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김정일을 만난 남북 정상회담은 돈으로 산 것이었다. 당시 주역들 줄줄이 사법처리 된 그 문제를 돌아본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인 2003년 3월 대북 송금 특검에서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4억5000만 달러를 북한에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특검팀은 “돈이 정상회담 전에 모두 송금됐고 송금 과정에 정부가 적극 개입하였으며 국민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비밀리에 송금함으로써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았다”며 “따라서 (이 돈과) 정상회담의 연관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특검 수사로 “6·15정상회담은 돈 주고 산 것 아니냐”는 비판 여론이 비등해졌다. 정상회담의 주역들은 줄줄이 사법 처리 대상에 올랐다.
회담 성사의 주역이었던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당시 정부가 부담하기로 한 대북 지원금 1억 달러를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에게 대신 지급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 대신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 원을 대출해 주도록 압력을 행사한 사실도 특검에 의해 밝혀졌다.
박 전 장관은 결국 2003년 대북 송금 및 산업은행 불법 대출 알선, 현대 비자금 150억 원 수수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그는 지난해 5월에는 비자금 수수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됐다. 같은 해 11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된 후 올해 2월 사면됐다.
또 다른 주역인 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역시 이 사건에 연루돼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임 전 원장은 2004년 5월 사면 복권됐다.
특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임 전 원장은 2000년 5월 31일 박 전 장관, 이기호 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과 함께 정상회담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현대에 대한 특별 지원을 결정했다.
이 전 수석은 이 자리에서 일반대출보다 금리가 싼 남북경제협력기금으로 현대를 지원하자고 제안했지만 박 전 장관과 임 전 원장은 “그렇게 하면 국회 동의 절차가 필요하므로 곤란하다”고 지적한 후 결국 산업은행에 대출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정상회담 성사를 뒷받침했던 정몽헌 회장은 검찰에서 현대 비자금 사건으로 조사받던 2003년 8월 서울 현대 계동사옥 12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저를 여러분이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그는 비자금 150억 원을 박 전 장관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돈으로 산 김대중 김정일 회담은 이후 두 정상이 합의한 사항들은 얼마나 이행됐을까.
6·15 남북공동선언의 이행 정도에 대해 전문가들은 “그럭저럭 이뤄졌다” “내실이 없다”는 등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어찌 되었거나 6·15이후 대북지원액은 1조4000억→ 6조5000억→ 9조∼14조?으로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김대중이만 6·15정상회담 성사 등 남북한 평화 구축에 기여한 공로로 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 노벨상도 돈으로 샀다는 것이 여론의 주축이다.
6·15공동선언은 모두 5개항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통일 원칙을 담은 1항은 추상적인 선언이라 이행 수준을 계량화하기 어렵다.
다만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1항에 대해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는 이 합의가 실제 북핵 문제 등을 푸는 데 별 역할은 못하면서 남남갈등과 한미 관계 이견을 불러오는 요소가 됐다”며 낮게 평가했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등 통일 방법을 다룬 2항은 6·15공동선언 이후 거의 논의가 되지 않았다. 민감한 사안이라 남북 모두 이 문제를 공론화하길 꺼린 탓이다.
이산가족 방문과 장기수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한 3항과 경제·사회·문화 교류 활성화에 관한 내용인 4항은 어느 정도 이행됐다는 평가가 많다.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 8월 남북 이산가족 대면상봉이 이뤄진 데 이어 올해까지 모두 15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이 이뤄지고 남북 간 연간 교역액이 10억 달러에 달하는 등 남북 경협 규모는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강성윤 동국대 교수는 “3, 4항 이행은 정치적인 영향으로 중단되는 일이 잦아 실망을 많이 줬고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제도화되지 못했다”며 이를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했다.
당국 간 교류를 담은 5항과 관련해 장관급 회담이 21차례 걸쳐 개최되고 군사당국자 회담과 각종 실무 회담이 지속적으로 열리는 등 외적으로는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장관급 회담의 합의 결과가 ‘재탕’인 것들이 상당수이고 실질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남북은 2000년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해서도 합의했으나 이는 현재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남측은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요청했지만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는 것으로 합의됐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김대중 정부는 이 조항 이행을 1년 내에 가까운 시기로 봤던 것 같다. 노무현 정부는 ‘상대가 응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상회담에 응하겠다’며 이 조항의 구속력을 풀었다”고 말했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6·15공동선언의 실천에 대해 “1, 2항에 대해서는 평가가 어렵고 3, 4, 5항은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이행됐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 교수는 “총론은 그럭저럭 진행해 왔지만 각론으로 보면 내실이 없다”며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한 건 뭐라고 봐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남북 정상 회담이 또 이뤄졌지만 국민들은 기대보다 돈을 얼마나 주고 이뤄지게 했으며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바람에 북한의 김정일이 끌어드리려는 속셈이 보인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