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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형식 -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modory 2009. 6. 1. 22:00

[중앙일보] 송호근 칼럼- 운명의 형식 - 2009년6월1일

건강 회복을 책임진 주치의가 자신에게 사망선고를 내려야 하는
이 반전의 비극을 운명 아닌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지난주 우리는 전직 대통령을 보냈다. 그것은 흉상(凶喪)이었다. 예고 없이 날아든 부고의 낯섦은 다소 소멸되었는데, 비극적 결말로 치달아야 했던 필연적 이유에 대해서는 점점 생소해졌다. 그렇게 보낸 주말, 밤새 뒤척인 시간과는 상관없이 새벽은 왔다.

필자의 생애에 비운에 간 두 명의 대통령을 기억한다. 박정희와 노무현. 고 박정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국가와 사회를 엄격히 규율하고 행동지침까지 하달했던 그 사람이 ‘유고(有故)’로 끝맺은 그 청명한 가을의 방송 멘트를 나는 믿지 못했다. 몇 개월이 걸려서야 그의 부재를 실감했다.

고 노무현은 그냥 저렇게 죽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아마, 노무현의 부재를 인정하는 데 또 몇 개월이 걸릴 것이다.
그의 업적을 칭송해서가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그 유별난 산고(産苦)를 온몸에 각인한 채 태어난 정치인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유서를 속으로 읽었다. 간결한 문장이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순간들과 겹쳐 단막극처럼 재생되는 것을 밤새 막을 수 없었다. 유서의 화두, ‘운명이다’라는 이 마지막 구절은 무엇을 응축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응시하는가.

답을 얻으려면 ‘고향마을, 대통령 사저, 부엉이바위’로 구성된 마지막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가볍게 집을 나선 대통령은 등산로로 향한다. 새벽이 밝는다. 정토원에 잠시 들러 부모님께 하직인사를 올린다. 그러곤, 유년기의 빈곤, 청년기의 방황과 좌절을 지켜봐온 부엉이바위에 오른다. 날이 밝고 있다. 자연이 상승하는 새벽, 그는 하강을 준비한다. 잠시 생각에 잠긴다. 삶의 세계에서 출구는 하나뿐, 죽어서 사는 것. 그 출구를 열고 낙하한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고 자신과 뭇사람을 타이른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가족·지인들과 추종집단들에 당부한다. 30m 하강의 도달점이 보인다. 공기의 중력을 거슬러 떨어져 내린 3초 동안 이렇게 규정한다. ‘운명이다.’ 해는 떠올랐고, 그의 몸은 종착점과 충돌한다. 운명이다 - 내면의 절규가 새벽 공기를 잠시 흔들다 소멸된다.

바로 이것, 역류가 불러온 역풍의 시말서, 역풍 속에 점멸하는 추락의 손짓, 상승과 하강의 교차가 ‘운명’이라는 관념어로 수렴되었다. 군부독재와 보수적 지배세력으로 일관된 한국 정치사의 진보 결핍증을 잠시 메우고, 주류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보고자 했던 풍운아적 정치인이 걸어간 이 ‘운명의 형식’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적어도 그의 당선 자체는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한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신호였다.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는 민도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건강 회복의 주치의가 결국 자신에게 사망선고를 내려야 하는 이 반전의 비극을 ‘운명’ 아닌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그의 통치는 실정(失政)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추모 인파가 무한정 모여드는 이 희한한 사회심리적 현상은 민주주의의 훼손 가능성을 우려하는 집단무의식의 발로다. 핵심은 현 정권이 가장 약한 부분, 진정성에 있다. 긴 줄로 늘어선 조문행렬은 실패여서 더욱 애달픈 서민정치에 대한 향수이며, 속절없이 쏟아진 애도의 눈물은 어설펐으나 솔직하고 투박했던 통치자의 비정한 선택이 야속하다는 하소연이었다. 유서로 눌러놓은 사화(史禍)적 스토리가 노제(路祭)의 곡소리로도 해원(解寃)되지 않는데, 손상된 상징을 복권시키려는 세력과 출렁이는 민심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또 한 세력의 숨죽인 순간들이 교차되고 있다. 해방 후 초유의 사건에 대한 이질적 시선들이 충돌하는 이 긴장된 정국을 통합과 화합의 계기로 바꾸자는 세련된 제안이 세간의 공명을 얻으려면 ‘운명의 형식’을 짜고 있는 씨줄과 날줄을 올올이 풀어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운명이다’로 끝맺은 그 처연한 고별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파란만장했던 역류의 인생을 마감한다는 결기 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겪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함정을 말하려 했는가.
깨끗하고자 했지만 결국 손을 더럽혔고, 친인척 비리와 측근 단속에도 실패했다는 것. 약자를 대변하고 소외된 가치를 주창했지만, 결국 고립을 자초했다는 것. 그는 한국정치에 내장된 구렁텅이에 자신을 던지는 것으로 운명에 답했다. 그 생명공양(生命供養)의 대가로 우리는 한국정치를 직조하는 ‘운명의 형식’에 대해 눈을 번쩍 뜨게 되는 것이다. 유별난 싸움꾼이자 독설가였던 저돌적 정치인, 차별 없는 세상과 도덕정치를 꿈꿨던 통치자가 내몰렸던 마지막 벼랑, 그 벼랑에서 맞닥뜨렸던 운명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사람들은 그를 묻고 돌아선 다음 들여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