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The Column] 촛불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의 슬픈 괴리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입력 : 2017.09.19 03:17
"아파트 값 떨어진다" 특수학교 설립 막고 층간 소음에 칼부림까지
일상에선 '민주' 요원한데 '촛불 혁명' 승리라 한다… 시대는 바뀌지 않았다
이른바 '무릎 꿇은 장애인 엄마' 영상이 우리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이달 초 서울 강서구에서 열린 특수학교 신설 관련 주민 토론회에서 장애아를 둔 엄마 20여명이 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들의 자녀는 대부분 일반 학교에서 이미 고학년이라 특수학교가 생겨도 다닐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이들에게 쏟아진 것은 집값 하락을 우려한 주민들의 거친 비난과 야유였다. 이래저래 지난 15년간 서울에서 공립 특수학교는 하나도 새로 문을 열지 못했다.
비슷한 일은 지난봄 어느 명문대 강의실에서도 일어났다. 학교 측이 '장애인 접근이 어려운 강의실 리스트'를 실수로 잘못 작성하는 바람에 장애인 학생 하나가 일반 강의실에서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담당 교수가 이동 시간이 길어진 장애인 학생을 배려하여 보충수업을 따로 해 주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그 학생은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졸지에 '비양심 민폐 장애인'으로 도배질당했다. 독대(獨對) 수업이 특혜라는 이유에서였다.
가수 싸이가 부른 '강남 스타일'의 뮤직비디오에 나와 멋지게 춤을 추던 여덟 살짜리 소년이 '리틀 싸이'로 불리며 큰 인기를 끈 것은 4~5년 전 일이다. 그런데 최근 방송에 출연한 그는 그동안 주변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미움과 괴롭힘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엄마가 동남아시아 사람이라는 게 화근이었다. 인터넷상에는 '열등 인종 잡종'이라든가 '뿌리부터 쓰레기'라는 식의 비난 댓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교양인, 근대인 또는 세계인 기준에서 한국인의 자격 미달을 지적할 수 있는 사례는 이 밖에도 많다. 납골당이나 쓰레기 처리장 등이 혐오 시설이 된 지는 이미 오래고, 요즘에는 임대주택이나 탈북자 지원 기관까지 기피 시설로 인식되고 있다. 언젠가 대학 부설 어린이집에서 교수 자녀와 직원 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것이 문제 된 적도 있다. 같은 직장이어도 교수와 직원은 다르다는 식의 신분 차별과 '갑질' 행위는 직업과 계층, 이념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 전반에 번져 있다.
하긴 층간 소음이나 주차 문제를 둘러싸고 죽기 살기로 갈등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이를 공동주택 문제로 돌린다면 프랑스 사례 앞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파트 주거 환경 자체만 따지면 파리가 서울보다 더 열악한 편이다. 건물이 낡고 시설이 오래되어 방음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곳 역시 벽간이나 층간 소음 때문에 이웃끼리 밤새 날카로워지기 일쑤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부딪힐 듯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 만나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인사를 나눈다. 그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이런 일로 칼부림까지 벌이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놀라운 것은 이런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 모습의 우리나라가 이른바 '촛불 민주주의'의 기적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촛불 민주주의'와 상관없이 사람들 간의 적의와 혐오, 증오와 독심(毒心)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불변이라는 점이다. 바로 이것이 '참여 민주주의의 승리' '아시아 최초의 명예혁명' '21세기판 프랑스혁명' '공화국 가치의 복원'으로 곧잘 찬미하는 2016~17년 촛불 시위 이면의 불편한 진실이다.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 사이의 이런 모순과 괴리는 촛불 민주주의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촛불 혁명'이라는 거창한 수사(修辭)에도 세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시대도 바뀌지 않았고 사람도 바뀌지 않았다. 최근 방한한 세계적 민주주의 이론가 필립 슈미터의 지적처럼 그저 "또 다른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았을 뿐"이다. '촛불 혁명'을 계기로 모든 국민이 갑자기 '천사표'로 변한 것도 아니고, 국민 모두가 일제히 '같은 배'로 갈아탄 것도 아니다. 지난날 시민 의식 계몽을 위한 각종 집단 행사나 가두 캠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게 우리의 경험칙(經驗則)이다.
우리 자신을 비하하려는 것도 아니고, 촛불 집회를 폄하하려는 뜻도 아니다. 본디 인간은 모순적 존재고 세상은 복잡한 구조이며 역사는 누적적 과정인 법이다. '촛불 민심'으로 모든 게 단순화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정신'으로 모든 게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촛불 민주주의' 전후로 양분되지 않는다. '촛불 정부'는 파국 직전 신(神)이 무대로 내려준 결정적 해결사,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가 아니다. 그럼에도 계속 촛불에 갇히면 정권의 미래도, 나라의 미래도 함께 닫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18/20170918027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