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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폭동과 해방전후사

modory 2010. 7. 16. 07:02

6·25 전쟁 60년해방전후사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0과 131) 좌·우 충돌 한복판, 군 [중앙일보]

중앙일보는  6·25 전쟁 60년을 맞아 백선엽 장군의 실화를 연재하고 있다. 그 중 제주도 4.3 폭동과 해방 전후사를 바르게 인식할 내용이 있어 옮겨 놓는다. 제주도 4.3사건은 분명 빨갱이들의 폭동이었는데 민주화 운동내지 우파들의 횡포로 알려져 있다.

급기야 기관총 쏘고 수류탄 던지고 … 군·경까지 ‘이념 충돌’

그러나 당시엔 적의 동향도 동향이지만, 남한 내부의 사정이 너무 어지러웠다.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좌익과 우익의 충돌이 군 내부에서도 빈발하는 상황이었다. 통위부라는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대한민국 건국 직전 군대 내부의 모습은 당시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좌·우익이 한군데로 모이면서 각종 싸움과 반목이 줄을 이었다. 서로 겹치고 뒤엉키면서 극심한 혼돈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려고 모였다고는 하지만 생각은 서로 달랐다. 좌·우익의 대립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군사조직이 난립했다. 자체적인 무력조직을 확보하기 위해 좌익세력도 군사단체를 내세우고 있었다.

 
  1948년 5월 미국 라이프지에 실린 당시 서울 동대문경찰서 입구의 모습이다. 경찰들이 일본군이 두고 간 92형 중기관총까지 배치해 놓고 경계를 서고 있다.
 
 

‘장군의 아들’로 유명한 김두한씨가 이끄는 대한민청(大韓民靑)이 조선국군준비대라는 조직을 습격했던 사건은 그 점을 잘 설명한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당시 조선국군준비대는 지금의 육군사관학교가 있는 서울 태릉에서 1만5000명을 훈련시키는 강력한 군사조직의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조직의 간부들이 공산당의 전위대인 ‘남한인민항쟁유격사령부’의 지도부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우익 청년단체로서 강력한 힘을 행사하던 김두한의 대한민청이 이들을 습격했다.

사건이 커지자 미군 헌병대가 김두한과 함께 국군준비대의 무장을 모두 해제했다. 자주 벌어지던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해체된 좌익들이 군에 정식으로 합류했다는 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1947년 7월 스스로 군사부를 설치하면서 남한 군부에 조직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남한의 군대 장교 양성기관에 자신의 세력을 부식했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직접 입교시키는 방법과 각종 인맥을 동원해 사람을 집어넣는 방법 등을 모두 동원했다.

46년 미군정의 명령에 의해 모든 군사조직이 해제되면서 조선국군준비대 또한 조직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조선경비대를 창설할 때 사병으로 다시 군에 들어섰다. 48년 10월 벌어진 여순 반란 사건에서 군인으로서 조직적인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조선국군준비대 출신이라는 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군대 내부에서는 하극상(下剋上) 사건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46년 5월 벌어진 서울 주둔 제1연대의 1대대 소요 사건도 마찬가지다. 하사관(부사관의 당시 명칭)들이 병사들을 선동해 장교들을 공격한 사건이었다. 당시 선임 중대장이던 정일권 전 총리가 그 홍역을 앓은 주인공이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 소요 사건의 배경에는 사상적 대립도 들어있었다고 당시 1연대의 한 장교는 기억하고 있다.

비슷한 사건은 6월 전남 광산에 있던 제4연대, 10월 전북 이리의 제3연대에서 잇따라 터졌다. 유사시에는 총을 들고 나서서 적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나아가야 할 군대에서 조직의 위계를 부정하는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도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46년 12월 생도대장인 이치업 당시 대위가 자신의 숙소에서 취침 중에 사관 후보생들에게 얻어맞아 의식불명의 상태에 이르렀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앞서 벌어진 1·4·3 연대의 하극상 사건의 여파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좌익 사상을 신봉했던 것으로 보이는 중대장 등 중급 간부들의 영향을 받아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유를 잘 알 수도 없고, 원인을 캐려고 해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들이 대한민국 건국 직전의 남한 군대에서 자주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47년에는 군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5월 초였다. 사건은 광주 주둔 4연대의 한 경비대원이 자신의 친형이 좌익 혐의로 광양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시작됐다. 부대에 이 소식이 퍼지자 4연대 대원들이 토요일인 5월 11일 외출을 나가 경찰서 사찰계 형사들을 폭행한 뒤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경찰도 보복 차원에서 그 다음 주에 외출 나온 경비대원들을 무차별 폭행했다. 이들이 복귀하자 흥분한 1대대 병사들이 트럭 두 대에 나눠 타고 가서 경찰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 때문에 전남 지역에서는 경찰과 군대가 서로 틈만 나면 때리고 패는 보복이 이어졌고, 급기야 둘 사이에 총격전과 수류탄 투척이 오갔다. 6월 초에는 영암경찰서와 4연대 소속 하사관의 싸움으로 흥분한 군인들이 7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출동했고, 이를 막는 경찰은 기관총까지 동원해 사격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경비대 측은 6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쪽은 경찰이었다. 이들은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이 사건은 전라남도에서 군과 경찰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계기였고 좌익은 이를 노려 자신의 세력을 군 내부에서 더욱 확장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앞서 소개한 ‘제주 4·3 사건’은 이런저런 좌·우 사이의 충돌 양상이 수면 아래에서 물 밖으로 뿜어져 나온 상징적인 사례였다. 대한민국의 군대는 서서히 좌와 우의 극심한 대립과 충돌의 한복판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바다 건너의 제주도에서는 참혹한 살상(殺傷)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국군의 연대장이 좌익의 사주를 받은 하사관에 의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군은 더 이상 이런 극도의 혼란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군은 이때를 놓치면 자멸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군은 내부의 적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2010.07.15

 

4·3 진압 나선 11연대장 암살 … 그건 ‘좌익의 오판’이었다

제주 4·3사건은 점차 더 꼬여 가고 있었다. 사건이 터지던 날 제주읍에서 하루를 머물렀던 내가 당시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사건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을 맞았던 즈음의 제주는 좀 특별한 곳이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몰리던 일본이 미군을 향해 최후의 항전(抗戰)을 벌이려고 준비했던 곳이 제주였다. 해방 직전까지 제주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마지막 사수(死守)를 외치며 방어선을 펼쳤다. 그러나 대세가 꺾임에 따라 제주의 일본군도 투항했다. 문제는 막바지 급박한 철수상황에 놓이면서 일본군이 제주 곳곳에 만든 진지와 참호 속에 막대한 무기를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는 점이다.

당시의 제주도에는 좌익에 일찍 눈뜬 사람이 많았다. 바다로 진출하기 쉬웠던 지리적 여건 때문에 제주도 주민의 상당수가 일본의 오사카(大阪)·고베(神戶)·교토(京都) 등으로 나가 여러 가지 노동에 종사했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이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좌익 사상에 물들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에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이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난 뒤 남로당은 이를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익은 제주도에서 활동이 미미했던 데 비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각종 좌익 단체들은 제주도에서 ‘비 온 뒤의 죽순’처럼 마구 번성하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3일 무장한 좌익 단체들이 제주도의 12개 경찰 지서를 습격하면서 이후 피가 피를 부르는 잔인한 보복이 이어졌다. 폭동에 가담했다가 진압 군경에 붙잡힌 좌익 요원들이 눈이 가리워진 채 신문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1946년 7월 김구(金九) 선생이 제주도를 방문하면서 그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의 제주도 지부가 기지개를 펴는가 싶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경제사정까지 나빠졌다. 해방 뒤에 전국적으로 일본 기술인력 등이 빠져나가면서 산업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고, 제주도의 사정은 더 나빴다. 식량사정까지 악화하면서 제주도의 분위기는 좌익이 번성할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터진 것이 4·3사건이다.
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해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烽火)를 올리는 것을 신호로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우선은 ‘인민유격대’와 ‘자위대’ 대원 350명이 제주도 내 16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습격했다. 이들은 경찰관과 우익인 서북청년단원,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제주도는 곧 피가 흐르는 ‘유혈(流血)의 섬’으로 변했다. 주동자였던 제주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이 48년 8월 북한의 황해도 해주에서 개최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그때의 참상이 잘 드러나 있다. 김달삼은 그 연설에서 “모두 45회 이상의 지서 습격 및 야외전투를 통해 57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각종 시설물을 파괴했다. 다수의 무기를 탈취하는 등 무장투쟁을 가열차게 벌였다”고 말했다.

경찰이 진압에 나섰다. 조병옥 내무장관이 이끄는 경찰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경찰은 비교적 신속하게 움직였다. 각 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 8개 중대 1700여 명의 경찰을 제주도에 급파하는 등 나름대로 재빨리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인민유격대의 힘이 거셌다. 게다가 제주도 곳곳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1개 여단이 남겨두고 떠난 무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경찰력으로는 한계를 보이자 4월 17일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익렬 9연대장이 나름대로 준비를 마치고 출동했지만 인민유격대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연대 내에 숨어 있던 남로당원 오일균 소령과 문상길 중위가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작전계획을 인민유격대에 그대로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9연대의 김익렬 소령은 곧 해임됐다. 진압 작전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경비대총사령부는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한 제11연대를 투입했다. 3개 대대 규모로 편성된 정식 연대급 병력이었다. 그 연대장은 박진경 대령이었다.

그가 죽었다. 전과를 올리던 11연대의 작전도 잠시였다. 6월 18일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 박진경 연대장의 축하연이 있던 날 밤이었다. 연회장에서 돌아와 영내에서 취침하던 박 대령이 남로당원인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하사관에 의해 암살된 것이다. 당시 군은 경찰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조직력을 갖춘 보조적 역할이었지만 작전에 관해서는 경찰보다 한 수 위였다. 치안유지를 근간으로 하는 경찰과 적을 염두에 두고 전투를 벌이는 군대의 작전은 차원이 달랐다. 11연대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위협을 느낀 남로당이 결국 연대장을 암살하는 극약 처방을 쓴 것이다.

이 사건은 좌익이 노렸던 효과보다 훨씬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군의 본격적인 개입과 진압을 부른 것이다. 미군이 특히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군의 진압은 강도를 더해 갔다. 박진경 대령은 미군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딘 소장과 친했다. 딘 소장은 박 대령을 상당히 신임했다. 그런 박 대령이 남로당원으로 부대에 숨어든 부하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소식은 딘 소장에게 큰 충격이었다.

제주도 폭동의 와중에서 벌어진 연대장 암살 사건을 계기로 경비대 총사령부가 군 내부의 좌익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면서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선 데다, 미군까지 문제를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그러나 좌익은 그 준동(蠢動)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들의 움직임은 벌레가 꿈틀거리는 준동이라기보다 사나운 짐승이 이리저리 뛰는 발호(跋扈)의 상태였다. 남한의 근간을 위협하는 그런 움직임은 더 벌어질 분위기였다. 아주 거센 비바람이 제주도를 휩쓸고 다녔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