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뉴스모자이크

노무현씨의 종말

modory 2009. 5. 23. 13:58


노무현 자살로 생을 마감


노무현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지만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63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만의 '원칙'과 지역주의에 항거한다고 했지만
가난으로 비틀어진 성격대로 만용을 부리며 살았다.  
정치개혁을 외치고  '깨끗한 정치'를 부르짖었지만 진정한 정치 개혁도 아니고
국민들 편 가르기에 열을 올렸고 깨끗한 정치를 외치며 그는 치부에 정신없었다.
인권 변호사라고 말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향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여러 번 낙선하였다.
대통령의 당선은 전라도에서 신격화 된 김대중의 후광에 그의 돈키호테 같은
성격이 일으킨 바람 탓이었다.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의 꿈을 일찌감치 접고 부산상고에 진학했고 
수차례 도전 끝에 법관이 되었고 7개월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로 전직했다. 
그의 학력이나 걸어 온 길을 보면 대통령이라는 큰 그릇은 못 되었다. 
마누라도 마찬가지.
호남에 지역기반을 둔 민주당의 영남 출신 대선후보, 국회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 헌정사상 첫 대통령 등 그의 정치역정은 
그야말로 파격과 기록, 그 자체였다. 
인권 변호사라는 이름을 달고 소외받는 노동자와 학생들의 편에 서서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노무현은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 사건을 통해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다. 
당시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지만 돈키호테 같은 
용기를 눈여겨본 김영삼 (金泳三)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측의 권유로 
88년 13대 총선에 출마, 5공 실세였던 허삼수(許三守) 후보를 꺾고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88년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몰아세웠고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씨에게
명패를 집어 던지는 만용을 부린 것이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후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순탄치 못했다. 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손을 뿌리치고 합류를 거부한 뒤 지역주의의 벽에 막혀 
낙선을 거듭하는 등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동시에 영남 출신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한 그의 '소신'은 
대통령의 길로 이끈 최대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98년 보선에서 '김대중 깃발' 아래 종로에 도전,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지역주의 극복을 내세워 고향 부산에 내려갔다가 
 한나라당 허태열 후보에게 고배를 들었다. 
 선동적인 기질을 그는 영.호남 지역주의에 지친 표심을 파고들면서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바람으로 2002년 대선에서
허위 선전에 빠진 이회창을 누르고 대통령이 됐다.
그의 장인이 남노당원이었는데 이것이 쟁점화되자 오히려 마누라를 
버리란 말인가하며 역습을 하여 호남 지지 세력으로 청와대 입성의
 '기적'을 이뤄냈다. 
그의 만용은 대통령 재임 중에도 옛 정치의 반동에 맞서며 그 위력을
부렸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권이 여소야대 구도에서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 등 선거법 위반 혐의를 걸어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되레 메가톤급 역풍을 불렀고, 
결국 제3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의 의회 독주에 제동을 걸며 
과반을 차지하는 제2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정치, 경제, 대북관계 등 거의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그는   
무모하게 보이는 정치 실험은 그칠 줄 몰랐고, 하루가 멀다하고 계속되는 
청와대발 충격 발언은 민심이반과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급전직하로 
이어지면서 오히려 국정 난맥상을 야기한 자충수가 됐다. 
거듭된 재보선 전패로 의회 과반을 잃고 뿌리채 흔들리던 열린우리당은 
결국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참패했다. 
사실상 국정운영의 동력을 상실, 조기 레임덕에 빠지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의해 
일언지하에 외면당했다. 
급진적 개혁정책으로 사회 전반에 피로감이 누적되는 와중에 아파트값 
급등과 북한 핵실험 사태 등이 맞물리면서 여당 내부에서 탈당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정치적 동지'들마저 돌렸다. 
노무현은 정국 타개책으로 4년 연임제 개헌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들고 
나왔지만 역시 한나라당의 거부로 뜻을 접어야 했다. 
국내 정치는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남북 화해협력한답시고 8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뒷 돈 얼마를 갖다 바치고 김정일을 만났느냐는 비난이 더 컸다. 
대통령 권좌에 있는 동안에도 바람 잘 날 없었지만 퇴임 후 불거진 박연차 
뇌물 게이트는 노 전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자산이었던 도덕성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그를 '사지'로 몰고 갔다. 
퇴임 전 입버릇처럼 "농촌으로 돌아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런 약속은 헌신 벗어던지듯 버리고 
고향에다 아방궁 같은 집을 짓고 인터넷을 통해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며 한 몫하고자 기웃거리다가 뇌물로 친형 건평씨와 
부인 권양숙씨마저 수뢰 혐의로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고 그도 검찰에 
불려가는 수모를 겪는 중에 자살했다.
국가 보위의 책임이 있는 대통령이 주적인 북한에 찾아가 굽실거렸고
국민들은 편가르기로 지리멸렬케 했다.
뇌물 먹으면 패가망신한다든 그가 뇌물을 먹었다. 물론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아내가 안다고 했지만 ...
아들, 딸, 사위, 마누라, 형 일가가 뇌물에 얽혀 있다.
죽음으로 속죄한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