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성화한 한반도 지층, 원전 강타 우려도...대재앙 대비하고 있나
2016년 7월 5일 오후 8시33분 울산에서 규모 5.0 지진이 발생해 온국민의 가슴을 다시 한번 철렁하게 했습니다. 지진이 발생한 곳은 울산 동구의 동쪽 52km 해상이었습니다.
국민안전처는 긴급재난문자를 보냈는데, 날짜를 잘못 입력해 6분 뒤 정정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죠. 재난방송은 40분 이후에 시작되었고요. 우리의 현재 방재시스템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습니다.
이번 지진을 보면서, 한반도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님을 다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최악의 지진은 조선 숙종 때(1681년) 강원도 양양 삼척에 일어난 것으로 진도 7.5 정도의 규모라고 일본 역사지진학회 논문으로 발표되었습니다.
또 신라 혜공왕 때인 779년의 경주 지진은 사망 인원이 100여명이라고 삼국사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진학자들은 1905년에 한반도 지진활성화가 시작된 뒤 지금은 활성기의 후반쯤이라고 진단합니다. 울산과 부산, 경주 일대와 수도권 및 강남지역이 위험지역이라고 꼽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대재앙을 우린 아직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한반도 지진 안전지대 아니다] 1200년前 남조 신라 때도 경주서 강진… "100여명 사망"
홍준기 기자 : 2016.09.14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 이래 최강 지진(규모 5.8)이 발생한 경북 경주에서는 약 1200년 전 남북조시대 신라 때에도 강력한 지진이 발생,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것으로 기록돼 있다.
기상청이 서기 2년부터 1904년까지 발생한 한반도 역사 지진을 다양한 과거 문헌을 통해 분석한 '한반도 역사 지진 기록'에 따르면, 779년(남북조시대 신라 혜공왕 15년) 3월 '경도(현재 경주)에 지진이 있어 민옥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100여명이었다'고 삼국사기와 증보문헌비고 등 과거 문헌에 기록돼 있다.
기상청은 "과거 문헌에 기록된 대부분 지진과는 달리 경주 지진에 대해서는 사망자 수가 적혀 있다"면서 "당시 지진으로 숨진 사람의 규모가 정확한지를 떠나 인명 피해가 많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지진 외에도 삼국사기 등에는 '경도(경주)에 지진이 있어 민옥이 무너져 죽은 사람도 있었다(304년 9월)' '지진이 있어 금성(경주)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458년 2월)'는 등 경주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여러 차례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분석 대상 기간인 2~1904년 사이 삼국사기·고려사절요·고려사·조선왕조실록·증보문헌비고·승정원일기·일성록 등 과거 문헌에 기록된 지진은 총 2161회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경주 지진처럼 지면이 갈라지고 건물 붕괴 등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한 진도 8~9 수준의 강한 지진은 총 15회(0.7%) 정도였다.
12일 발생한 경주 지진의 진도는 최대 6이었는데, 과거 문헌에 기록된 지진의 94.5%가 진도 6 이하 지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지진이 발생한 진원에서 측정한 지진의 절대적인 강도를 측정한 수치이며, 진도는 진원에서 떨어진 지역에서의 지진 강도를 표기한 수치이다.
과거 문헌엔 지진해일(쓰나미) 기록도 남아 있다. 1643년 7월 발생한 지진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울산부(울산)에서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구쳐 나왔으며 바다 가운데 큰 파도가 육지로 1~2보 나왔다가 되돌아 들어가는 것 같았다'는 문장이 있다. 1보는 약 1.8m이다. 1681년 6월엔 '지진이 발생했을 때 파도가 진동하고 끓어올랐으며, 해변이 조금 작아져 마치 조수가 물러난 때와 같았다"는 기록도 있다.
■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기상.천문기록의 보고(寶庫)
333년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백제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
뉴스일자: 2011년11월09일 11시15분
기상청은 《삼국사기》에는 기상기록 424건, 천문기록 218건, 지진기록 88건이 수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기상ㆍ천문ㆍ지진기록이 각각 8건, 5건, 2건 수록을 확인하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한국 기상기록집①-삼국사기ㆍ삼국유사로 본 기상ㆍ천문ㆍ지진 기록》을 발간하여 중요한 기상자료에도 활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발간한 한국 기상기록집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구려.백제.신라의 기상.천문.지진 기록을 발췌해 기상청이 자연과학자 및 역사학자와 합심하여 만들어낸 한권의 책으로 묶은 첫 번째 성과물이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상관련 내용으로는 대부분은 일상적인 것보다 특이현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오로라’, 용오름 영향으로 추정되는 ‘물고기가 비에 섞여 있다’ 등 재미난 기록들이 망라되어 있다.기상현상 중 가장 많이 기록된 것은 가뭄이다. 그 다음에 눈, 서리, 기록이 많으며 그외 홍수(큰물)를 유발한 큰 비, 우박, 천둥 기록 등의 순이다. 천문기록 중에서는 일식이 가장 많고 그 외 혜성, 유성 등의 기록이 있다.
한국 기상기록집①에는 삼국시대 최초의 기상.천문.지진 관련 기록은 기원전 54년 “여름 4월 초하루 신축일에 일식이 있었다.”는 신라의 천문기록이다. 기상기록으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35년 “가을 7월에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는 고구려의 기록이다.지진기록 중 최초의 기록은 서기 2년 “가을 8월에 지진이 났다.”는 고구려의 기록이다.삼국시대의 정량적 관측 기록으로는 “(298년 2월) 경주에 안개가 짙게 끼어 사람을 분별할 수가 없었는데 5일만에 걷혔다.“, 414년에 현재 중국 길림성에 위치한 집안현에 “눈이 다섯 자(五尺)나 내렸다.“ 등이 있다.
사람 잡아먹는 심각한 가뭄
또한《삼국사기》의 기상기록 424건 중에는 가뭄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112건: 26.4%). 자연 재해 중 인간을 가장 심한 공포로 몰고 간 현상은 가뭄이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유랑민과 도적떼들이 많아지면 급기야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의 극한 상황들이 나타날 정도였다.
이렇듯 심한 가뭄 기록은 중국의 사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신라, 백제, 고구려 순서로 가뭄피해 기록이 많았고, 330년 백제에서는 벽골제를 만들기도 했으나 당시에 삼국이 가뭄에 대처하는 방법은 대부분이 기우제를 올리는 수준에 머물렀다.
《삼국사기》의 비와 홍수(큰물) 기록은 68건이다. 홍수 기록은 단순히 홍수 발생 뿐 아니라 홍수로 인한 인명피해, 산사태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중 589년 신라 홍수 기록은 인명 피해 뿐 아니라 민가 피해를 구체적인 통계값으로 언급한 유일한 기록으로, ‘가을 7월 나라 서쪽에 큰물이 나서 민가 30,360호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었다.’ 라고 하였다.
유성으로 불난 백제 왕궁과 민가
《삼국사기》의 천문기록 218건 중에서는 일식의 등장 횟수가 가장 많으며(66건: 30.3%), 그 다음이 혜성, 유성의 순서이다. 이러한 천문기록을 통해 하늘과 인간세계가 같이 교감한다는 고대인들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삼국사기》에는 총 66건의 유성 기록이 있는데, 이 중 땅에 떨어졌다는 기록이 10건이다.
직접 피해를 입힌 것은 333년 ‘여름 5월에 별이 떨어졌다. 왕궁에 불이 나서 민가까지 연달아 태웠다.’는 백제 기록 1건이고, 6건은 전시(戰時)의 기록이다.한편, 647년에 신라 귀족 비담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기록을 보면, 유성이 수도에 떨어지자 비담은 사병들에게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으니, 이는 여왕(선덕)이 패할 징조”라 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불붙인 허수아비를 매단 연을 하늘로 띄워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냈고, 정변은 결국 민심을 잡은 여왕과 김유신의 승리로 끝났다.
별의 추락은 홍수나 지진과 같이 직접 피해를 입히는 재해는 아니지만, 이와 같이 국운을 흔들 수 있는 천재(天災)였다는 점에서 당시에는 큰 의미를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100명이 넘는 사망자를 초래한 신라의 지진
《삼국사기》의 지진기록은 모두 97건이다. 최초의 지진 기록은 고구려 유리명왕 21년(서기 2년), ‘가을 8월에 지진이 났다.’는 내용이다. 779년 신라 지진 기록은 인명피해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힌 유일한 기록으로, ‘봄 3월에 경도(경주)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를 현대 지진 규모로 환산하면 6.7에 해당한다. 아이티 지진이 규모 7.0인 것과 비교해 볼 때, 유사한 규모의 대지진이 과거 한반도에도 발생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진 기록은 삼국 중에서 신라의 기록 수가 가장 많으며, 연대별로 보면 7~8세기가 다른 세기에 비해 많으나 당시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삼국사기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7~8세기에 신라에 지진이 많이 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분명 과거의 한반도가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상청은 자세한 내용은 기상연구소 홈페이지(http://www.nimr.go.kr)에 e-book 형태로도 게재해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