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진실과사실

김현희의 진실 그리고 자살한 노무현의 죄상

modory 2011. 7. 18. 17:10

좌파 정권 정권 (특히 노무현)때 MBC가 앞짱서고 국정원이 주축이 되어 김현

가짜로 몰아 '칼기폭파사건'남한정부에서 조작했다고 조작함으로써

김정일을 국제 테로리스터에서 면책시켜 주어 김정일에게 충성하려 했던

사건의 거짓을 입증한 증인들의 대담입니다. 17부로 된 긴 동영상입니다.

시간나는대로 순차로 열어보십시오. 임.

 

  

 

김현희 꽃다발 증정 사진 입증

'진실의 삼총사' 39년만에 會同 (동영상)

 

김현희 꽃다발 증정 사진 입증


김현희 꽃다발 증정 사진 입증 '진실의 삼총사' 39년만에 會同 (동영상)
1972년 남북조절위 대변인 이동복 前 의원,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북한 花童 김현희 씨, 현장 사진을 필름에 담은 전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의 평양특파원 하기와라 료 씨와의 만남을 촬영한 동영상
참깨방송

1972년 남북조절위 대변인으로 평양 근교 헬기장에 내린 이동복 前 의원, 그에게 꽃다발을 증정한 북한 화동 김현희 씨, 현장 사진을 필름에 담은 전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 평양특파원 하기와라 료 씨가 조갑제 기자의 주선으로 7월12일 오후 한 자리에 모였다. 코리아나호텔에서의 이날 만남으로 KAL858기 폭파가 남한의 조작이라는 북한 김정일정권과 종북세력의 주장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깨방송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coreano1004

재생목록 바로 가기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A4B9E29AF02C19BF

1. 39년 전 訪北 남북조절위 대표단 도착 평양 헬기場에서 遭遇

2. 당시 日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 하기와라 료 평양특파원 촬영-입수

3. 이동복 : "조선 사람이 조선꽃 이름도 모릅니까?" 표독한 대꾸에 충격

4. 김현희 : 生花 본 적 없어 꽃이름 몰라 말 실수 안하려고 맞받아 친 것

5. 하기와라 료 : 요미우리 기자 사진, 1년 설득 끝에 입수

6. 김현희 : 입가의 점, 지도원 담배불로 제거했으나 흔적 남아

7. 2003년 노무현 집권 후 가짜로 몰려 집에서 쫓겨나 피난살이 중

8. 日공산당, 김일성 우상화 반발 아카하다(赤旗) 평양지국 철수

9. 북한의 조작-날조 공세에 국정원까지 나서 김정일 심부름

10. 日공산당 서기장, 김현희 회견 보며 "저런 표정 거짓 아니다"

11. 김현희 : 서울 도착 직후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 속았다 확신

12. 남한 사람들 자유롭고 삶의 의욕 넘쳐 감동

13. 서울에 와서 딱 보면 느껴진다

14. 이동복 : 역사적 증인 이렇게 팽개치다니 분노 들끓어

15. "증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없습네다"

16. 하기와라 료 : 일본 공산당에서도 쫓겨났다

17. 기념촬영


< 2011년 7월13일字, 朝鮮日報 >

1972년 평양 공항의 3人… 김현희·이동복·하기와라(日공산당 기관지 특파원), 그때를 추억하다

이동복 당시 남측 대변인 "꽃준 소녀에 꽃 이름 묻자 조선 꽃도 모르냐며 소리쳐"
김현희 당시 중1 "당시 生花 꽃다발 처음 봐… 갑자기 물어봐 당황했죠"
지난 1972년 11월 2일 오전 평양 근교 역포 지역의 널찍한 공터. 남북조절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남측 대표단을 태운 헬기가 내렸다.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참석했던 이동복(74)북한민주화포럼 대표, 1987년 11월 KAL기 폭파범 김현희(48)씨. 일본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의 평양 특파원 하기와라 료(74)씨가 이 현장에 있었다. 김현희씨는 당시 중학교 1학년으로 남측 인사들에게 꽃다발을 건네주기 위한 화동(花童)으로 한복을 입고 줄에 서 있었다. 하기와라 료는 화동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세 사람은 서로가 누구인지 몰랐다.

2011년 7월 1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기구한 인연을 가진 이 세 사람이 다시 만났다. 39년 만의 재회였다. 당시 남측 대표단 일행으로 참석해 김씨로부터 꽃다발을 건네 받았다는 이동복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꽃을 건네주는 아이한테 '꽃이 참 예쁜데, 이 꽃의 이름이 뭐지'하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아이 얼굴이 굳어지더니 대뜸 '조선 사람이면서 조선 꽃도 모릅네까'라며 소리칩디다."

김씨는 당시 꽃다발을 받은 인물이 이 대표인지는 몰랐지만, 이 대화는 생생히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는 "생화(生花) 꽃다발은 그때 처음 봤는데, 난데없이 꽃 이름을 물어봐 엄청나게 당황했었다"며 "조국에 망신을 줘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아 임기응변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기와라씨는 김씨에게 평생의 은인이다.

"꼭 한번 만나뵙고, 감사하단 말을 드리고 싶었어요. 지난 정부 시절에 저는 완전히 '가짜'로 몰려서 도망치듯 숨어지내야 했어요. 그때 하기와라씨가 사진을 찾아내 저를 '진짜'로 증명해주셨어요."

김씨의 목소리는 떨렸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하기와라씨는 비행기 폭파 사건 발생 후 김씨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1988년 일본 공산당 화보집을 통해 화동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하기와라씨는 사진의 한 소녀를 지목해 '김현희인 듯한 소녀'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김현희라고 지목한 소녀는 사실은 김씨가 아니었다. 성인이 됐지만 귀를 비롯한 얼굴 모양새가 너무 달랐다. 북한은 이 사진이 틀렸다며 "사진 속 소녀는 전혀 다른 인물이고, 폭파 사건은 날조됐다"고 공격했다.

논란은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위원회를 통해 "KAL기 폭파 사건은 정권 안보를 위해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좌파 진영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폭파 사건은 완벽한 날조다. 김현희는 북한 출신도 아니고, 공작원도 아니다"는 식으로 몰아세웠다. 사진도 다시 논란이 됐다.

이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선 사람이 하기와라씨였다. 그는 자신이 지목한 소녀가 김현희가 아니라는 것을 깨끗이 인정하고 다른 증거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당시 현장에서 함께 취재했던 요미우리 신문의 사진기자가 다른 각도에서 화동을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요미우리신문의 기자에게 "내가 틀렸으니 오보(誤報)라고 인정하고 당신이 찍은 사진을 공개하자"고 설득했지만 거부당했다. 북한에 불리한 사진을 공개하면 테러를 당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였??.

그러나 하기와라씨가 1년 넘게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요미우리신문 기자는 2004년 '위클리 요미우리'에 그가 찍은 새로운 사진을 공개했다. 도쿄 치과대학 하시모토 조교수는 사진을 감정하고 "소녀의 귀와 입술 오른쪽의 종기 흔적이 김현희와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하기와라씨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년 넘게 요미우리 신문 기자를 설득한 셈"이라며 "기자 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진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했다"고 말했다.

김현희씨는 "지난 정권시절에 나를 가짜로 몰아세우며 거짓 선동을 했던 사람들이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고 활보하고 다니고 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