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톨레랑스 時代의 파탄 - 선우정 주말뉴스부장 : 2013.09.07토 |
자살한 노무현 대통령은 재야 활동 때 인연을 맺은 이학영씨를 청와대 인사수석으로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력(前歷) 때문이었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조직원이었던 그가 혁명 자금을 마련한다는
명목으로 재벌 집을 털다가 붙잡힌 '강도 미수' 전과 앞에선 노 대통령도 어쩔 수 없었다.
청와대로 불러 독대를 하면서 애정을 표시했지만, "강도 전과자가 국정을
맡아선 안 된다"는 여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뜻을 꺾었다. 2005년의 일이다.
그때까지 한국 사회엔 상식이 어느 정도 제구실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듬해 노무현 정부가 이학영씨를 포함한 남민전
가담자들을 대거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의 강도 행위를 "항거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포장했다.
은전(恩典)에 힘입은 이학영씨는 작년 4월 총선에서 당선돼 결국 국정을 맡는 자리에
올랐고, 같은 달 로또에 버금가는 돈벼락까지 맞았다.
민주화 배상금 13억1000만원을 타낸 것이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이었지만 그가 남민전
강도 행위로 복역한 기간(3년 6개월)의 기회비용까지 배상액에 포함됐다.
'이학영 카드'를 접은 노 대통령은 훗날 그가 금배지도 모자라 13억원을 얻어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도 전과자가 국정을 맡아선 안 된다'는 상식은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무너졌을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노 전 대통령까지 받아들인 상식을 어떻게 망각했을까.
'민주화 보상'이란 신분 세탁 시스템이 치밀하게 작동한 탓도 있다.
노무현 정부는 유신시대에 발각된 남민전 사건만이 아니라 민주화 이후 활동한
반국가단체인 구국전위·민혁당 사건 관계자까지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하면서
한 단계씩 종북(從北)에 대한 국민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이들의 제도권 진입을 도와준 친노(親盧)세력의 역할도 컸다. 하지만 최종 단계에서
이들을 국정 책임자로 선택한 것은 국민이었다. 전력을 몰랐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종북도, 강도도 괜찮아"란 그들의 주술을,
비록 일부일지라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의 2000년대는 일명 "톨레랑스"라고 불리던 관용의 시대였다.
법과 원칙, 정의와 상식이 다 무너져도 "역지사지로 이해해 보자"고
말해야 폼 나는 시대였다. 벼랑에 선 이석기씨가 '볼테르의 관용론' 운운하고
'보도연맹'을 들먹이는 것도, '바꿔 생각하면 테러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주술을 다시 밀어 넣기 위한 전술에 해당할 것이다.
당장은 장안의 웃음거리가 됐지만, 이정희씨의 '농담론'은 테러 모의를
"철 지난 병정놀이" "돈키호테의 무장 수준"이라며
깔아뭉개는 '쿨한 평가절하론'과 합류하면서 중장기적으로 우리의 상식을
다시 묘한 방향으로 비틀어놓을지 모른다.
이석기씨가 들먹인 계몽철학자 볼테르가 철저히 불관용의 자세로 증오한 것은 광신과
극단이었다.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상대를 해치기 위해 강도로 돌변하고,
사회를 파괴하기 위해 테러를 모의하는 행위들을 말한다. '관용의 한계'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사회가 '관용의 시대'를 파탄 내지 않고 발전시키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끝>
[조선일보 데스크에서] 이석기의 두 차례 訪北 - 김민철 사회정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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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이든 지방이든 여행하는 가장 큰 즐거움은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가면 그렇지 않다.
2005~2007년쯤 통일부를 담당하면서 여러 번 북한에 갈 기회가 있었다.
요즘은 남북 관계가 좋지 않아 통일부 기자들도 북한 땅 밟을 기회가 흔치 않지만,
당시는 개성공단이나 금강산은 갈 기회가 너무 많아 서로 가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굳이 평양까지 가보지 않더라도, 개성이든 금강산이든 한 번이라도 북한 땅을
밟아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건 아니라는 것, 북한 체제의 오류와 경직성이다.
북한 당국이 아무리 가리려 해도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허름한 집들, 남루한 주민들의
옷차림은 이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또 북한에 가면 긴장을 풀 수가 없다. 특히 '최고 존엄'이 있는 '왕조 국가'이기 때문에
오는 경직성이 가장 큰 문제다.
2006년쯤 금강산 온정리 외금강호텔에서 열린 남북 행사를 취재할 때였다.
행사 마지막 날이라 조금 긴장이 풀린 사람들은 로비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숙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도 하나 찍어볼까 하고 그 앞에 막 섰을 때 당 간부로 보이는 여성이 갑자기
"무엄하게 백두산 3대 장군을 모신 영상 앞에서 사진을 찍느냐"고 호통을
쳤다. 너무 갑작스러워 뭐라 대꾸할 말도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히 우리 측 진행 요원이 개입해 무마했지만 불쾌한 기분은 오래 남았다.
북한에 가면 다시 군사분계선을 넘어올 때까지 조금만 방심하면 곤경에 처할 수 있다.
2008년 금강산 총격 사건은 이런 경직성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반북 성향도 커진다는 말은 방북하면
바로 이런 체제 오류와 경직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여러 번 북한 땅을 밟으면서도 이런 찜찜함을 뭐라 규정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명확히 해주었다. 선생은 2007년 경의선·동해선
시범 운행에 참석하고 쓴 글에서 "이날 하루, 무언지 불편하고, 무겁고
딱딱했다는 느낌…북한 체제 냄새나 분위기가 너무 진하게 배어 있어 보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모름지기 이런 일은 남북을 막론하고 쉽게 쉽게
'평상의 사람살이 수준'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날 하루 짧은 일정이었지만 혜안을 가진 지식인은 정확히 문제를 짚어낸 것이다.
내란 음모 혐의로 5일 구속 수감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도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3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 방북했다. 2005년 3월 31일~4월 1일 1박2일간,
2007년 3월 16~18일 2박3일 금강산 관광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가 아무리 세상 공부를 게을리했더라도 몸으로 북한을 느꼈을 텐데,
어떻게 대한민국을 '적(敵)'으로 규정하며 북한이 공격하면 주요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논의를 할 수 있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친북주의자인 모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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