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미륵사지석탑의 해체 조사가 실시되었다.
익산에 위치, 이렇게 생긴 미륵사지 석탑.
백제 무왕시대 지었다는 것과 서동, 즉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러브스토리가 깃들여 있다고 전해진 석탑임.
보통 탑을 해체해보면 탑의 땅 속에 진귀한 보물이 묻혀져 있어
기대를 높이게
되는데 이 미륵사지 석탑은 땅끝까지 해체하기에 7년이나 걸린다는 계산이
나와
그냥 무작정 해체만 하고 있을 무렵 석탑 중간에서 기대치 못했던 봉인물품들이
나왔다.
금동 사리엄과 금박봉인문구
![](https://t1.daumcdn.net/cfile/blog/212DDE4252A92E6416)
주절주절 앞뒤로 193자가 빽빽이 적혀있음.
나온 것들. 금동사리엄과 금박봉인문구, 은제함과 구슬,
석탑 바닥을 보니 일제시대 일본놈들이 사리장엄을 파보려 했던 흔적이
있음.
하지만 미륵사지석탑은 중간층에 보물이 있던 관계로 실패했던
듯.
여러 조사로 미륵사지석탑의 조성이유를 백제의 부활로
밝혀졌음.
당시 무왕의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제동맹을 배신한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영토는 좁아지고 공주에서 천도한 부여도 더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무왕은 성왕에 대한 복수가 필요했고
당시까지도 남원 근처 국경선에서 신라와의 전투가 매일 일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에 무왕은 백제 귀족들의 성원에 힘입어 부여에서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했던
것 같고 백제의 부활과 성공적인 천도를 위해 익산에 미륵사지 석탑을 세웠다.
비록, 무왕 자신의 아들 대에서 백제가 끝나 버려 익산으로 천도가 무산되어
버렸지만 미륵사지석탑의 건조는 벼랑끝에 서 있던 백제부흥의 상징적 역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가 익산으로의 천도를 추진하려 했다는 사실보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켰던 사실은 금박봉인문구에 써있던 두 줄.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다. 좌평이란 백제의 직위를 말하고
사택씨는 백제 귀족의 성씨이다. 그러니까 사택적덕이란 사람의 딸이
무왕의 왕비란 말이다. 그럼, 선화공주는?!?!?! 서동요라는 노래까지
퍼뜨리며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결국 사랑을 이룬 서동, 무왕의 선화공주는??
선화공주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던 미륵사지석탑 봉인문구에 다른 여자의 이름
이 있다는 것.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