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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없는 한국 - 중앙일보에서

modory 2009. 7. 25. 10:38

 [중앙일보 조우석 칼럼] ‘아비 없는 사회’ 대한민국

2009.07.25 (토)

 “역사소설이 나왔다하면 왜 꼭 『장길산』 『임꺽정』이어야 하지? 의적(義賊)이네 뭐네 하지만 결국 도둑 이야기잖아? 조선조의 『홍길동전』만 해도 그렇고…. 모든 사회에는 주류가 건재하고, 아웃사이더가 따로 있는 법인데, 우리는 정반대야. 따르고 배울 롤 모델을 세우기보다는 있는 것도 마구 허물어뜨리는 네거티브 상상력의 힘이 너무나 크고 견고해.”

한 출판사 대표가 친구인 소설가·영화감독 이창동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창동이 무릎을 쳤다. “그 얘기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하지 마. 내가 할래”하고 다짐하듯 말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벌써 10년 전 나눴던 대화인데, 이후 그가 그 쪽 작업을 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본 바 없다. 그 얘기를 들려주던 출판사 대표는 “결국 이 나라는 아비 없는 나라”라면서 쓴 소주를 들이켰다. 얼마 전 고미숙의 신간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을 보며 그 얘기가 퍼뜩 생각났다. 그 책 자체야 훌륭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비 없는 나라’에서 또 하나의 도둑 이야기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문학·출판뿐인가?

도둑 이야기는 TV드라마·영화로도 뻔질 나는데, 반면
한국사회에서 진정한 영웅 이야기는 없다시피 하다. 근·현대 인물을 대상으로 쓴 책 중 지적(知的) 권위와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는 단행본은 드물다.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등 건국의 아버지 이야기에 매료되는 미국사회와 너무 대조적이다. 이웃 일본과도 다르다. 메이지의 영웅 사카모토 료마를 다룬 시바 료타료의 『료마가 간다』등은 오랜 스테디셀러다. 후쿠자와 유기치 책도 부지기수다. 영웅의 삶을 롤 모델이자 거울로 삼아 현재와 자신을 비춰보는 것이다.

영웅 스토리란 결국은 사회통합의 상징이 아니던가? 어떤 추상적 이념이나 구호보다도 설득력이 크고 가슴에 스며들며, 그 사회의 중심축이라서 비유컨대 ‘아비’다. 오해 마시라. 장길산·임꺽정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제안이 아니다. 반(反)영웅·유사(類似) 영웅 이야기가 10개라면, 중심부의 영웅 이야기는 100개쯤 너끈히 있어야 옳다. 지금 이 사회 제도권·기성질서에 대한 불신에서 공권력 부재란 결국 ‘아비 없는 사회’의 불안과 허무주의를 반영한다.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근·현대사의 굴곡이 심했는데, 영웅이 있을 턱이 있나?” 그런 시선은 이 땅에서 펼쳐졌던 숱한 아비들의 힘들었던 삶을 외로 꼬고 보는 자기모멸에 불과하다. 비판적 성찰이 아니라 헛된 내출혈의 구조다.
결과적으로 도둑 이야기, 유사 영웅만을 읽는 사회는 분노와 자기모욕으로 어지럽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자녀에게 뭘 가르치겠다는 말인가. 이 사회를 만든 문화영웅·경제영웅·정치영웅의 삶을 기억해주는 도서상품, 그게 진정 화급하다. 어쩌면 변동기 한국문화의 최대 현안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