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4 중앙일보에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잊었나? ‘나의 조국’!이란 글을 썼다.
# 그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전 6곡이 서울시향의 연주로 펼쳐졌다. ‘나의 조국’ 전곡을 공연장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로 직접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스물아홉 살의 체코 출신 젊은 지휘자 야쿠프 흐루샤는 장장 1시간25분 동안 ‘체코 민족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정말이지 흠잡을 곳 없을 만큼 감동 어리게 풀어냈다.
#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은
17세기의 ‘30년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억눌린 체코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쓴 음악적 거사(巨事)였다.
스메타나는 50대에 이르러 청력을 상실해 음악가로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는 오로지 애국심에 불타는 창작욕으로 이 같은 시련을 딛고 장장
6년에 걸쳐 ‘나의 조국’이란 대작을 완성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제를 뚫고 일어서려 몸부림친 체코와 청력의 상실을 딛고 대작을 작곡해
낸 스메타나는 결국 둘이 아닌 하나였던 것이다.
#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듣는 내내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했다. 첫
곡 ‘비셰흐라트’를 들으며 떠올린 것은 남한산성의 굴욕과 저항의 역사였다. 비셰흐라트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남쪽의 블타바(몰다우)강 동쪽 기슭에
자리 잡은 성이다. 스메타나는 그 성을 배경으로 체코의 치열한 역사를 하프의 선율에 실어 파노라마처럼 펼쳤다. 둘째 곡 ‘블타바’는 체코의 젖줄
블타바가 두 개의 수원(水源)에서 출발해 숲과 들 사이를 지나 프라하로 흘러드는 역정처럼, 역경 속에서도 면면히 흘러온 조국의 역사를 선율에
담았다. 이 곡을 듣는 내내 한강이 떠올랐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어우러져 하나 된 한강! 그 한강이 유유히 흐르듯 우리의 조국도
흘러왔다.
# 셋째 곡 ‘샤르카’는 체코의 전설에 등장하는 여전사의 이름이다. 스메타나는 샤르카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압제에 대한 복수를 꿈꿨으리라. 그 셋째 곡을 들으며 진주 남강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던 논개(論介)가 떠올랐다. 그리고 넷째 곡
‘보헤미아의 숲과 들에서’를 들으며 60년 가까운 금단의 땅 비무장지대를 떠올렸다. 스메타나가 피비린내 나는 복수와 살육의 흔적들을 보헤미아의
광활하고 아름다운 숲과 들의 선율로 정화했듯이 6·25 동족상잔의 그 피 튀기고 애절했던 흔적과 상처들을 비무장지대의 울창한 숲과 들이 덮고
치유하는 것을 상상했다. 다섯째 곡 ‘타보르’를 들으며 동학란 당시 전봉준의 근거지인 고부를 떠올렸다. 스메타나가 15세기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의 근거지인 타보르를 음악적으로 형상화해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을 고취했듯이 말이다. 마지막 여섯째 곡 ‘블라니크’를 들으며 휴전선 155마일
곳곳에 잠든 국군의 혼령을 깨우는 꿈을 꿨다. 스메타나가 블라니크 산에 잠들어 있는 후스파(派) 전사들을 깨워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대곡 ‘나의
조국’을 마무리했듯이!
# 시인 모윤숙은 말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고. ‘산 옆 외따른 골짜기에/혼자 누워 있는 국군을
본다/ …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고나/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엎드려 그 젊은
주검을 통곡하며/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 57년 전 7월 27일 정전(停戰)협정이 체결되던 그 더운 여름날
지금의 휴전선을 따라 총성은 그쳤어도 이 산하 곳곳에서 죽어간 국군의 외마디는 되레 살아서 메아리쳤다. 그들의 외마디 속엔 죽음으로 지켜낸
‘나의 조국’이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과연 목숨 바쳐 지켜내고 살려야 할 ‘나의 조국’이 있기는 한 것인가. 우리는
벌써 그 외마디에 담긴 조국의 절실함을 잊었나?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그토록 절절하게 내게 다가왔던 까닭이 여기 있었다.
정진홍 논설위원이
이런 글을 쓴 2010년 더운 여름 7월은 어떤가?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이적단체 판결을
내렸지만 여전히 "美軍 철거하고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며 강령 주체사상·선군정치 등
北체제 찬양하는 무리들이 서울에서 전국 곳곳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그들을 보고 있고 대법관이란 자들 중 일부가 좌파 편을
들고 있다. 그것이 더 문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