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없는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해 왔지만, 결국 후임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북 정책노선이 전면적으로 수정됐다."
AP통신
"그는 남북화해를 위해 싸운 전사였다." 알자지라
방송 |
■ 영원한 '비주류', 그리고 '승부사' 노무현
영원한
'비주류'로서 노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정치실험도 주목받고 있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상고를 졸업했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에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정치권에 입문한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자신의 소신을 위해 험로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난 16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출마를 마다하고 다시 부산에 출마해 낙마한 그의 '무모한 도전'을 두고 지지자들은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을 헌사했다.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었던 노사모도 이 때 결성됐다.
대통령 재임시절에도 그는 언제나 승부사였다. "지역주의 극복은 내 필생의 과업"라던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을 제안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진보·보수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외면받는 등 정치적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지나친 파격은 사회적 논란을 부르기도 했고, 결국 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을
탄핵한 정치권의 '주류 세력'이 맞딱뜨려야 했던 것은 거리를 가득 메운 '촛불'이었고,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과반을 차지하는 대반전을
이뤘다.
"미스터
클린(Mr. Clean) 이미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솔직함으로 명성이 높았다. 정말 부패한 사람들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이 잘못된 일을 했다는 사실과 타협할 수 없는 개혁운동가(crusader)였다." 더
타임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민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서민 대통령이었다." 中 포털사이트,
서부망(西部網) |
■ '노간지' 노무현, '권위' 내려놓고
고향으로…
권위주의 타파와 분권은 노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꼽힌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력 독점 구조를
대통령 스스로 거부한 흔적은 숱하다. 국정원, 검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을 추진했다. 분권형 대통령을 표방하며 국정운영과 내각
관할에 관한 국무총리의 실질적 권한을 보장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 집권여당과의 당정분리 원칙 등도 명암이 존재하지만 탈권위를
위한 정치실험이었다.
다변과 거침없는 표현 등으로 늘 논란의 중심에 섰지만 역대 대통령 중 어느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줬다는 평가에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처음으로 퇴임 후 '낙향'의 길을 선택한 점도 후한 점수를 받는다.
직접
농사일을 거들고,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동네 구멍가게에서 담배를 피우는 노 전 대통령의 소탈한 모습에서는 '권위의 상징' 대신 '인간
노무현'으로서의 면모가 돋보였다는 평가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을 두고 네티즌들은 '노간지'라는 애칭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자료유출 논란' 등 신·구 정권 간 신경전이
벌어졌고, 끝내 검찰의 포토라인에 서는 굴욕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까지 계속된 검찰수사의 압박은 결국 전직 대통령의 서거라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권위주의
탈피, 지방 분권이라 외쳤지만 구것은 정치적인
수사였을 뿐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오히려 지방과 지방, 지방과 수도권과 갈등만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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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손녀와 함께 자전거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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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간지'라는 애칭을 탄생시킨 한 장의 사진. ⓒ노무현 전 대통령 홈페이지 '사람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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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정경유착을 깨고 보수언론의 권력을 줄이려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너무나 인간적인, 그래서 결점있는 지도자였다. (그의
서거는) 한국 대통령 역사상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LA타임스
"노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재벌과 정치의 유착을 끊고 남북평화 체제 구축과 민주주의를 성숙시키는 공적을 남겼다."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
■ 어쨌든 '경제'는 굴러갔다…'지표'와 '생활경제' 사이의 괴리는
아쉬워
경제분야에 있어서도 공과가 공존한다. 우선 지표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이 노 전 대통령 재임 중 최초로 2만 달러를
넘어 섰고, 종합주가지수도 한때 2000선을 돌파하는 등 성과가 적지 않았다. 재임 중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도 전문가들
사이에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을 끝없이 괴롭혔던 것은 '지표'와 '생활경제'의 괴리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한 것도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 기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부동산 문제는
노 전 대통령 스스로 실패를 인정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잡기 위해 종부세 도입 등 과감한 조치를 시행했지만, 결국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반대파들로부터는 '반(反)시장주의자'라는 비판도 나왔다.
부동산
정책은 최악의 실패 정책으로 중산층을 무너지게
했고 가진 자를 미워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부정으로, 부동산 투기로 돈 번 사람도 있지만
대개의 중산층은 알뜰히 하여 집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그런 사람들을 부동산 투기 로
싸잡아 몰면서 부동산 종합소득세를 만들어
중산층을 곤경으로 몰아넣었고 부동산 시장을
얼어 붙게 만들면서 계층 간에 갈등을 부채질
했다.
"한국이
국가적 충격에 빠졌다. 노 전 대통령에 반대했던 보수 언론과 정치권에 역풍이 불 수 있다." 워싱턴타임스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훼손되고, 봉하마을 주민들이 일부 정치인의 조문을 막아서는 등 정치적 파장의 초기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
■ 댓글 달고 토론하는 '인터넷 대통령'…'언론개혁' 과제는
남겨진 숙제
일부 언론사가 전사회적 여론을 독점하는 한국의 언론 지형은 노 전 대통령에게 언제나 '투쟁의 대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지난 2001년 <조선일보>의 인터뷰를 거부하고 불매운동을 선언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이어
갔다.
신문법 개정 등 과감한 법제도 개선을 통한 신문 시장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제어하기 위한 기틀도 노 전 대통령 재임기간
마련됐다는 평가다. 신문유통원과 신문발전기금, 지역신문발전기금의 도입은 언론의 '다양성'을 확충하기 위한 시도들이었다.
한 명의
'네티즌'으로서의 그의 면모도 신선했었다. 국회의원 시절 누구보다 먼저 'PC통신'을 통해 국민들과 소통을 시도했던 노 전 대통령은 직접 인터넷
뉴스를 찾아보고, 토론방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언론과 싸우는 대통령'의 이미지는 재임기간 내내 그를 괴롭혔다. 노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은 언론개혁을 위한 제도적 실험이라는 측면보다 취재활동 전반에 대한 규제와 압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광범위한 사회적인 논란이 촉발되기도 했다.
송호균 기자 (uknow@pressian.com)
-대통령의
의무이며 책무는 국가 보위와 민족 통합으로
국가를 발전 시켜 나가는 것이 첫째이다. 그는
그것은 실패했다. 인간적인 면이 어쩌느니
하는 것은 죽음 앞에 관대한 인간의 속성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