은행에 빚을 진 600여 개의 대기업, 중견기업들을 국유화했다. 기존의 공기업이 405개, 중앙정부가 108개, 지방정부가 297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 1,000여 개의 대형 기업들이 한 순간에 정부 소유가 됐다. 국영공화국이 된 것이다.


여기에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정치꾼들이 나가 연봉을 170%까지 올리고, 수당을 올리고, 판공비를 수백 프로씩 올리고, 하청업체 및 조폭들과 야합하여 돈을 털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공자금을 넣어야 기업이 산다며 떼를 썼다. 공자금을 통제하는 부서도 없다. 풀어헤친 공자금은 추종세력에게 알아서 챙겨가라고 내놓은 돈으로 보였다.


전기료를 단 한번에 2배나 올렸고, 농촌 심야전기 시설비를 40만원에서 170만원으로 대폭 올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북한에 전기를 준다고 했다.

기업들이 은행에 담보로 잡혔던 토지와 건물도 정부가 차지했다. 정부는 자산관리공사라는 대형브로커 기구를 만들었다. 1,600명이나 된다. 이 브로커 기구가 망해가는 기업의 토지와 건물을 헐값으로 인수하여 급매물로 외국에 내놓았다. 골드만삭스,론스타.리만브라더스,싱가포르투자청등 해외 브로커 업체들에 고물가격으로 마구 팔아치웠다. 그들은 웬 떡이냐 싶어 이들을 사서 곧바로 다른 외국기업들에 되팔았다. 더러는 3배, 더러는 5배의 가격으로 횡재를 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외국 브로커 업체들이 자기 돈은 10-30%만 대고, 나머지는 국내 은행에서 빌려 가지고 샀다는 사실이다. 돈을 빌려줘 가면서 외국인들에게 폭리를 준 꼴이다. 왜 이런 짓을 했겠는가? 정권에 급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의도의 60배에 해당하는 금싸라기 땅이 외국인 소유가 됐다. 2000년12월27일자 매일경제신문은 "웬만한 빌딩 치고 외국인 손에 넘어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라고 보도했다.

이면계약의 존재에 대해서도 밝혔다. 강남에서 가장 큰 건물인 "현대 I-타워", 서울시청 옆에 있는 "파이낸셜센터", "벽산빌딩", "아시아나항공", "힐튼호텔", SK 증권, 동양증권, 쌍용증권, 고려증권, 대우증권, 여의도 KTB 빌딩, 은석빌딩, 한효빌딩, 대한방적 빌딩, 금호그룹 신사옥, 광주은행 사옥, "시티타워", "현대중공업빌딩" 등, 서울에서 가장 큰 건물들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갔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팔아넘긴 돈은 두 동강으로 나뉘어 졌다. 공식계약서에 표시된 돈은 은행으로 들어갔고, 이면계약서에 들어 있는 돈은 저들의 주머니로 갔을 것이다.

공식계약서에 잡힌 돈은 외환보유고로 잡혔다. 정부는 툭하면 외환보유고가 늘어났다고 자랑을 했다. 하지만 그 외환보유고는 바로 이렇게 헐값에 팔아넘긴 잔돈이었다. 이면계약서에 쓰여 진 검은 돈이 얼마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개혁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기업을 요리했다. 빅딜이라는 생소한 낱말로 국민을 혼란시키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업을 마음에 드는 기업에 합쳐 주었다. 워크아웃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말을 듣지 않는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빼앗았다. 빼앗은 기업은 추종세력에 나누어주었다.


기업의 살생부까지 만들어 가면서 겁을 주었다. 기업의 운명을 거머쥔 실세들에, 알아서 돈 바치라는 신호였다. 기업은 앞을 다투며 저들에게 상납을 하면서 저들과 선이 닿는 연줄을 구해서 대표이사 자리에 앉혔다


불순한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김정일을 우상화시켰다. 청와대 비서가 김정일을 찬양했다.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에는 청와대 여비서가 했다는 말, 曰

"벌써부터 우리 장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김정일국방위원장님을 뵙게 되었으니 저처럼 크나큰 영광을 지닌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2000년 8.11일, 대통령이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 보냈다.
그들은 국빈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다.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반했다.

더러는 귀국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일을 찬양하고 다녔다.
그들은 상호비방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언론합의문'을 교환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를 저들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다. 그때 김정일은 참으로 무서운 말을 했다.

김정일 曰: 통일은 내가 맘먹을 탓이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그래도 언론사 사장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일 이미지를 통 큰 호걸로 부각시켜 주었다. 그래서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라고생각하는 국민이 9.7%나 된다고 했다. 초등학생의 90%가 김정일을 김대중보다 훨씬 더 위대한사람이라 했다. 부인들 사회에도 김정일 오빠부대가 생겼었다.


남북정상이 만난 직후에 김정일이 지시한 공문 내용이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다", "인민군대는 반미, 반일, 반괴뢰 구호를 더 높이 들고 계급의 총창을 보다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원쑤들과 한 번은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