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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

modory 2016. 5. 22. 15:58

하회마을..

 

남쪽으로만 흐르던 낙동강이 하회에 이르러 동북쪽으로 선회하여 큰 원을 그리며 산을 휘감아 안고 산은 물을 얼싸안은 곳에 터잡은 마을..

 

이렇게 물이 돌아나간다고 해서.. 물돌이동이라하고 한자로 하회河回라고 이름 붙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평시에나 난시에나 오래 살 수 있는 좋은 곳으로 도산과 하회를 제일로 꼽았으며

땅 모양 자체는 배모양을 띈 '행주형'이므로 마을에 돌담을 쌓지 않는 관습과 우물을 파지 않고 하천에서 끌어다 쓰는데

이는 배에 돌을 싣는 것과 같고 배에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 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하회마을은 현재 풍산 류씨들이 모여사는 동족마을입니다..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 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김해 허씨가 마을을 처음 개척하고 광주 안씨가 뒤이어 일가를 이루었으며 풍산 류씨가 그 앞에서 잔치판을 벌인다는 말입니다.

 

마을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큰길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고

예전에는 남촌댁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웃하회'에 집이 많았으나

남촌댁의 가세가 약화되자 그 일가의 권속들도 약하게 되어 웃하회가 점차 줄어들게되어 논밭으로 많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지금 살펴볼 중요한 '곳' 중.. 북촌댁만 따로 잡아 올리도록 하고.. 나머지는 이번 하회마을 편에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멀리서 바라본 하회마을과 부용대의 모습입니다..

마을로 들어서기 전..  주변의 들러볼 '곳'을 거쳐 마을로 들어갑니다..

 

병산서원입니다..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서원입니다..

서원의 입구인 복례문.. '克己復禮'에서 따온 말이며 세속된 몸을 극복하고 예를 갖추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대루..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길게 이어진 만대루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서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 에서 따왔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앞의 병산은 절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매일 마셨을 것 같더군요..

 

만대루에 오르는 계단입니다..

 

전면 7칸의 규모은 꽤나 됩니다.. 평균적으로 한칸의 길이가 8자 정도되니까요..

 

만대루에서 바라보이는 낙동강과 절벽을 두른 듯 우뚝 선 병산..

 

만대루의 대들보입니다..

보통의 것과 다르죠? 물결치듯 자연스러움을 살린 모양입니다..

 

서까래 역시.. 물결치듯 자연스럽게..

실제로 보면 훨씬 편안합니다..

 

강학 공간인 입교당..

 

이 마루가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소이고..

 

오른쪽의 명성재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며..

 

왼쪽의 경의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 조금 색다르죠.. 유생들을 위한 동재와 서재가 있음에도..

본 건물인 입교당에 이런 유생 용 기거장소를 만들었다는 것은..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 넘어 병산..

 

존덕사.. 사당입니다..

이 문만 단청이 칠해져 있어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다른 건물과 대조를 이룹니다..

 

각종 서책과 목판을 보관하던 장판각..

 

병산서원에는 배롱나무가 많습니다... 수령 몇백년을 넘기는 배롱나무들..

 

향사 때 제수를 마련하는 전사청..

 

밖으로 빠져 나와 바라본 병산서원의 모습..

 

 

 

부용대와 겸암정사로 향하던 중 길 옆의 모습입니다..

 

겸암정사..

겸암 류운룡이 1567년에 세워 도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르던 곳..

 

이곳 겸암정사와 후에 언급할 옥연정사는 형제애를 나누던 특별한 사연이 있는 곳입니다..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

 

부용은 연꽃을 뜻하며 부용을 내려다 본다는 의미의 부용대..

이곳 부용대와 건너의 만송정 솔숲까지 옛선비들이 선유 줄불놀이를 하던 곳입니다..

 

부용대의 소나무들..

수령이 엄청나겠지만.. 둘레의 굵기는 두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돌산인 부용대에서 힘들게 오랜세월을 견디며 살아가는 소나무들입니다..

 

옥연정사..

서애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고자 지은 곳..

바로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한 곳입니다..

 

 

 

왼편으로 쪽문이 보입니다..

저리로 나가면.. 밑으로는 강변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있고..

 

이렇게 부용대 아래를 가로지르는 숲길이 나있습니다..

이곳 옥연의 류성룡과 겸암의 류운룡이 이 길을 통해 서로 형제애를 나누던 길이라 합니다..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강 건너의 하회마을..

 

화천서원..

겸암 류운룡을 받드는 서원..

 

 

희한하게도 아궁이가 정면으로 나있습니다..

 

겸암 류운룡 선생을 모신 사당입니다..

 

진짜 하회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이곳은 하동고택..

예전에는 음식점을 겸하던 곳이었는데...

작년부터 정비되어 시작된 '사업'의 일환으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뒤에서 다시 언급토록 하겠습니다..

 

 

하동고택의 담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 하회마을은 배가 물에 떠있는 형상의 '행주형'의 땅이기 때문에

돌담을 사용치 않는다고 했는데... 이렇게 약간은 '애교'스럽게 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동고택'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집은 전통적인 '판담'을 사용함이 올바른 듯 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마을의 전통적인 판담입니다..

거푸집처럼 널빤지로 틀을 만들고 그 사이에 진흙, 돌, 지푸라기, 석회 등을 넣어 굳힌 다음 널빤지를 떼어내어 만드는 담..

흙담이기 때문에 비가 올 때 쓸려 내려가지 말라고 담에 기와지붕을 이는 것도 특징이지요..

 

양진당..

이 집이 마을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풍산 류씨 대종택입니다.. 서애 류성룡의 맏형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입니다..

 

입암고택.. 양진당의 사랑입니다..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이며 입암 류중영의 고택이란 뜻입니다..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겸암의 6대손인 류영의 아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군요..

 

 

양진당은 사랑인 입암고택 외에는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후손이 실제 살고 있으니까요..

양진당에는 특이하게 사당이 두 채 있습니다..

류중영과 류운룡을 불천위로 보시는데.. 부자를 한 사당에 모실 수 없다 하여.. 별묘로 모시기 때문입니다..

 

충효당..

서애 류성룡 종가..

양진당 길 건너에 위치하지만 서로 정면으로 맞대로 있지 않고 서향하고 있습니다..

 

역시나 솟을대문입니다..

솟을대문은 아무나 사용치 못하고 당상관이상의 관직을 가진 사람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군요..

 

사랑인 충효당입니다..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으로 가는 길에 있는 소나무입니다..

 

 

'죽을때까지 어버이를 잊지 않겠다'는 영모록..

이 유물전시관의 이름을 짓게 만든 서책입니다..

 

징비록 입니다..

 

어사화..

류성룡의 8대손이 류상조가 과거에 급제하고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어사화입니다..

저렇게 큰 것을 어찌 머리에 꽂고 다녔는지 궁금합니다.. ^^

 

구상나무..

1999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하회마을을 방문한 기념으로 식수한 나무입니다..

 

충효당을 거쳐 오른쪽으로 돌면 만나게되는 부용대의 위용입니다..

 

한껏 당겨 찍은 부용대 밑 왼쪽의 겸암정사 입니다..

 

역시나 당겨 찍은 오른쪽의 옥연정사..

 

저 중턱의 어딘가로.. 길을 내어 형제애를 나눴다는 뭐 그런 이야기..

길 만드는 사람들만 고생했겠죠.. ㅎㅎ

 

만송정을 지나.. 남촌의 윗부분에 있는 논입니다..

만추의 색.. 예쁩니다..

 

 

마을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이유는 작년 9월에 세계문화유산협회의 제안에 따라.. 마을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키위해..

마을 내에 있던 모든 음식점과 토산품점이 마을 입구에서 1.2km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여

음식점 11곳, 토산품점 5곳만 영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광객은 모두 이곳 주차장에 주차한 후 마을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요금 500원 편도)를 이용하여 마을로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걸어갈 수는 있습니다..

내년 9월에 브라질 상파울로에서 하회마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된다니.. 좋은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동고택에서도 한자리 잡아.. 음식점을 영업중입니다..

오늘 저녁은 이곳에서 해결합니다..

 

 

바깥쪽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주방이 보입니다.. 실제 음식을 만드는 곳은 저 건너편이고.. 설겆이 등을 하는 공간이더군요..

 


저녁의 메뉴는 간고등어구이 안주와 안동찜닭으로 골랐습니다..

 


안동답게.. 일반 소주는 없습니다..

우선 21도짜리 안동소주로 시작합니다..

 


나왔습니다.. 간고등어 구이... 근데.. 미친듯이 짭니다..

본래 간고등어는 자반과 달라 짠맛이 거의 없는데 말이죠..

간잽이가 정신줄 놓았었던 모양입니다..

 


찜닭도 나왔습니다..

전반적인 음식의 맛은... 별로입니다..

중간정도도 아닌.. 중하...

단골손님이 아닌 죄다 관광객을 상대로하니.. 음식맛에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없겠지요..

 

아까 앉았던 자리에서.. 점점 날씨가 차가워짐에 따라.. 행랑쪽으로 옮겼습니다..

해가 지고 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차를 가지고 마을로 들어왔습니다..

오늘 숙박은 북촌댁에서 할 예정입니다..

마을로의 차량 통제는 오후 5시 30분까지만 하고.. 그 이후로는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은 남촌 지역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런 전통 마을에 교회가 들어선 것은 쫌 뜬금없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곳 마을 주민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분명 있겠지요.. 관광지가 아닌 실제 주민이 살아가고있는 마을이니까요..

 


교회건물도 이렇듯 한식으로 올렸습니다만.. 맞배지붕도 아니고.. 팔작지붕도 아닌.. 뭔지 희한한 구조의 ...

어두워서.. 더 잘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걸 보러.. 내일 아침 다시 올 수는 없겠지요..

 

교적비입니다..

원지정사 근처에 있던 국민학교의..

단 하나있던 학교가 폐교됨으로 현재는 마을에 학교가 없습니다..

 

수령 6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삼신당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이 삼신당이 하회마을의 정 중앙이라고 여기지며.. 바로 옆이 북촌댁의 별채가 있던 자리입니다..

 

전통의 판담과 변형된 담이 공존하는 골목길..

 

원지정사.. 서애 류성룡이 아버지의 상을 치루려 마을로 내려왔다 지은 곳...

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도대체 상을 치루려 왔다가 왜 서당은 지은 것인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ㅎ

 

역시나 배롱나무... 류성룡이 좋아하던 나무인 모양입니다..

 

 

남촌댁..

충효당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남촌댁은 1797년 형조좌랑을 지낸 류기영이 세웠습니다만..

1954년 불에 타 지금은 문간채와 별당, 사당만 남아 있습니다..

이 남촌댁의 쇠락으로 주변의 남촌 전체가 따라서 쇠락하여 근처에 논과 밭이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남아있는 굴뚝입니다.. 굴뚝의 규모로 보아.. 집의 규모도 작지 않았으리라 짐작됩니다..

 

남촌댁 사당의 담입니다... 한껏 멋을 부린 모양입니다..

물론, 바깥의 실제 담은 전통의 판담입니다..

 

사당의 벽면도 이렇듯 멋을 부려 놓았습니다..

불에 타지 않았다면.. 멋진 옛 한옥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아쉽습니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불에 타고 남은 잔해를 쌓아놓은 무더기만...

 

남촌댁을 빠져나와 숙소인 북촌댁으로 갑니다..

아침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시간이 가깝습니다..

 

 

아침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언제 본 것이 마지막인지 기억조차 없는 박이 초가지붕에 올라있습니다..

 

 

하회마을은 1988년 민속마을로 정해지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많아진 곳입니다..

마을 입구에 주차장을 만들고 마을 내부에도 음식점과 토산품점이 꽤나 많이 생겼다가..

현재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위해 정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마을은 단순히 관광지로서의 마을이 아닌 실제 사람이 살고 있는 살아있는 마을입니다..

따라서 관광객에게 공개된 공간이 있고 주민의 생활을 위한 공개치 않는 공간이 공존합니다..

모쪼록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주민의 편안한 삶을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해 주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집을 들어갈 때 - 대부분은 멋드러진 솟을대문을 지닌 예전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지낸 조상이 있는 집 입니다만..

'이리오너라'라고 외치는 관광객을 여럿 보았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보다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요즘 세상에 옛날처럼 부리고 사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의 '이리오너라'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너무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부디.. 내년 9월 세계문화유산 총회에서 등재 결정으로 또다른 세계문화유산을 우리나라에 갖고 싶은 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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