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는 2003년 10월 천정배 의원 등 여권 내부의 문제제기로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향력은 달라지지 않았다. 후임 상황실장인 박남춘(나중에 인사수석)씨를 비롯, 곳곳에 포진한 자기 사람을 통해 청와대의 내밀한 사정을 실시간으로 알다시피 했다 한다. 한 관계자는 "온갖 인사 상황을 이광재는 다 알고 있었다"면서 "대통령이 전날 밤에 누구를 만났는지를 알고 있었고 심지어 누구는 못 만나게 하라고 한 일까지 있었다"고 했다. 이광재가 2004년 4월 총선으로 국회의원이 된 뒤인 8월 18일 열린우리당 내 핵심 386그룹은 '의정연구센터'라는 것을 만들었다. 서갑원, 이화영 등 이광재 의원과 가까운 사람들이 주로 참여했다. 문화부 차관 출신인 김종민씨가 원장을 맡았다. 김씨는 2005년 3월 관광공사 사장으로 발탁되더니 지금은 문화부장관이 되어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뭔가 될 줄 알았다"고 했다.
2005년 4월 터진 '유전 게이트' 때도 이 의원의 영향력이 입증된 바 있다. 당시 구속됐다가 나중에 무죄판결을 받은 김세호 건교부 차관은 철도청장 시절인 2003년 상황실장인 이광재씨를 알게 된 뒤 총선 직전인 2004년 2월 강원도 평창까지 찾아갔다. 이광재는 사석에서 김씨에 대해 "대한민국 최고의 공무원"이라고 말한 일도 있었다 한다. 김씨는 2004년 9월 차관으로 승진했고 그대로 가면 장관도 떼어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라고들 여겼다. 그러나 유전사건에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확인돼 옷을 벗었다.
안희정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청와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수감생활까지 했던 데다, 매우 조심스럽게 일을 하는 스타일 때문에 소문이 적었다. 하지만 안씨도 사석에서 "심지어는 선거 때 도왔던 여직원이 찾아와 청와대에 넣어달래서 도와줬을 정도로 시달렸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개각이나 청와대 비서실 개편 때마다 안씨를 불러 상의했다. 문희상 의원에 이어 두 번째 비서실장에 김우식 연세대 총장을 '스카우트' 한 사람은 이광재고, 이병완씨가 세 번째 비서실장이 된 것은 안희정의 영향력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청와대 내에 파다하다. 김우식·이광재는 연세대, 이병완·안희정은 고려대 학맥으로 얽혀 있다. 청와대 내 '이광재 파' '안희정파'는 각각 연세대, 고려대 운동권 인맥과 깊숙이 관련돼 있다.
문건 유출사건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물러난 김만복 국정원장이 국정원장에 이르는 과정은 386들의 인사 개입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경우다.
김 원장은 국정원에서 잘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2001년 세종연구소에 1년 파견을 나갔는데 본인이 "나는 1년 후 그만둔다"고 말하면서 갔다. 김 원장의 운명은 이곳에서 연구위원으로 있던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을 만나면서 바뀌었다. 김 원장과 가까워진 이 전 장관은 2003년 정권 초 NSC 사무차장을 맡으면서 김 원장을 NSC 정보관리실장(1급)으로 불러들였다. 김 원장은 2004년 2월 국정원 내 인사와 자금줄을 쥔 기조실장으로 가더니 2006년 4월에는 1차장(해외 담당)으로 승진했다. 김 원장은 기조실장과 1차장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핵심 386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자주 식사나 술자리 모임을 가졌고 정보도 사적 통로를 통해 제공했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얘기다. 청와대의 한 전직 비서관은 "김 원장이 기조실장으로 있으면서 청와대 386들에게 용돈도 줬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제이유 사건으로 구속된 한 사람은 사석에서 "김 원장이 노사모 출신 누구의 취직을 주수도 회장에게 부탁한 일도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06년 11월 김 원장에게 기회가 왔다. 김승규 원장이 청와대와 갈등을 빚으면서 물러나게 된 상황이었다.
당시 김 원장은 후임에 대해 "내부 발탁은 안 된다"고 했다. '김만복은 안 된다'는 얘기였다. 김 원장 측의 한 관계자는 "386들 만나 정치나 하러 다니는 사람이 원장이 돼서는 국정원이 망한다는 취지였다"고 했다. 당시 청와대와 국정원 안팎에서는 "김만복 차장이 김승규 원장을 제치고 청와대에 직보한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청와대가 당시 후임으로 검토한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과 김 원장이었다. 청와대 386 압도적 다수가 김 원장을 밀었다. 안희정과 가까운 이병완 당시 비서실장, 이광재와 가까운 박남춘 당시 인사수석도 강하게 김 원장을 밀었다. 권 보좌관은 청와대를 떠났고 김 원장은 후임 국정원장이 됐다. 당시 청와대 내에서는 이광재와 안희정 및 그들을 따르는 386들의 합작품이라고 했다.
- ▲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들이 작년 6월‘참여정부평가포럼’월례강연회에서“한나라당의 집권은 막아야 된다”는 내용의 노 대통령 강연을 듣고 박수를 치고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선거 출마 여부가 제1의 인사기준?
2006년 초 어느 날 노 대통령은 내부 회의 자리에서 A수석에게 말을 건넸다. 5·31지방선거를 앞두고 광역단체장 후보 물색이 한창이던 때였다. 노 대통령은 A 수석에게 호남 지역의 광역단체장 출마를 권했다. A 수석은 "제 머리가 이렇게 희끗희끗합니다. 제 나이가 60만 넘지 않았어도…"라면서 완곡하게 거절했다. 노 대통령은 버럭 화를 냈다. "공무원 출신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A 수석은 행정관료 출신이었다. 노 대통령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날 A 수석에게 "제가 좀 과했죠?"라고 사과했다고 한다. A 수석은 지방선거가 끝난 뒤 청와대를 떠났다.
노무현 정권 들어 관운이 가장 좋았던 것으로 꼽히는 B 장관. B 장관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2006년 초 '저는 많은 덕을 입었다. 필요한 곳에 갖다 쓰시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B 장관은 이 덕분인지 지방선거에 실제 나가지도 않았는데 장관으로 발탁됐다. 물론 B 장관의 행정능력도 평가받았겠지만 출마를 자원한 것이 노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줬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노 대통령은 선거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사람이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도 선거에 나가본 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철저히 구분한다. 선거에 나간 사람이라면 낙선을 했더라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으로 본다. 문제는 선거를 정부 고위직 인사에 직결시켰다는 점이다. 2004년 총선, 2006년 지방선거, 그 중간에 수없이 있었던 재·보궐선거에 출마를 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장관과 청와대 수석을 고르는 제1의 판단기준이었다. 선거에서 이겨야 국정운영이 힘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선거에 내보내기 위해 고위직에 임명해 주가를 높여주기도 했다. 이에 대한 노 대통령의 집착은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고 한다.
2004년 총선 전에도 이런 일이 많았다. 2003년 말 강금실 당시 법무장관은 총선에 출마하라는 열린우리당의 강권에 시달렸다. 강 장관은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법무 행정을 더 하고 싶다는 뜻을 주변에 밝혔다. 당시 한 수석이 이 얘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을 몰라도 한참 모르네. 출마 안 하면 장관도 없어. 출마하면 나중에 또 뭐가 돼도 돼." 선거에 나서지 않았던 강 장관은 결국 총선 후 물러났으나 그 전날까지도 해임 사실을 모르고 대통령에 대한 업무보고를 준비했다. 대통령을 그만큼 잘 몰랐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이런 성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웃지 못할 상황들도 숱하게 있었다고 한다. 한 고위 관료는 청와대 관저로 보고를 갔다가 노 대통령이 묻지도 않는데 "대통령님, 저 고향이 ○○인데요. (출마를)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지켜보는 사람이 적지 않은 자리였다. 이 사람도 나중에 장관이 됐다.
노 대통령과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사이가 벌어진 결정적 이유도 정 전 의장이 보궐선거 출마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당 의장으로 열린우리당을 이끌고 2006년 5·31지방선거에 참패한 정 전 의장에게 노 대통령은 7월 26일 성북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가라고 했다. 이곳에는 탄핵 주역인 민주당 조순형 후보가 출마했다. 정 전 의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일로 떠났다. 이후 청와대에서는 정 전 의장에 대한 '배신감'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노 대통령과 정 전 의장의 사이가 벌어진 데는 다른 이유들도 작용했으나 이 사건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 청와대 관계자들 얘기다.
노 대통령은 박명재 현 행자부장관, 추병직 전 건교부장관, 권욱 소방방재청장 등 낙선이 예상되는 지역에 출마한 사람들을 수없이 장·차관으로 기용했다. 이재용 전 환경부장관의 경우는 반대로 관으로 기용해서 몸값을 키운 뒤 선거에 내보낸 경우다. 이 전 장관은 2006년 지방선거 전 장관에 기용된 뒤 지방선거 때 대구시장 선거에 나갔다가 낙선했다. 낙선 뒤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으로 재기용했다. 측근인 이강철씨를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에 기용했던 것, 김두관씨를 첫 행자부장관으로 기용했던 것도 모두 선거를 염두에 둔 몸값 키우기 차원이었다.
노 대통령의 이런 행태에 대해 여론의 비판이 쏟아졌지만 노 대통령은 고집스럽게 이런 '선거용 인사'를 계속했다. 특히 영남 지역 출신들에게 이 방식을 많이 적용했다. 이 때문에 관가에서는 장·차관 되려면 출마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은 진보 진영의 사람, 그중에서도 영남 지역 진보 진영의 인사들을 키워 진보정당의 한 축으로 삼으려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