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뉴스모자이크

2014년 9월 13일 오전 05:54

modory 2014. 9. 13. 05:55

조선일보 2014-09-13
강천석 칼럼 : 이러다 東北亞 낙오자 된다
대통령 말고 어느 누가 세월호 매듭 풀겠는가
민주당, 기억 창고에서 대구역 화재 참사 꺼내 易地思之해야

꽝 소리를 내며 문(門)이 닫힌다. 귀 있는 사람 다 들으라는 뜻 같다. 하긴 이러고도 기회가 우리를

기다려주기 바라는 건 염치없는 생각이다. 승객을 마냥 기다려주는 친절한 기차는 세상에 없다.

승객이 열차 시간에 맞춰야 한다. 중국이 떠나고 일본이 떠나버린 횅댕그렁한 동북아역(東北亞驛)에

우리 혼자 달랑 내동댕이쳐진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시간표를 모른 채 다음 열차를 무작정 기다리는

신세만큼 처량한 것도 없다. 급행(急行)이 방금 떠났으니 다음 열차는 완행(緩行)일 게 분명하다.

국회는 지난 5월 2일 이후 134일 동안 한 건의 법률안도 처리하지 못했다. 작년엔 160일간 안건

무(無)처리 기록을 세웠다.

현재 국회에는 940여건의 여객선 안전, 노인 복지, 고리대금(高利貸金)업자 횡포 방지에 관한

법률안이 줄 서 있다. 그 가운데는 선장의 비상훈련과 위기 상황에서 승객을 안전하게 안내할

선원의 의무를 담은 선원법 개정안이 들어 있다. 이 마당에 여야는 세월호 진상조사특별법 제정 문제로

밀고 당기며 불법 파업을 계속 중이다. 세월호가 정쟁(政爭)의 바다로 떠내려가면서 안타까워하던

국민 눈길도 식어갔다. 정쟁 피해자는 또 세월호 유족이다.

대한민국 국회는 국회선진화법이란 병 속에 갇힌 나비 신세다. 현재의 국회법에선 3분의 1 의석만 있으면

예산안을 제외한 모든 안건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여·야 같은 숫자로 구성된 상임위 안건심사위원회를

통과하려면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한다. 간신히 상임위 고개 넘어도 또 다른 장애물이 기다린다.

재적 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으면 본회의에서 무한정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진행 방해 발언을 끝내려면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여·야의 완전 합의가 없으면

어떤 법안도 처리할 수 없는 구조다. 이 나라 국회에선 과반수 의석으론 다수당이 되지 못한다.

 최소 5분의 3 이상의 의석을 확보해야 한다.

우리 국회의 정신 연령, 의식 수준, 타협 능력으로 보면 '국회 선진화법' 이 아니라 '국회불능화(不能化)법'이라

불러 마땅한 법이다. 선진화법이란 마개를 딸 병따개도 없다. 선진화법을 개정하려는 국회법 개정안

역시 선진화법의 적용을 받는다. 재적 의원 3분의 1을 넘는 의석을 가진 야당이 브레이크를 밟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나라 전체가 선진화법의 인질(人質)이 된 꼴이다.

다수결(多數決)이 만능(萬能)도 아니고 최선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의회의

의사결정 방식으로 재적 의원 과반수 또는 출석 의원 과반수 찬성이란 다수결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헌법 개정 또는 대통령 탄핵 등의 중대 안건만을 예외로 할 뿐이다.

과반수 의결이란 비상 탈출구가 마련돼 있지 않은 체제는 걸핏하면 국가 의사 결정이 무한정 지체되거나

가능해지는 사태를 맞는다. 우리는 그다음엔 헌법 위기, 국가 위기가 밀어닥친다는 걸 뼈저리게 체험했다.

여·야는 시중의 국회 해산 운동 이야기를 그냥 흘려들을 처지가 못 된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막막한 노년(老年)에 지쳐가는 사람들의 성난 얼굴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

비행기는 적정 운항 속도를 잃고 실속(失速)하는 순간 쇳덩이로 변해 곤두박질친다. 대한민국 처지가

딱 그렇다. 국회는 선진화법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한다. 여·야 합의를 두 번이나 되물린 야당을

추궁한다 해서 길이 뚫릴 리 없다. 오죽 다급했으면 전직(前職) 여당 비상대책위원을 자기네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모셔오려 했겠는가. 국가 운명에 대한 무거운 책임 의식을 대통령 말고 어느 누구에게서 찾겠는가.

대통령이 나설 수밖에 없다. 해머와 쇠톱이 등장하는 난장판 국회의 재발(再發)을 막는다며 여당이

국회선진화법 도입을 주도할 당시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현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여·야를 불러 모아

대담한 대타협을 이끌어야 한다.

국민 여론은 민주당 편이 아니다. 민주당이 반 토막 난 지지도를 보고서도 깨닫지 못한다면 간판을 내려야 한다.

민주당은 2003년 2월 18일 192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1명이 실종되고 151명이 부상을 당했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기억 창고에서 다시 불러내 봐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만료 보름 전 그 참사를 만나 모든 걸 정권의 책임이라고 온몸으로 끌어안았는가.

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시는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게 재난 관리 체계를 전면 점검하고

획기적으로 개선해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천했는가.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나라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다. 국민의 압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