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명희 비목 작사자. 예술원 회원
궁노루 달빛 타고 우는 밤이었다
돌무더기 앞엔 썩은 나무, 탄피와 철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눈부신 하얀
산목련…
이 감흥에 못이겨 탄생한 노래가 비목이다
46년만에 찾아간 그때 그 자리
세월은 흘렀어도 궁노루 울던 백암산 기슭 예나
변함이 없었다
어느 시인은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라며, 산천이 의구(依舊)하다는 표현은 옛 문사들의 공연한 허사(虛辭)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국방부 유해발굴팀과 함께 찾아간 DMZ 비목의 고향 화천의 ‘옛 동산’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청청하게 의구하기만 했다.
용틀임해 내리는 듯한 백암산 능선의 물결도 여전하고, 저만큼 눈앞에 펼쳐지는 김일성고지며 수도고지 등의 북녘 땅 산하들도 한가로운 구름 밑에서 예와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리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북한강 줄기의 그리움 같은 곡선미도 그대로고, 전쟁의 피멍을 싣고 동(東)으로 흘러 북한강에 합쳐지는 굽이굽이 금성천의 지형들도 예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산천의 풍광만이 변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옛 전장(戰場)에 켜켜이 묻혀있는 기막힌 사연들도 내게는 그대로였다.
다만 싱그러운 6월의 청포장(靑布帳)이 이불처럼 두터이 싸고 있어 육안으로만 보이지 않을 뿐 가슴으로는 여전했다.
내가 ROTC 육군소위로 임관해 GP장으로 부임한 때는 정전 후 11년째로, 인근 산과 강에는 온통 전쟁의 잔해들이 즐비했었다. 벌거숭이 비탈에는 수통과 탄피며 철모 등이 나뒹굴었고, 화목용 땔감은 파편투성이었다. 어느 골짜기엔 노란 M1 실탄들이 무더기로 묻혀 있고, 강변 둔덕에는 105밀리 포탄껍데기가 패총(貝塚)처럼 쌓여있었다. 순찰을 돌다 보면 간이무덤 같은 돌무지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채소를 심으려고 삽질을 하면 유골이 나오기 일쑤였다.
남방한계선은 고작 푯말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었고, 군사분계선이라곤 녹슨 철조망 한두 가닥씩 풀숲에 깔려 있었다.
이런 사정이니 그제나 이제나 저들은 툭하면 아군 GP를 습격해오기 일쑤였다. 당시 GP는 저들의 수류탄 투척을 막기 위해 지붕까지 철망으로
망을 쳤고, 밤에도 군화를 신은 채로 잠을 잤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 같은 삼엄한 GP의 분위기와는 달리 눈앞에 펼쳐지는 DMZ의 대자연은 경이로움 그대로였다. 봄이면 선명한 등고선을 그으며 성큼성큼 위로 차오르는 신록의 조화도 신기했고 가을이면 단풍의 물결이 반대로 하강하는 자연의 변모도 진기했다. 높은 산만 섬처럼 띄워놓고 하얀 구름바다를 이룬 새벽녘의 운해(雲海)도 장관이었고, 궁노루 울어 예는 교교한 달밤의 정경도 감탄과 신이(神異), 그 자체였다.
예의 궁노루 우는 달밤이었다. 순찰 길에 은은한 향기 따라 주변을 살펴보니 돌무더기 앞에 팻말 비슷한 나무가 썩어 드러누워 있고 탄피며 철모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사이를 따라 하얀 산목련이 달빛 속에 우뚝했다.
예사롭지 않은 사연임을 직감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산화한 연인의 무덤가를 지켜주는 가련한 여인의 소복한 화신이었다. 긴 세월을 기다리다 지친 순애보의 아낙이 돌아오지 않는 낭군의 차디찬 무덤가를 지켜주는 물망초(勿忘草)요, 망부석(望夫石)이었다. 나는 그날의 감흥을 훗날 ‘비목’이라는 가사로 엮었다.
“초연이 쓸고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닯어/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46년 만에 내 마음의 고향동산을 찾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더욱이 함께 간 유해 발굴팀장이 “틀림없는 매장지 같다”는 돌무더기의 그 비목의 주인공들 앞에 서고 보니, 왠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저만큼 우리네 세간의 행태들에 대한 부끄러운 마음부터 앞섰다.
젊은 꿈들이 산화한 옛 격전지의 현장에 서서 멀리 서울 하늘 밑의 추태들을 연상했다. 정말 하루살이 불나비들이 자기의 운명도 모른 채 ‘댄스 마카브르(죽음의 춤)’를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짧은 해후 끝에 산을 내려가는 내 의식의 망막 속에는, 조금 전에 만났던 GP후배 장병들의 늠름하고 싱그러운 모습들이 자꾸 어른거렸다. 과연 저 인생의 꽃망울 같은 아름다운 젊음을 ‘목비(木碑)속의 앙상한 몰골들’과는 달리 누가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까.
이의 해답으로 떠오른 대상이 항상 지겨운 정쟁(政爭)으로 지새우는 우리네 한 지붕 속 ‘정치 기능공님들’일 수밖에 없다고 느끼니 마음은 더욱 무겁고 착잡했다.
아, 저만큼 산 넘어 장안의 똑똑한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철없는 다툼 속에 우리는 속절없이 또 한 번 한 맺힌 비극의 노래를 불러야 하는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내 귓가에는 조금 전 비목의 현장에 묻혀있는 호국영령들의 애절한 가락들이 역사의 준엄한 계시처럼 오열로, 허밍으로 울려왔다.
“금성천 갈대밭에 노을이 타면/ 강물도 그리움에 목이 메인듯/ 휴전선 아픈 사연 피멍이 되어/ 천리길 구비마다 흐느껴 예누나/ 백암산 별빛
속에 풀벌레 울면/ 산화한 님과 엮던 덧없는 세월/ 소박한 산목련은 차마 못잊어/ 은하수 쪽배 타고 노저어 예누나.”
비목은 목비(木碑·나무 비)를 시적 언어로 표현한 단어다. 비목은 1968년 방송국 음악 PD로 일하던 한명희가 작사하고
장일남이 작곡했다. 6·25의 비극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우리 가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