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추적] 서동요의
비밀. 서동, 선화공주를 버렸는가. - 2부 2013/12/01 18:32 백제 법왕의 아들 서동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사모하여 선화공주와 혼인하고 싶어 소문을 퍼뜨리려 지었다는 최초의 4구체 향가. 서동요.
서동과 선화공주 동상까지 세우며 그들의 사랑을 기리고 있음.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삼국유사에 나타나 있는데,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맛동방에게 밤에 알을 안고 간다네.
서동은 훗날 백제의 무왕이 되어 선화공주를 기리어 미륵사지 석탑을 지었다고 하는데 미륵사지 석탑 복장유물에 금제봉인문구에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다른 내용이 발견된다. 바로 백제 무왕의 왕비가 백제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것. 어허 이것참.
이는 일본의 서기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발견된다. 의자왕 시절, 국모가 죽자 국모의 여동생의 딸들을 추방하였다고 하는데 이때의 국모가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보아 선화공주는 아니라는 계산인 것이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허구인 것인가, 아예 선화공주란 인물이 허구인 것인가,
먼저 선화공주는 역사 기록 속에 삼국유사에서 등장한다.
진평왕은 후사에 아들이 없고 딸이 세명 있는데 첫째가 덕만공주, 둘째가 천명공주, 그리고 셋째가 선화공주이다. 덕만공주는 훗날 선덕여왕이 되고 천명공주의 아들인 춘추는 태종무열왕이 되어 사후 문정태후란 칭호를 받게된다. 그녀들의 막내동생이 선화공주라는 것.
마지막 줄 물음표는 아직 확실히 해석이 안된 부분.
학자들이 추측컨데 무엇을 안고 간다는 것인데
다른 부분에서 똑같은 한자의 쓰임새를 유추해보면 알 란(卵)자로 추측함.
이 말은 당시 문란하고 개방스러웠던 신라의 사회상을 바탕으로 봤을 때 임신을 하여 애기를 가졌다네 또는 서동과 관계를 맺었다네 라고 해석할 수 있음. 단숨에 문란한 선화공주로 만들어버려서 진평왕은 선화를 내쫓게 된다. 계획대로 성공한 서동은 쫓겨난 선화를 보듬어 백제로 데리고 와 혼인을 하게 된다는 러브스토리. 하지만 앞서 밝혀진 대로 미륵사지석탑의 유물에서 말하듯 백제 무왕의 정실왕비는 사택씨였던 것.
그럼 두가지 가능성 중 하나 이다.
1. 선화공주와 무왕은 혼인한 적이 없고 서동요는 허구의 이야기이다. 2. 선화공주는 무왕과 혼인 후 내쫓겨졌다.
아직 학계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 지는 알수 없으나 이번 미륵사지 석탑의 발견으로 한가지 확실 한 것은 백제 무왕의 정실왕비가 사택씨가 자명하다는 것이다. 그럼 결론적으로. 선화공주와 무왕은 실제 왜 혼인하였을까를 역사적으로 유추해보자면. 당시 백제의 상황을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의 동성왕이 전사하고, 이에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었으나 진흥왕의 배신으로 성왕까지 살해당해버린 상황.
게다가 무왕의 전 3대의 왕들이 전부 단명하여 1년에 한명씩 왕이 바뀜.
이런 상황에 즉위한 무왕은 첫째, 신라와의 표면적인 동맹관계가 필요했고, 둘째, 뒤숭숭한 백제를 안정화시키고 귀족들을 왕의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왕은 신라의 공주를 일시적인 왕비로 맞아들였으며
백제의 대표적인 귀족인 사택씨의 딸을 왕비로 맞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그리고 1부에서도 나온 듯이 익산으로의 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백제 수비체계를 정비하려 했던 것이다.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서 결론이 어떻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또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비록 정략결혼의 구실로 끝날지라도,
그들의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남기고 싶었던 신라백제 사람들의 뜻은 서동요란 향가로 유지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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