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최승현 기자의 대중문화회관 -
2010/02/26
장르·소재 등 폭 넓히며 30~40% 시청률 쏟아내…제왕적 드라마작가 위상 흔들리고
있다
- ▲ 최승현 기자
'추노', '아이리스', '선덕여왕'…. 작년부터 최근까지 40% 안팎 시청률로
폭발적 호응을 얻은 드라마들이다. 주변의 숱한 드라마가 불륜과 복수, 출생의 비밀 코드에 기댄 뻔하고 부실한 내용으로 '막장' 논란을 빚는 사이
이 작품들은 파격적 스케일과 실험적 작법으로 신천지를 개척해냈다. 그것이 가능했던 핵심 요인은 영화계에서 수혈된 신흥 작가군.
천성일('추노'), 박상연('선덕여왕'), 김현준·조규원('아이리스') 등은 모두 충무로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아 온 인물들이다.
수십명의 40~60대 여성들이 똘똘 뭉쳐 구축해 온 한국 드라마계의 작가 수급 구조가 젊은 '외계인'들의 등장으로 하나 둘 허물어지는
셈이다.
한국 드라마는 대체로 중장년 여성들의 감성을 공략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수치상 TV를 가장 많이 보는 계층이기 때문.
뉴미디어와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젊은 시청자들의 이탈이 계속되자 각 방송사는 안정적인 시청층을 유지하는 데 더욱 힘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이
극단화된 결과가 바로 '막장 드라마'의 범람. 그 와중에 또래 여성들의 심리를 간파해 절묘한 작품을 써내는 일부 스타 여성 작가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안으로 떠올랐던 게 바로 영화계 시나리오 작가들의 등용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소재와 장르가 확장되고
표현 방식이 다양해졌다. TV 시청자에 비해 능동적인 극장 관객을 상대하던 시나리오 작가들은 강렬한 캐릭터를 구축하고 장르를 뒤섞어 기발한
형식미를 구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동안 사라졌던 시청률 30~40% 드라마들이 쏟아지는 건 안방극장을 떠났던 젊은 세대의 귀환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국 드라마의 지평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 MBC '선덕여왕'
▲ KBS '추노' 앞으로 이런 현상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이라는 말에 실마리가 있다. 박상연 작가는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냐?'라고 물으면 영화 마니아라도
머릿속이 하얘질 것"이라며 "한국 영화계에서 감독에 가려진 작가들은 적지 않은 박탈감을 갖고 있어 TV 드라마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계와 달리 드라마계에서 작가의 위치는 제왕적이다. 작가가 이메일로 보내는 쪽대본을 받기 위해 촬영장의 온 스태프와 배우들이 바짝
긴장한 채로 컴퓨터 앞에 모여 있는 게 일상적 풍경일 정도. '시청률 제조기' 혹은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는 김수현 작가가 최근 "제가 쓴 영화 '하녀'의 대본을 임상수 감독이 완전히 다시 썼다"며 격노한 뒤,
시나리오를 회수한 사건은 영화계와 드라마계에서 차지하는 작가의 위상 차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각 방송사의 드라마 PD들 또한 호흡이
맞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작가료는 가장 큰 매력이다. '추노'의 최지영 책임 프로듀서는
"다음 작품도 영화 쪽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작가들과 함께한다"고 말했다. 10년 이상 이어진 한류로 인해 '공식'을 모두 드러낸 한국식 멜로
드라마로는 더 이상 해외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자각도 영화적 상상력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다. 방송가에서 이른바 '대박'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욱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 물론, 더 좋은 드라마를 만나고 싶은 시청자들로서는 아쉬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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