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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서울 대전 국제신문

modory 2019. 1. 2. 07:25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랜섬박스 /류휘석

 

내겐 매일 허들을 넘다 실패하는 광대들이 살아요 


불필요한 기념일이 빼곡한 달력, 숨 쉴 날이 없어요
나 대신 종이에 누워 숨 쉬는 사람들
밤이 되면 광대는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허들을 치우고 부서진 광대들을 주워 종이 상자에 집어넣습니다
그늘을 뿌리는 거대한 인공 나무, 물을 줘요 잘 자라서 더 크고 뾰족한 허들을 만들어내렴

그렇지만 모든 게 나보다 커져서는 안 돼,

 

 

광대들은 일도 하지 않고 아침마다 이불을 걷어냅니다 나는 토스트처럼 튀어 올라 침실을 접어 내던져요 나를 어지럽히는 벽시계와 발목에 생긴 작은 구멍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커집니다

방이 비좁아서 나는 밖에 있습니다 밖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상자를 만들어야 해요 재사용 종이는 거칠고 단단해서 반성에 알맞습니다
천장에 붙어 기웃거리는 가녀리고 얇은 나의 광대들
반성이 시작된 집은 무덤 냄새가 나는 요람 같아요

나는 탄생부터 기워온 주머니를 뒤집습니다 바닥은 먼지로 가득찹니다
도무지 채워지질 않는 상자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실패와 실종

내가 죽으면 광대들은 허들을 넘을까요
궁금해서 죽지도 못합니다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심사평]

실패·실종을 겪은 자만이 그릴 수 있는 우리시대 음화

심사위원 안도현·나희덕 시인.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비슷한 수준이어서 우열을 가르기가 쉽지 않았다그중에서 랜덤 박스’, ‘앞의 감정’, ‘요르단에서 온 편지등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논의를 거듭할수록 언어적 테크닉이 승한 시보다는 고유한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시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졌다.
   ‘요르단에서 온 편지6편은 이국적인 소재나 배경, 동화적 상상력을 통해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빚어낸다.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먼 극지나 태고의 시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과 리듬에만 주로 의지하다보니 소품에 그치는 느낌이 들었다.
  ‘앞의 감정2편은 시어를 다루는 숙련된 솜씨와 구어체의 다정한 문장들 덕분에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런데 그 유려한 문장들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잘 잡히지 않았고, 기시감이 느껴지는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언어 뒤에 인식의 충격이나 여운이 좀더 있으면 좋겠다.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당선소감]

 눈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 고맙습니다

오후가 끝나가고 있을 때 전화를 받았다. 광고 전화인 줄 알았다. 오랜 불면 탓에 힘없는 목소리로 받았던 게 마음에 걸린다.졸업을 앞둔 상태라 걱정이 많았다. 두꺼운 불안이 나를 감싸고 끝없이 진동하는 기분 속에서, 나는 내내 깨어 뭐라도 해야 하는 사람.

류휘석 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자

뭐라도 읽고, 뭐라도 써서, 뭐라도 되어야만 하는 사람. 녹음된 내 목소리는 여전히 사랑하기 어렵지만 아주 조금은 허락을 받은 것 같아서 기쁘다

  매 순간 후회되는 일이 많아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다. 집을 사게 된다면, 넓은 베란다가 있는 집을 사서 세상에서 제일 긴 빨랫줄을 이어야지. 슬픈 사람들을 건져 널어둬야지. 잘 마르고 잘 개지는 사람들그것들을 다 게워낸 후에는 편히 잘 수 있을까.

미안합니다. 건강해지겠습니다.

못난 아들 끝까지 믿어주신 부모님 감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누나 많이 챙겨줘서 고마워.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신 어주신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님들. 감사드립니다. 더 믿고 의지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기가 되어준 동기들, 고맙다. 잠든 저를 깨워 차에 태우고 백일장에 데려갔던, 잘하고 있다고 매번 말해줬던 여러 선배님 감사합니다. 항상 응원하고 자존감 채워주는 후배들, 고맙고 사랑해. 그리고 서산 친구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고맙고 사랑한다.


정말 힘들 때 어깨를 두드려주신 심사위원 나희덕, 안도현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배울 게 아직 많은 저에게 더 많이 혼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학예회. 너희들이 없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어. 더 열심히 써서 덜 우울해지자.
류휘석 1994년 충남 서산 출생 단국대 문예창작과 졸업 예정 

[출처]2019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류휘석의 <랜섬박스>

 

[2019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임호

 

출근길,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은행알들이 비좁은 그녀의 구두에 밟혀 터진다

 

"헬로 에브리바디~ 근데 내가 좀 바쁘거든요~!"

 

우리의 그녀는 바쁘다

우리의 그녀는 뛰지 않을 수 없다

어깨에 당겨 맨 앙증맞은 가방엔

있어야 할 약간의 센스와

없어도 될 약간의 의심을 담고

우리의 그녀는 뛴다

한꺼번에 많이 벌릴 수 없어 조금씩 뛴다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을 만큼씩 뛴다

먹이를 쪼는 비둘기처럼 뒤뚱거리며 뛴다

그녀는 뛴다

늦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모자라지 않기 위해, 같아지기 위해?

 

그녀의 치마는 그녀가 선택할 수 없는 바람에 흩날리고

그녀의 가슴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안도로 출렁이고

그녀의 쇄골은 떡볶이처럼 흐느적거리고

그녀의 뺨은 뿌듯함으로 달아오른다

 

우리는 이런 그녀를 흐믓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그녀의 페이트런

그녀의 협잡꾼, 그녀의 앞잡이

상처의 방향이 다를 뿐

우리는 한 이불에서 뛰기 시작했다

누가 그녀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명랑한 그녀의 부주의를

누가 그녀를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자꾸만 예뻐지는 그녀의 미래를

누가 그녀를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녀만의 달콤한 모멸을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피앙세

도려낸 시간에서 흐르는 육즙을 받아 마시며

저 푸른 초원 위에 녹초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달리다가

돌아와 그녀가 사라진 엘리베이터앞에 앉아

포크를 움켜쥐고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는 모두

그녀의 그녀

임호_66년 경기 평택 출생, 경기 고양 거주.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 한국예탁결제원 재직 중

 

시 부문 심사평

 

예심을 거쳐 모두 열여섯 분의 작품이 본심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서정시를 짓는 언어에 대한 충분한 수련이 느껴졌다.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신춘문예용이라거나 언어적 공교함에 머물러 있다거나 하는 문학상 심사평의 많은 말들도 실은 일정한 수준에 오른 작품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 중 본격적인 논의 대상으로 세 분의 작품을 먼저 골라 냈다. 떨림」 「연어를 읽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세 편이 그것이다.

떨림은 사물들에 대한 정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관찰력은 세계의 보이지 않는 면모에 대한 상상과 통할 터인데, 이는 서정시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 작품이 주목된 것은 그 능력을 기이한 세계나 어색한 낯설음으로 몰아가지 않고 응모자 자신의 독특한 정서로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독특한 정서가 관념의 아득한 아우라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 관념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응모자 자신의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우려하였다. 연어를 읽다는 세계의 생명과 그것의 순환을 생태주의라는 이념에 실어 묘사한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이 상상력은 시의 언어가 곧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이념에 연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아름답다. 시의 편에서 보면 그 상상력은 설명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연이 그에 대한 우려를 갖게 했다. 시를 이완시키는 해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는 언어의 공교함이나 감각적 이미지 제작 능력에 있어서는 위 두 작품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이 응모자만의 세계와 시각이 살아 있다. 출근길의 조바심을 현대인 모두의 조바심으로 확장시키는 시의 진술들에는 경쾌하고 맑은 삶이 들어 있는데, 시의 언어에는 가벼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늦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모자라지 않기 위해, 같아지기 위해"라는 구절은 저 가벼움과 삶의 비애를 적절히 결합시키는 언어적 능력과 정서 조절의 방법을 잘 보여준다. 심사위원들은 이 새로운 경쾌함과 비애에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하였다.

심사위원 이시영·박수연

 

2019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 / 이규정

 

 

그는 서류들을 한 코에 제압하고 있다.

바람의 두께에 따라 뒤집어질 수도 있지만

이미 꿰인 코는 염기서열을 갖는다.

하얀 낱장에 뼈대를 두고 있는 얼굴들

 

묶인 것으로 질서가 된 몸이지만

위아래 각을 맞추는 것은 복종의 의미

자세를 낮추고 하나의 각도와 눈높이로 사열되어

제왕에 예의를 갖추듯 손발을 맞추고 있다.

 

어떤 묶음도 첫 장 머리에서 움직이고

펄럭이는 팔과 다리를 갖게 된다.

간혹 흩어질까 묶인 것들끼리 권이 된다.

날개를 갖고 있어도

그 손에 한 번 잡히면 그만이다

 

입이란 하나의 입구

무엇이 채워졌을 때

뜬구름이라도 소화하게 만든다.

솜사탕과 뜬 구름은 종이 한 장 차이

단정하게 정리된 그의 입에

꽉 물려서 봉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적 있다.

흐트러진 낱장들을 함구시키며 제압하는
따악, 그 소리

 

일침으로 조용히 봉할 줄 아는 그는
서류의 제왕이다.

당선 소감

 

  당선! 전화 받는 순간 기쁨과 떨림이 한 마당이었다. 한강 불빛이 명랑하게 보였다. 콩나물시루가 된 퇴근길 전철, 덜컹덜컹. 전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전철이 말꼬리를 자꾸 잘라 결국 내린 역이 동작역. 귀퉁이에 구겨진 그림자를 깔고 앉아 당선 소식을 이어서 들었다.

  

  바람의 꼬리를 잘 살펴야 귀담아들을 수 있는 말들. 한강 요란한 불빛도 함구하며 그 뒤꿈치를 들어주고 있었다.

 

  웃음을 찾기 위해 선택한 문학. 여러 번의 최종심과 여러 번의 낙선을 반복하면서 나에게나 가족에게나 어려운 시간이 많았다. 24살 때 처음 투고했던 신춘문예. 너무 멀리 와서 당선 통보를 받았지만, 오는 동안 무형으로 반짝이는 시 한 편이 늘 동행해줬었다.

 

  구십 넘은 노모가 눈물을 흘리셨다. 아내는 바보같이 내 눈을 피했지만, 울먹이는 말투가 조금씩 감정을 넘쳤다. 길고 긴 장거리 마라톤을 뛴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결승선을 무시하고 계속 달릴 것이다. 영영 없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결승선을 향해 뛸 것이다.

 

  문학의 장도에 길을 내어주신 국제신문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위원 성선경 선생님, 이정록 선생님, 문태준 선생님, 큰절 올립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전문과정 교수님들, 반 친구들 가물가물하지만 기쁨을 나누고 싶다.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사랑하는 가족, 특히 아내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낱장이 권이 될 때까지 써서 그 제왕 앞에 웃을 수 있는 큰 시인이 되겠다.

1953년 경기도 안성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과정 수료

[2019 신춘문예] 시 심사평
오랜 詩作 경험 엿보이는 상상력 돋보여

 

  심사위원들은 시의 원형을 새롭게 제시하는, 혈기 넘치는 시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탄력이 있고 개성이 넘치면서 새로운 안목을 펼쳐주는 시를 기대했다. 그래서 기시감이 있거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시편은 후한 점수를 주지 못했다. 당선작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들의 수준은 높았다.
    
  ‘바다 경매2, ‘가내수공업4, ‘계단의 전개4, ‘스테이플러 씨3편을 놓고 토론을 이어갔다. ‘바다 경매2편의 시편 가운데서는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을 주목해서 읽었다. 꽃과 잎의 세월을 다 보낸 연의 뿌리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발견한 대목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만, 함께 보내온 두 작품의 수준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가내수공업4편은 생활의 감각이 돋보였다. 노동 등 육체를 움직여 일하는 사람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 “한 줌 삭힌 콩나물에는 한 사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와 같은 표현에서 보듯 감정이 흘러넘치는 점이 눈에 띄었다. ‘계단의 전개4편 가운데서는 매미의 시간이 단연 두드러져 보였다. 매미의 허물을 대낮의 시간이 벗어던진 투명한 흔적이라고 쓴 점은 매우 신선했지만, 이 작품 이외엔 평범한 수준이었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스테이플러 씨3편 가운데 스테이플러 씨를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은 고른 수준이었다. 시행이 앞뒤로 결속되고 보완되거나, 시행이 상상력을 통해 훌쩍 넘어서면서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광경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시편들이었다. 그만큼 오랜 시작(詩作)의 경험이 엿보였다. 당선작 스테이플러 씨는 서류를 철하는 도구를 시적 대상으로 다루지만, 의미는 중층적으로 읽힌다. 철심이 박힌 서류 낱장에서 나약한 개인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은 자본사회의 냉담한 구조 안에 강압적으로 편입되고 규율되는 개인이 느낄 공포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로써 스테이플러는 사물 차원을 넘어서는 상징체로 거듭난다. 좋은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해 시단에 새롭고 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출처]2019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스테이플러 씨 / 이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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