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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평가

modory 2009. 8. 24. 14:28

●김대중에 대한 평가● - 다움 백과 위키에서

◆의혹

▼출생에 대한 의혹

김대중의 출생에 대해선 생부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혹이 있다. 월간조선 2005년 1월호에 보도된 손창식과의 인터뷰에 의하면 10년간 김대중의 가계를 추적한 결과 김대중의 실제 성은 제갈씨이며 생부는 제갈성조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손창식은 이 주장에 대해 김대중의 생모 장노도가 그녀의 부친 장지숙 호적에 재입적 된 시기가 김대중의 출생 전후로 이루어졌다는 점. 김대중의 부친 김운식과 모친 장노도가 혼인한 년도가 김대중이 30대 중반이던 1960년이라는 점. 김대중이 1971년 유세 도중 밝힌 자신의 띠와 호적에 등재된 생년상의 띠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40]

한편, 1988년 9월경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의 대외비 문서에서도 김대중의 출생시기는 1923년이며, 그해 김운식에게 서자로 입적되어 1943년에 생년이 1925년으로 정정된 것으로 조사되어있다. 또한 1960년 6월 5일 김운식과 장노도의 혼인으로 서자에서 적자로 호적이 정리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김대중의 실제 아버지를 尹모씨로 증언하는 등 출생 혈통이 불분명하다고 명시되어 있다.[1]

이에 대해 김대중은 자신의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반박을 한 바 있다. 먼저 모친의 재가에 대해선 재가를 했다고 하더라도 부친이 이를 인정했으면 성씨 문제는 구설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로 호적 문제의 경우 그 당시는 혼인과 출생년도에 관련한 호적 처리가 미흡하거나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로 자신의 나이에 대해선 일제시대 징용을 피하기 위해 그의 부친인 김운식과 논의하여, 나이를 늦추었다고 밝혔다.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

1970년, 당시 40대의 김대중은 20대의 요정 종업원과의 부적절한 혼외정사로 사생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오랫동안 근거없는 소문으로 치부되어 왔다. 하지만 2005년 SBS 《뉴스추적》에서 진승현 게이트를 취재하면서 자신을 김대중의 숨겨진 딸이라 주장하는 사람과의 인터뷰가 공개되자 사생아 존재 여부가 다시 수면위로 떠올랐다. SBS의 취재에 의하면 당시 김대중의 장남 김홍일이 모녀의 미국 출국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하자 국가정보원을 동원, 진승현 게이트로 마련한 비자금으로 입막음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김대중의 사생아를 낳은 여인은 자살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SBS의 보도에 김대중 측에선 "사실과 다르다"라고 하였으며 김 전 대통령 공보업무를 맡고 있는 최경환 비서관은 “국정원 부분은 방송에 나온 국정원 당사자들조차 모두 부인하지 않았느냐”며 “그런데도 진승현씨 쪽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마치 뭔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게 과연 정확하고 공정한 보도라고 할 수 있는지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김대중 평전을 준비 중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도 사생아 존재 여부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선 낙선과 정계 은퇴까지

1989년 1월 평화민주당 총재 재직시 서울의 주한 일본 대사관저에 설치된 히로히토 일왕의 분향소에 조문한 것이 경향신문에 의해 단독 보도되었다.[14] 1990년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합당 때 3당 야합 반대 투쟁을 선언하며 규탄하였다.

1991년 4월 15일에 평화민주당을 신민주연합당으로 재창당한 뒤 총재에 취임했고, 곧 이기택이 총재로 있던 민주당과 합당하여 통합 민주당을 출범시켰다. 이어 1992년 5월 15일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804만 표를 얻어 190만 표 차로 낙선하고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선거 결과에 승복하여 대선이 있은 다음날인 12월 19일에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긍정적 평가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44]

또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45]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부정적 평가

먼저 후보 단일화 실패와 정계 은퇴 번복에 대한 비판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높았으나,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갈등을 빚다가 야당 후보 단일화 실패로 김대중과 김영삼이 각기 출마해서 결과적으로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것과 1992년의 정계 은퇴 약속을 어기고 1995년에 정계에 복귀한 것에 대해 비판이 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호남에서 90% 이상의 득표를 한 반면, 영남에서 10% 대의 득표를 기록하거나,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해서도 이런 현상이 지속된 것과 관련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이에 대해 호남인들의 저항적 의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주장하는 의식도 있으나 1984년 국회의원 선거까지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이 호남 지역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하는 등 호남 지역이 계속해서 친(親) 정부적인 투표율을 보였음을 볼때 호남인들의 저항의식이 반영된 결과라는 주장은 그다지 신빙성을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는 대선 과정에서 김영삼과 함께 이른바 ‘파벌정치’를 내세워 수시로 정당을 해체 또는 결성을 하여 한국 정치 문화를 퇴색시키고 지역주의를 심화시켰으며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를 겸임하면서 독재세력 청산에 소홀하였고 이렇듯 대부분 크게 해결되지 못한 채 차기 정부의 극복 과제로 남게 되었다. 또한 그가 퇴임 이후에도 정치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호남 세력의 결집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훈수정치’와 ‘지역주의의 화신’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고향인 호남 지역에서도 ‘노욕’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의 본문은 국민의 정부입니다.

또한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햇볕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8년 대포동 1호 미사일 실험,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으며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햇볕정책에 진정성과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견해가 있다.

1999년과 2002년 2번에 걸쳐 일어난 연평해전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도 비판이 되고 있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도중에 일어난 제2연평해전은 아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이 침몰하는 참사를 낳았음에도 이들의 영결식에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해군 합참의장 누구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국가차원에서 첫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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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평화상으로 한국의 위신을 높혔다고 하지만 김정일에게 국고 4억5천만불을 주고 상을 샀다는 비판도 있다.

아무튼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전직 대통령을 國葬으로 치루었다는 것은 이명박정부의 실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