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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방송 제작 의도가 무엇일까?

modory 2009. 6. 21. 13:36

[조선일보 시론] '적개심' 때문에 쓰러진 소

  • 윤석민 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과

2009.06.19

▲ 윤석민 서울대교수·언론정보학과

글이나 영상물에서 누구나 쉽게 인식할 수 있게끔 겉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부호들을 '드러난 부호',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게끔 은밀히 제시되고 있는 부호를 '숨겨진 부호'라고 한다.

메시지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14ea14aj8ea 7a87aj8…" 같은 암호도 일종의 숨겨진 부호다. 하지만 암호는 부호의 존재가 겉으로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숨겨진 부호의 초보적 형태다. 더욱 관심을 끄는 건 존재 자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부호들이다. 영상물의 경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놓치게 되는 화면상의 작은 소품, 카메오로 통칭되는 유명인 엑스트라, 인간의 통상적인 지각능력으로 인식하기 어려운 텍스트(예를 들어 순식간에 지나가는 글씨나 장면)를 예로 들 수 있다.

숨겨진 부호 이야기는 종종 흥미로운 대중 오락물의 소재가 되곤 한다. 소설 '다빈치 코드'가 그 대표적 사례다. 저자 댄 브라운(Dan Brown)에 따르면 놀랍게도 디즈니 만화영화들 역시 이러한 은밀한 부호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영화 '인어공주'의 바다 속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잃어버린 거룩한 여성을 상징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라이온 킹'에서 심바의 머리 위를 떠도는 먼지조각을 정지시키면 섹스(sex)라는 글자가 떠 있는 프레임이 들어 있다고 한다.

지난해 초, 평양에서 공연을 가진 뉴욕필은 김정일 위원장과 북한체제를 은밀히 상징하는 연주곡으로 화제를 모았다. 조르주 비제의 '아를의 여인'과 레너드 번스타인의 '캔디드'가 그것이다. '아를의 여인'이란 어떤 장소나 상황에 나타날 예정이었으나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뉴욕필은 김정일 위원장이 음악회장에 끝내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 앙코르곡으로 이 곡을 연주했다. '캔디드'는 엄청난 재앙을 겪으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을 행복한 존재로 여기는 볼테르 원작 풍자소설의 주인공이다. 그가 누굴 암시하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며칠 전 원주시가 발행하는 시정 홍보지에서 이러한 사례들에 버금가는, 하지만 질적으로 저급하고 불온하기 이를 데 없는 숨겨진 부호가 확인되어 구설수에 올랐다. 이를 그린 시사만화가는 상형문자 문양형태로 비석 기단에 현직 대통령에 대한 적나라한 욕설을 삽입하였다.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홍보지가 2만여부 인쇄되어 배포된 다음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말 그대로 쓰게 웃어넘길 해프닝이었다, PD수첩 광우병 프로그램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에서 밝혀진 사실에 비한다면.

방송 저널리즘은 영상이 주는 강력한 감성적 효과, 현장성과 사실성의 착시효과로 인해 중립성, 객관성, 공정성을 담보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방송 저널리즘은 그 어떤 저널리즘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PD수첩 광우병 프로그램은 그 정반대였다. 신중해야 할 부분에서 허술했고, 무리하게 앞서 갔으며, 단정을 서슴지 않았다. 사실과 검증 이전에 예단과 주장이 있었다. 이를 위해 사실은 의도적으로 잘라지고 붙여지고 때로 왜곡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이 이렇게 만들어진 의도를 궁금해했다. 국민 건강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더욱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하지만 공포심을 증폭시키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장면 속에 숨겨진 부호는 다름 아닌 적개심이었다. 소들이 쓰러지고, 딸을 앞서 보낸 가족들이 흐느끼고, 위험에 노출된 자녀들 때문에 격분한 학부모들의 모습을 드러낸 장면들은 결국 더도 덜도 아닌 사적 증오의 부호들이었던 것이다.

"적개심을 풀 방법을 찾아 미친 듯이 뒷조사를 하고…" "어찌나 광적으로 일을 했던지…" "출범 100일 된 정권의 정치적 생명줄을 끊어놓고…", 아찔하고 무서운 진실의 확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