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형두)는 19일 2010년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박명기 후보(서울교대 교수)에게 후보 사퇴 대가로 2억원을 준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벌금 3000만원을 선고해 석방하고, 박 교수에겐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후보 사퇴 대가로 2011년 2~4월 2억원을 건네 선거 문화 타락을 초래했지만,
(곽노현 캠프의) 최갑수 교수 등이 곽 교육감 모르게 (2010년 5월) 5억원 제공 합의를 한 것"이라며 검찰이 구형한 징역 4년보다 낮은
벌금형을 선고했다.
- (사진 위)후보 매수
혐의로 구속 기소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이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석방되며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 아래)작년 8월 29일
서울중앙지검에서 구속되던 박명기 서울교대 교수. 박 교수는 곽노현 교육감으로부터 후보 사퇴 대가로 2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연합뉴스
작년 9월 구속 기소되면서 직무 집행이 정지됐던 곽 교육감은 이날 벌금형 선고로 직무에 복귀하게 됐다. 벌금 3000만원은 당선무효형(벌금
100만원 이상)에 해당해 대법원에서 이대로 형이 확정되면 당선무효가 된다. 재판부는 박 교수에겐 "7억원을 요구해 5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사퇴했고, 사퇴 후에도 지속적으로 곽 교육감 측을 압박해 2억원을 받아냈기 때문에 엄벌해야 마땅하다"며 검찰이 구형한 대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검찰은 "곽 교육감 봐주기 판결"이라며 항소하겠다고 했고, 곽 교육감도 "무죄를 받겠다"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후보를 돈으로 매수한 쪽을 돈 받은 쪽보다 무겁게 처벌해 왔고, 후보 매수죄보다 법정형이 낮은 다른
금품 선거 사건에서 실형을 선고한 판례도 많았다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 서울시 교육감 후보
매수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아온 곽노현 교육감이 19일 벌금 3000만원을 선고받고 석방돼 법원을 나서고 있다. /이준헌 기자
heon@chosun.com
이번 사건과 비슷한 사례로 거론됐던 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후보 매수 사건' 때 돈을 준 고(故) 서석재 의원에겐 징역형(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된 반면, 돈을 받은 신민주공화당 후보 이모씨에겐 벌금형이 선고됐다. 대법원은
작년 9월 선거운동원들에게 돈 봉투를 돌린 전북교육감 후보 신국중씨에게 징역 8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2억원은 범행 은폐 목적도 작용한 후보 사퇴 대가"
재판부는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2억원을 건넨 행위는 박 교수가 후보를 사퇴한 데 따른 사후(事後) 매수 행위로 “범행 은폐 등 복합적 목적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곽
교육감이 박 교수에게 돈을 준 것은 선거가 끝나고 8~10개월이 흐른 2011년 2월 19일~4월 8일이다.
검찰은 곽 교육감이 2010년 5월에 한 ‘5억원 제공’ 합의를 이때 이행한 것으로 봤지만, 재판부는 선거 4개월 뒤인 그해 10월에야 곽
교육감이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판단했다. 곽 교육감은 친구 강경선 교수를 시켜 2억원을 6차례로 나눠 박 후보에게 건넸다.
재판부는 강 교수에겐 벌금 2000만원을 선고했다.
곽 교육감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는 박 교수의 처지를 감안해 2억원을 선의(善意)로 ‘긴급 부조(扶助)’했다고 주장해 왔다. 재판부는
“(곽 교육감이 돈을 준 데는) 박 교수가 파산한 데 따른 윤리적 책임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면서도 “향후 박 교수가 금전 지급 합의를
폭로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예방하겠다는 곽 교육감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2억원은 곽 교육감 자신도
‘악’ 소리 나는 거액이라고 말할 정도로 큰돈이어서 사회 통념상 의례적인 도움으로 보기 어렵다”며 “곽 교육감이 돈을 요구하는 박 교수를 가리켜
‘법이 말하는 클린 핸드(깨끗한 손)가 아니다’고 하는 등 2억원이 불법적인 후보 사퇴 대가임을 알고 있었다”고도
했다.
◇"단일 후보 된 것은 곽노현 책임 아니다"
재판부는 곽 교육감에게 벌금형을 선고한 것이 “형벌의
책임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곽 교육감이 단일 후보가 돼 (선거에서) 이득을 얻은 것이 사실이지만, 돈으로 단일 후보가 됐다는 사실을
몰랐던 이상 그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은 2010년 5월 단일화 협상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를 재판부가 검찰과
다르게 보았기 때문에 나왔다.
2010년 5월 19일 타결된 협상에서 곽노현 캠프의 최갑수 교수 등은 박 교수에게 후보 사퇴 대가로
5억원을 주기로 합의했다. 검찰은 협상 과정에서 곽 교육감이 3차례나 박 교수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으며, 합의 결과도 최 교수 등에게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재판에서도 곽 교육감이 단일화 직전 박 교수에게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단일화를 주선한) 시민사회단체 원로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했고, 단일화 발표 기자회견장에서도 “경제적 어려움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재판부는
“최 교수 등이 ‘조건 없이 단일화가 됐다’고 거짓 보고해 곽 교육감은 (5억원) 합의 사실을 몰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단일화 당일 오전 박
교수의 친구인 유시민 통합진보당 대표의 누나 유시춘씨가 ‘박 교수에게 3억5000만원을 주라’고 하는데도 곽 교육감이 거절했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액수인 5억원을 주고 단일화에 합의했을 리가 없다고 덧붙였다.
[검찰의 반론] "2010년 5월 단일화 협상때부터 곽, 알고 있었다"
"곽 교육감이 단일화 타결 당일 박 교수 손을 잡고
'경제적 어려움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사실 인정했는데
법원이 돈약속을 몰랐다며 책임 덜어준 건 상식 어긋나"
검찰은 서울중앙지법이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에게 벌금 3000만원을 선고해 석방하자 "전형적인 봐주기 판결"이라며 일제히 반발했다.
임정혁 대검 공안부장(검사장)은 "재판부가 2억원의 대가성을 인정하면서도 후보를 매수한 당사자인 곽 교육감에게 벌금을 선고한 것은 형평성에
현저히 어긋나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임 검사장은 19일 오후 기자회견을 자청, "재판부가 인정한 대로 만일 곽 교육감이 사전
합의(2010년 5월의 5억원 제공 합의) 사실을 모른 채 작년 10월에야 알고 2억원을 줬다고 해도 마땅히 실형이 선고됐어야 한다"며
"유권자에게 150만원, 100만원을 줘 매수해도 실형이나 집행유예가 나오는데 후보 매수는 사퇴 후보의 지지율을 통째로 돈으로 사버리는 것이어서
유권자 매수보다 훨씬 심각한 범죄"라고 말했다.
임 검사장은 "단일화 협상과는 무관한 일종의 돈 전달자인 강경선 교수에게도 벌금
2000만원을 선고하면서 후보 단일화로 인해 당선한 곽 교육감에게 벌금 3000만원을 선고한 것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라고
덧붙였다.
임 검사장은 이어 "곽 교육감이 2010년 5월 19일 단일화 타결 당일도 박명기 교수 손을 잡고 '경제적 어려움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며 "그런데도 법원이 돈 제공 합의를
몰랐다며 책임을 덜어준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고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정점식 2차장도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을 재판부만
믿는다고 한 '화성인 판결'이라서 지구인인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며 "재판부가 곽 교육감 측을 '단일화 피싱 사기단'으로 인정하면서도 사기
피해자인 박 교수에게만 징역 3년을 선고했다"고 말했다.
정 차장은 "곽 교육감 본인도 법정이나 검찰 조사에서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고 인정했고, 협상 당사자들이 '당선되면 7억, 낙선해도 5억 제공'이라고 합의를 한 것"이라며 "재판부가 곽 교육감의 말장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결을 내렸다"고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