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세상보기

2014년 1월 14일 오전 06:51

modory 2014. 1. 14. 06:52

비겁해져야 산다. 비겁에 대한 글이 조선일보 : 2014.01.14에 실렸다.  

비겁(卑怯) /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석좌교수
나이가 들면 점점 더 고집스러워진다는데 나는 요즘 정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나도 다짜고짜 내 의견을 말하기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나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단언컨대…"라고 시작하는 TV 광고가 유행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단언하기가 겁이 난다. 주변에서 확신에 차 있는 사람들을 보면 많이 부럽다.

어떻게 하면 저런 자신감을 갖출 수 있을까 부러움을 금치 못하겠다.

내가 이처럼 다소곳해지는 데에는 미국 유학 시절의 경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버드대에는 학부 학생들과 대학원생이 함께 들을 수 있는 수업들이 있다.

학기 초에는 콩인지 팥인지도 구별 못 하던 어린 학부 학생이 불과 서너 주 만에 이미 석사까지 마친

나를 가뿐히 제치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모멸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 지도교수였던 에드워드 윌슨 교수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던 리처드 르원틴 교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인간 중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 어떤 주제의 세미나든 그저 한 시간만 들으면

그 연구를 평생 해온 발표자를 압도해 버리는 그 살아 있는 천재를 보며 무한한 좌절감을 느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언제든 주변에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는 비겁해지기로 결정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듣기로 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들은

다음 그걸 종합하고 은근슬쩍 거기에 내 생각을 조금 버무려 마치 내 것인 양 꺼내 놓는 짓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지극히 비겁한 전략이다. 그런데 어쩌랴? 비겁함이 우리로 하여금 뭉치게 하는 걸.

18세기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은 이렇게 말했다. "다 같이 비겁해지면 평화로워진다.

인류의 절반은 용감하고 절반은 겁쟁이라면, 용감한 자들이 늘 겁쟁이들을 윽박지를 것이다.

만일 모두가 다 용감하면 늘 서로 싸우며 대단히 불편한 삶을 살게 되겠지만 모두가 겁쟁이면

우리는 함께 잘 살 것이다." 우리 모두 조금만 비겁해지자. 그러면 세상은 뜻밖에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