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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장가>의 유래

modory 2017. 8. 12. 18:32

<도이장가>의 유래

 

 

 

  고려태조 10년(927년) 10월에 팔공산에서 전투가 있었다. 924년, 고려와 후백제는 양국간의 인질을 교환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경상도 북부지역(문경,성주,영천)이 잇따라 고려에 귀부한데다 고려에 질자로 보낸 진호(견훤의 생질)가 숨지면서 평화는 2년 여만에 깨지게 된다. 크게 노한 견훤은 고려와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한편 친 고려적인 신라 왕실을 응징하고자 했다.
  이보다 앞서 경애왕은 왕건을 경주로 초청했는데 이를 차단하려는 것도 중요한 의도였다. 927년 10월 백제군이 영천까지 진격해 오자 경애왕은 고려에 위급함을 알렸다. 왕건은 공훤을 사령관을 삼아 1만명을 보내 구원케 하였다. (그러나 이들 군사는 견훤의 군사와 싸웠다는 기록이 전혀 없으며,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행방이 묘연하다. 아마 견훤군과 싸워 궤멸된 것으로 추측된다.)
  견훤은 곧바로 신라의 도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비빈들과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마 수도경비사령관격인 남산성의 군사력에 의존하기 위해 그곳으로 옮겼거나, 시조묘인 나을신궁에 들러 조상들의 음우를 빌기 위해 이동중에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이미 초겨울철이라 포석정에서의 유상곡주 연회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후백제의 침공을 알고 고려의 군사를 요청해 둔 상태에서 비빈들과 질펀한 연회를 가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다. 백발이 성성한 61세의 나이에 신라 도성에 입성한 견훤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의 나이로 종군하면서 처음 서라벌에 들어왔던 견훤이 46년만에 다시 경주 땅을 밟은 것이다. 휘황찬란한 신라 도읍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배신감과 비애뿐이었을 게다. 고려와의 힘겨운 쟁패과정에도 신라가 한몫 거들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견훤은 신라를 마구 짓밟았다. 친 고려 정권 제거가 목적이었던 만큼 견훤은 재빨리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김부(경순왕)를 왕으로 옹립하고 창고에 보관된 각종 보화와 무기를 빼앗아 철군했다.
  왕건은 공훤의 군대가 궤멸되고 경애왕이 자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전쟁터에 나섰다. 든든한 막료 신숭겸, 김락과 함께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은 왕건의 군대는 점촌, 상주, 선산을 자나 팔공산 기슭에 이르렀다.
  이때의 이야기가 지명으로 남아 있는데 서변동 일대의 '무태'와 '연경 마을'이 그것이다. '무태'라는 마을은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태연함이 없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는 설과 이곳을 지날 때 지역 주민들이 부지런함을 보고 "태만한 자가 없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이 전한다. 또 '안경'은 이곳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들려와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왕건의 군대는 뒤이어 지묘동과 미대동을 거쳐 동화사 일대의 사찰 군사력을 평정하고 백안동, 능선동 일대를 지나 영천쪽으로 향했다. 동화사는 당시 백제계 법성종 사찰로 견훤세력의 근거지였다. 영천이 후백제군에 함락된 상태에서 더 이상 전진이 어렵다고 판단한 왕건은 은해사 부근에서 매복을 한 채 되돌아 오는 후백제군을 치기로 작전을 세웠다. (양측에서 다 그럴만하다는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겠지만 현재의 기록으로는 후백제군이 이 길로 온 이유를 알 수 없다. 왕건은 팔공산 동수 군사를 깨뜨리면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왕건의 매복 작전도 이들에 의해 견훤측에 알려졌을 것이다.) 아무튼 왕건의 작전은 처음엔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팔공산 동수에 이르러 길목에 매복해 있다가 견훤을 갑자기 들이쳐 격파하니 처음에는 견훤군이 갈팡질팡하였으나 점차 대오가 수습되면서 형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도리어 왕건군이 포위 속에 들게 되었다" 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견훤이 고려군의 매복 사실을 알고 역 매복 작전을 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를 이끌었던 후백제군의 장군은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왕자였다. (그는 이 전투로 "지략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약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떠오른다. 뒤에 첫 왕자 신검의 반란으로 견훤이 유폐될 때 살해됐다.)
  전투에서 패한 왕건은 영천 서쪽 30리 지점의 조그만 봉우리를 거점으로 군대를 수습했다. 이 봉우리가 '태조지'라고 전하나 현재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뒤이어 밤을 틈타 왔던 길을 되돌아 퇴각했다. 지묘1동과 지묘3동 사이의 '나팔고개'는 퇴각하는 고려군을 뒤쫓는 후백제군의 나팔소리가 산을 울렸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들은 다시 서변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살내(전탄)'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양측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쏜 화살이 강에 가득하여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저탄'이라고 적혀 있는데 대구 읍지에는 '전탄'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 고려군에는 증원병이 합세, 약간의 기력을 회복했던 것 같다. 전열을 정비한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밀어 붙이며 지묘동 왕산 아래 미리사 부근까지 진출했다. 양군의 전투는 이곳에서 가장 격렬하게 벌어져 결국 고려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말이 난다.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리는 길목에 있는 고개 이름이 '군사를 깨뜨린 고개'라는 뜻의 '파군치'가 된 것도 이 때문. 이 전투에서 가까스로 왕건이 목숨을 보전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신숭겸의 지략 덕분이었다. 신숭겸이 왕건의 옷을 바꿔 입고 달려 나와 후백제군 속으로 뛰어 들었다. 힘이 다한 그가 후백제군에게 숨지자. 승전에 취해 어수선한 틈을 타 왕건이 몸을 빼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의 마을 이름이 지묘동인 것은 신숭겸 장군의 지혜가 교묘했다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
  왕건은 김락마저 전투에서 숨져 버려 거의 홀몸으로 예상 도주로를 피해 동화천을 따라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봉무동 토성 산기슭에 왕건이 도주하다가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자암'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다. 뒤이어 도동 부근 들판을 지날 때 후백제군이 있지 않을까 근심했다가 무사히 빠져 나가면서 왕건의 얼굴이 펴졌다고 해서 이곳 지명이 '해안'이 됐다고 하는 속설도 전한다. ( 또 왕건이 도주하다 불로동에 이르자 노인과 부녀자는 모두 달아나고 어린아이들만 남아 있어 '불로동'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뒤이어 왕건은 넓은 들판을 피해 평광동 산기슭으로 도주로를 잡았다. 평광동 뒷산에서 나무꾼을 만난 왕건은 그에게서 주먹밥을 얻어먹고 산을 넘어 동구 매여동 쪽으로 향했다. 나뭇꾼이 나무를 다하고 내려와 보니 그 사람이 사라졌는데 뒤에 마을 사람들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곳을 '왕을 잃은 곳'이라는 뜻의 '실왕리'로 불렀다. 뒤에 음이 변하여 '시랑리'라고 부르게 됐다. 시랑리 부근에서 겨우 한숨을 돌린 왕건은 계곡을 따라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다 산을 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매여동을 비롯한 이 일대를 '안심'이라고 하는데 이곳에 이르러 왕건이 비로소 안심하게 됐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또 '반야월'이라는 지명도 하늘에 반달이 떠서 그의 도주로를 비춰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에 이른 왕건은 수성구 고모동 지역을 지나 앞산 북쪽 산기슭을 따라 성주 지역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앞산의 '은적사'는 왕건이 달아나던 도중 혹시 추적해 올지도 모를 후백제군을 따돌리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는 뜻이 담게 있다. 이 절 서쪽에 있는 '안일사'는 은적사 부근에서 바깥 동태를 살피던 왕건이 이곳으로 자리를 옮게 편히 쉬어갔다는 속전이 있다.
  한편 파군제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백제군은 왕건의 퇴각로가 칠곡 일대일 것으로 예상하고 곧바로 칠곡으로 추격, 노적가리를 불태우는 등 대목군을 크게 공략한다. 뒤늦게 왕건이 성주로 달아났음을 알고 또 다시 성주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이후 한동안 경상도 일대는 후백제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됐다.
  왕건이 성주에서 무사히 개경까지 돌아간 경과는 명확하지 않으나 절치 부심하던 왕건은 2년 후 929년 12월 안동전투에서 크게 승리한다. 이 기점으로 후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게 되는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고려인들은 팔공산 전투에서 숨진 신숭겸 장군과 김락 장군에 대한 숭앙심은 대단했던 것 같다. 태조 왕건은 팔관회에서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벌여 왔다. 풀로 두 공신의 허수아비를 만들어 옆자리에 앉혀 두었는데, 풀 허수아비인 두 공신이 술을 받아 마시고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한다. 또한 예종 때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도이장가'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시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신라의 전통 가요인 향가 형식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향가 가운데 마지막 노래다. 이 작품에 표출된 미의식은 숭고(崇高)이다. 오로지 임(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겠다는 충성심이 하늘 끝까지 미쳤기에 두 공신의 장렬한 죽음은 값진 것이며, 죽음의 비극을 초월하여 숭고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죽음은 순간적인 것이나, 곧은 자취, 곧 충절은 영원한 것으로 하여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 제작 경위에서 알 수 있듯이, 팔관회와의 관련이나 주술제의적 측면, 제5행에 드러난 가상(假像)의 주술적 발언 등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특히 주술적 숭고미를 구현하고 있다. 아울러 영웅적 인물이 현실과 죽음을 초극하는 장엄한 행위는 인격적 숭고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에는 인격적 숭고미도 동시에 표출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것 가운데서 임금이 지은 가장 오래된 향가로, 제작연대와 제작경위가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인 의의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