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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죽음'과 '세일즈맨의 죽음

modory 2009. 6. 7. 17:40

'대통령의 죽음'과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의 희곡)'

조선일보 기자(박돈규·문화부 기자)수첩 : 2009.06.06

최근 대학로 공연장에서 만난 한 연극연출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했다.

아서 밀러가 쓴 '세일즈맨의 죽음'은 '성실=성공'이라고 믿었던 윌리 로만이 주인공이다. 윌리는 아들들의 성공을 바란 아버지였다. 그러나 아들들은 기대를 저버렸고, 아버지도 회사에서 퇴출당한다. 윌리는 가족에게 '보험금'을 남기려 자살하는데, 그것이 노 전 대통령의 '끝'과 닮았다는 것이다.

대학로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비극(悲劇)이다. '지체 높은 주인공의 죽음'이라서다. 어떤 평론가는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비극의 단초가 됐다는 점에서 '세일즈맨의 죽음'과 이 사건을 빗대기도 했다. 권양숙 여사는 자식에게 무한정 베풀고 싶었던 어머니였고 그 과정에 박연차 회장의 돈이 파고든 것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린다는 남편의 묘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보, 뭣 때문에 그랬수? 오늘 마지막 집세를 냈고 빚도 없이 홀가분해졌는데. 이젠 맘 놓고 살 수 있는데…."

'세일즈맨의 죽음'이 명작인 건 그 현대적 비극이 보편적 공감을 불렀기 때문이다. 관객은 투쟁하고 핍박받는 주인공의 편이다. 노 전 대통령이 바로 그 길을 걸었다고 생각한 수백만 추모객이 지난주 분향소에 운집했을 것이다. 반면 공표된 피의사실이나 죽음의 방식에 대해 분노했던 관객(국민)은 침묵으로 애도했다.

그러나 '정치극'이란 장르가 있는 연극동네 사람들에게조차 노 전 대통령의 서거는 충격이었다. 극장 밖이 더 '극적'이라서일까. 아니면 예술적 승화(昇華) 작용이 없는, 단순충격이라서일까? 한 극작가는 "현실이 다이내믹한데 연극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자괴감이 든다"고 했고, "정치극을 부활시켜 '충격적 정치'를 몰아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드라마 '명성황후'에는 '나 가거든'이란 곡이 있다. "나 슬퍼도 살아야 하네/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로 흐르는 노래다. 명성황후는 핍박을 견디고 싸운 국모(國母)였다. 한 배우는 "
노 전 대통령이 택한 것은 국가나 국민이었는지, 아니면 자신과 가족이었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