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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에 떠난 소설가 최인호를 그리워하면서 - 검농 김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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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신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까지
예시 해준다.그렇게 되면 신과 동격 개념이다. 어쩌면 신의 영역을 침범한 자다.
그때 그는 인간창조의 절대자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자기가 생산한 작품의
인간들에 대한 한 그렇다. 최인호 그는 깨끗한 소설가다.
나는 평생 일면식도 없는 분의 장례식에 문상 간 일이 꼭 한번 있다.
물론 세상에 잘 아려진 공인의 장례식에 형식적 행사의 문상 같은 것 말고 말이다.
혼탁한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고 끝까지 깨끗하게 살다간 독립 운동가 김준엽 선생은
내 개인적으로 이 시대 제일 깨끗함을 유지 하시다가 작고하신 분으로 알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조문 간 일이 있다.
그와 가장 친했던 동지 장준하 선생마저도 민주화투쟁에 나섰다가 고생하신
그길 조차 함께 하지 아니 하였다. 다만 상아탑 속에서 안타깝게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던 아픔을 가지셨던 분이다.
목숨 걸어놓고 의기투합하여 일본군 학병을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헌신 하신
사이인데도 동지의 민주화 투쟁에 함께 하지 못하고 교육현장에서 헌신하고 계시었다.
그래서 그분을 흠모했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문상을 간 것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민주화 운동에 그처럼 열열 했음에도 끝내 대통령 병들어 일생
잘 쌓아가던 민주화 투쟁의 순수성 없음을 노출 시키고 추악한 정치 욕과 자식들
방자한 행실을 반성도 못하고 전두환 자식들만 죄를 묻는 제2의 실수를
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더욱 김준엽 선생의 정권 때마다 유혹의 손길이 뻗쳐도
끝내 굽히지 않은 그의 지조와 인품을 존경 했던 것이다.
오늘 한 작가가 타계함에 단 한 번의 일면식으로 나는 그의 문상을 가야 했다.
평소 작가로써 그의 인품을 존경 해왔고 그의 작가적 역량을 또한 존경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연으로 문상 간 것이 아니고 좀 더 다른 사연이 있다.
소설(小說)이 있으면 중설(中設) 대설(大設)도 있 터이고 소설가(小說家)는 무엇이며
작가(作家)는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수준의 나는 그의 작가적 역량을 비평할 능력은 없다.
내 상식과 정보로는 한국 문인 중에 고등학교 시절 문단에 등단한 사람은 최인호 씨와
시인 양인자씨와 제 작년엔가 고양 모 고등학교 재학 중인 여학생 한사람이 시인으로
등단한 세 사람만 기억된다. 양인자는 대중 음악가 김희갑 씨와 결혼하여 주옥같은
가사들을 남편에게 주어 우리와 가까이 있다. 그런데 기대했던 만큼 양인자는
시작(詩作)은 그처럼 열열 한 것 같지 않고 최인호 씨만 묵묵히 소설에만 전념해왔고
역량 또한 자타가 인정 하는 바이다.
김홍신, 황석영 같이 돈벌이되는 삼국지 한번 안 쓰고 김홍신 김한길 처럼 정치판
한번 기웃 거리지 않는 철저한 소설가이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고 좋아 했다.
그가 해신을 쓸 때 장보고 이야기라서 문득 장보고의 뛰어난 무력을 묘사하려면
필시 검술 장면이 필요 할 것이고 그 검법을 어떤 검법을 인용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도 그 부분은 자신 있게 답을 못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견해를 주고받다가 본국검은 그렇게 신뢰 할 만 한 근거가 있는
연구 연구물이 없는듯하다고 했다.
그러면 이번 나의 한문을 아는 조선족 무술교수와 함께 연구한 연구물 우리검술
“조선세법”을 한번 보겠는가라고 했더니 흔쾌히 한권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드렸다.
그리고 난후 그의 작품 해신에 주인공 장보고의 칼놀림에 약간의 칼 자세를
내가 보낸 조선세법의 자세를 인용해 주었다.
그의 그런 조처에 대한 일말의 고마움 같은 것을 기화로 가끔 전화통화를 하곤 했다.
특히 그와 약간 견해차를 보인 것은 고구려유장 이정기가 세운 “치청대국“을 치기
위해 당 현종의 명을 받아 당나라 무령군 소속 장교장보고가”치청대국“ 남쪽을
공격했다. 그로 인해 ”치청대국“은 결국 망하고 만다.
그 ”치청대국“을 세운 이정기가 신라사람 노예들에게 혹독하게 했다는 부분에서
이정기를 크게 비난했다. 나의 소견은 좀 달랐다. 신라로 인해 고구려가 멸했다고
여기는 고구려유장 이정기는 신라에 대한 감정이 크게 좋지 않아 그렇게 신라인들에게
무자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견해 차이였다. 그즈음 친분이 있던
경주 동리 목월 문학관 관장 장윤익 관장의 초청도 있었고 마침 최인호 작가의
문학상 수상식이 있어 참석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한국 문단의 내 노라 하는 시인 소설가등 많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반갑게 나는 최인호씨와 조우하게 된다. 경희대 봉직 시절, 출 퇴근 스쿨버스에
동승하여 자주 문학에 대한 담론을 함께하던 중진시인 박이도 교수도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기도 했다.
그때 인상적인 장면 하나는 문학상 심사 위원 중 이어령 씨와 몇몇 심사위원이
참석하기로 되었으나 이문열 씨만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써 참석 하였다.
그때 이문열의 심사평이라기보다 소감을 듣게 되었다. 1945년생인 최인호씨는
1948년생인 자기보다 나이는 3년 선배지만 작가로써는 10년 선배라고 했다.
그런 자신이 심사위원을 맡았음을 퍽 송구스럽게 생각 한다는 말 이었다
소설이 사라져가고 소설가가 줄어드는 시대에 큰 작가 한사람 떠나가는 섭섭함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느껴온 나로서는 그 섭섭함이 더욱 심하다.
전국체전이 목전에 닿아있고 훈련이 바쁜 때에 경기도 대학부 선수와 일반부
경기대표 선수 총당 시합하고 이틀 후 강원도 일반부 전지 훈련 팀 총당 시합 한
탓에 몸이 파김치가 되어 도저히 문상을 갈 형편이 못되었다.
아쉬운 채 밤이 지나고 발인 날 아침 선잠 깨어 부랴부랴 그이 출상을 보게 된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떠남을 슬퍼해주고 돌아왔다.
이즈음 시대영화나 각종 드라마를 보면 터무니없는 검술 장면을 보게 되어
안타까움이 없지 않았다. 늘 안타깝던 터에 졸저 “조선세법”일부를 인용 해 준
그의 배려의 고마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 민족검술 “조선세법”의 큰 발전을
기대한다.
그이 명복을 진심으로 빌면서 끝으로 그가 마지막 울부짖던 절규,
“아이고 어머니. 엄마 나 저 글 좀 쓰게 하여주십시오. 아드님 인호가 글 좀 쓰게
해달라고 일러 주세요. 엄마, 오마니! 때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드님은 오마니의
부탁을 거절 하지는 못 하실 것입니다. 앵 앵 앵앵 오마니. 저를 포도주를
만들게 해주세요.”
그런 그의 처절한 절규와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이 말을 선물로 받아 드리면서 개천절 휴일
검도수련원에서 훈련 중인 경기도 대표선수와 지방에서 전지훈련 온 팀과 어울려
한판 하러 호구를 짊어지고 집을 나선다.
검도 하지 않으면 검도 인이 아니라는 다짐을 하면서.....
오호애재(嗚呼哀哉)
복유상향(伏惟尙饗)
향전에 이별의 뜨거운 눈물을 바칩니다. 金 在一 汗背
※최인호씨의 작고 전날 전전날 너무 고단하게 운동을 한탓에 부득이 문상을 포기했다가
발인 당일날 새벽 부랴부랴 문상하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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