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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병점 / 최정례

modory 2018. 3. 30. 18:00

병점 / 최정례

 

병점엔 조그만 기차역 있다 검은 자갈돌 밟고 철도원 아버지 걸어오신다 철길가에 맨드라미 맨드라미 있었다 어디서 얼룩 수탉 울었다 병점엔 떡집 있었다 우리 어머니 날 배고 입덧 심할 때 병점 떡집서 떡 한 점 떼어먹었다 머리에 인 콩 한 자루 내려놓고 또 한 점 떼어 먹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 병점 철길가에 맨드라미는 내 언니다 내 동생이다 새마을 특급 열차가 지나갈 때 꾀죄죄한 맨드라미 깜짝 놀라 자빠졌다 지금 병점엔 떡집 없다 우리 언니는 죽었고 수원(水原), 오산(烏山), 정남(正南)으로 가는 길은 여기서 헤어져 끝없이 갔다


# 이 작품은 병점역을 두고 현재와 과거형 시제를 번갈아 쓰면서 지난날을 추억하고 오늘과 미래의 끝없이 향하는 현실을 마치 영화의 몇 장면처럼 깨끗하게 돌아가게 하고 있다. <내 살은 병점 떡 한 점이다 병점은 내 살점이다>로 병점을 작품 중앙부에서 아주 진하게 강조하면서, <맨드라미 맨드라미>마저 그 친근한 모든 추억들마저 <떡집>마저 가족들과 사라졌지만, 실제 지명인지 아니면 정남쪽인지 확인 불요하다 여겨지는 <정남(正南>으로 끝없이 간 길(획일화되고 상실된 현실 문명)을 고발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작품 세계>
최정례(1955년 경기 화성 출생)는 시간과 기억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의 사유는 생을 특정한 의미체로 혹은 서사물로 구성하려는 기획 속에 붙들리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를 사유하는 형식이 된다... 그 시간들을 읽는 일은 한편으로 존재론적인 무게를 성찰하는 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생의 아이러니를 비극적으로 체험하는 일이 된다. 그리하여 최정례의 시간의 사유는 '나'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에 닿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