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한참이나 앞둔 아이가 어느 날 함께 술을 먹자고 청했다. 친구들 얘기나 전해들은 말이 술은 어른들과 같이 마시며 배워야 하는
거라나. 청소년들의 음주가 문제시되기도 하는 이즈음에 아직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고맙기도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 은근히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날을 잡았다. 집에서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별로일 것 같아 여러
가지로 부담이 덜한 초밥집으로 갔다. 초밥집 바에 가족들이 나란히 앉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기분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나쁘지 않다. 정종을
시키고 각자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아이의 첫 음주를 축하했다. 한 잔 마시고 나니 다산 정약용의 편지가 생각난다. "참으로 술맛이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 물 마시듯 마시는 사람들은 입술이나 혀에는 적시지도 않고 곧잘 목구멍에다 탁 털어 넣는데 그들이 무슨 맛을 알겠느냐? 술을
마시는 정취는 살짝 취하는 데 있는 것이지 얼굴빛이 홍당무처럼 붉어지고 구토를 해대고 잠에 곯아떨어져 버린다면 무슨 술을 마시는 정취가
있겠느냐. 요컨대 술 마시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폭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정을 파탄시키거나 흉한 행동은
모두 술 때문이다.…폐족의 집안으로 주정뱅이의 이름까지 얻으면 어찌 되겠느냐. 술로 인한 병은 백약이 무효다."
유배지에서 아버지
다산이 둘째아들 학유에게 술을 음미하는 방법과 과음의 폐단을 지적하며 보낸 편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꼬장꼬장함이 보이지만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읽어진다. 12월, 바야흐로 음주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경제가 어렵네, 살림살이가 예전만 못하네하면서도 송년모임은 여전하다.
호텔연회장 송년모임 예약 비율이 예전보다 높다는 기사도 눈에 띄고. 기왕에 송년모임은 피해갈 수 없고 술도 마셔야 한다면 올해는 좀 이채롭게,
좀 멋스럽게 자리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신라시대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서 목제주령구(木製酒令具)를 가지고 놀았단다. 14각형 모형의 나무 조각 각
면에 三盞一去(한 번에 술 석잔 마시기), 飮盡大笑(술 마시고 크게 웃기) 등 한자로 된 벌칙 14가지가 적혀있는 놀이기구다. 쏟아지는 말
홍수와 흥건해지는 술자리 송년모임이 늘 그렇기만 했다면 술 한 잔에 소망 한 가지 말하기, 술 마시고 좋은 사람 이름 불러주기
등등으로.
최현태(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