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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대중 정권과 좌파 영화인 - 김지미씨의 증언

modory 2010. 9. 11. 07:24

◈ 김지미와 김대중 그리고 좌파 영화인 ◈

"살아보니 대단한 남자 없더라"라는 일흔의 김지미의 2000년대 영화판 이야기

 ▶ 2010.09.10 김지미씨가 조선일보에서 인터뷰를 했다. 권력과 관계되는 부분만 발췌하였다.


김지미. 60년대 최고 흥행 배우이자, '미인'의 대명사이다. 가십을 좋아한다면, 그 이름은 감독(홍성기), 배우(최무룡), 가수(나훈아), 의사(이종구)와 살다 헤어진 여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은 또 '치마 두른 남자'로 통하는 통 큰 제작자의 이름이며, 동시에 영화운동가들에겐 '타도되어야 할 충무로 구세대'의 한 명의 이름이기도 했다.

영화계의 신구 갈등이 정점에 달한 2000년 6월, 당시 영화인협회 이사장이었던 김지미(70·본명 김명자)는 협회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다음날,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7세에 데뷔해 43년 몸담아온 영화계와는 그것으로 영영 작별이라 생각했다. 간간이 서울에 오긴 했지만, '그때' 일을 구구절절 말하지 않았다. 밀려드는 돈으로 영화 만들기에 바빴던 후배들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랬던 그가 지난 2010년 9월 7일, 서울 남산의 한 레스토랑에서 기자와 만나 많은 말을 쏟아냈다.
 

탄력과 생기를 잃을까 두려움에 떠는 철 지난 여배우의 불안은 없었다.“ 너희 가 필요하면 날 모시고 가라.”김지미는 김지미였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 동영상 chosun.com

여배우, 김지미

1998~2000년 그 격동의 시대

제작자로서, 95년부터 영화인협회 이사장직을 맡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98년부터 젊은 영화인들의 모임과 갈등을 빚으며 몇년 후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 이후 광고를 촬영한다거나 주부 대상 강연을 가진 적은 있지만, 정치적 사건과 그 소회를 말한 적은 없다.


―지난 2000년 전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보자. 먼저 젊은 영화인과의 갈등부터. (55년 설립된 영화인협회 중심으로 움직여온 영화계는 98년부터 격동기를 맞는다. 이른바 진보 영화인인
성근·유인택·명계남 등이 주축이 돼 98년 충무로포럼을 결성한다. 두 단체의 갈등이 폭발한 것은 이후 출범할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 추천권을 두고. 충무로포럼이 협의에 들어가자 협회는 인선 논의를 중단하라며 경고조치를 주었고, 명계남씨 등은 반발했다. 이 단체의 후신인 '영화인회의'가 출범하고 다수 영화인이 이 단체를 지지하면서 협회는 실질적으로 혼수상태에 돌입했다.)

"
나는 사실 그때 명계남·문성근 이런 사람들 이름도 몰랐다. 얼굴 본 적도 없고. 그런데 영화인협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을 나서서 데모만 하니까 영화계 물을 흐리는 거 아니냐 싶었다. 협회가 있는데 왜 다른 단체가 또 필요한가. 게다가 구세대는 다 물러가라니, 영화 역사를 지켜온 사람이 누군데, 왜 물러가야 하나. 선배가 잘못했다고 '너희 다 물러가라'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 부모 잘못하면 업어다 고려장 시키나."

"우리를 보고서 인사도 안 하는 애들이었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도 없다. 우리가 주최하는 토론회 같은 데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분열은 언제 시작됐나.

"98년
김대중 대통령 들어서면서."

―이상하다. 정권 바뀌었다고 영화계 후배들이 갑자기 그렇게 될 수 있나.

"
그게 갑자기 그렇게 되더라니까. 왜 갑자기 그들이 혁명군들처럼 그랬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정부에서 지원을 해줬는지 어땠는지."

―개성 강한 영화인들의 협회를 몇년씩 무리 없이 이끌었고,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1기가 출범하면서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신세길 위원장-문성근 부위원장 선출과정의 불법성을 지적하면서 갈등의 국면이 조성됐다.

"
자기네 사람들 앉히고 싶어서였는지, 규정을 깨고 위원장-부위원장을 뽑았다. 내가 '이건 무효'라고 문화관광부에 서류를 내고 난리를 쳤다. 국회 문광위에서 이 문제를 추궁하니, 당시 박지원 문광부 장관이 내가 동의를 했다고 위증을 하더라. 내가 너무 화가나 내용증명을 보내서 '증거를 보이라'고 했다."

―젊은 세대의 영화 정책 중 특히 어떤 문제에서 부딪쳤나.

"성인 전용관 문제. 성인전용관을 합법화하는 것은 더러운 문화를 영화법에 넣어 보호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자리에 오른 후 줄곧, 왜 국가가 순수하지 않은 문화를 보호하는가 하고 반발했다. 98년엔 그 시도가 좌절됐다. 하지만 2001년 12월 영화진흥법이 개정되며 성인영화 전용관을 법적 틀 안으로 갖고 들어온 것 아닌가.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한 달에 개인 돈 1000만원 이상을 써가면서 했다. 그런데 역부족이겠다 싶더라. 김지미 하나 쓰러뜨리면 다 정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무슨 비리 저지른 거 있나? 있으면 대봐라."

―구세대가 물러남으로써 영화계 창의력이 높아졌다고들 하지 않는가.

"창의력? 그건 개인의 능력이다. 그걸 떼로 하나?"

―정말 그런 갈등뿐이었나. 뭔가 사건의 전말이 다 꿰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다 얘기 못 한다. 이건 정권 뒷얘기랑 관련이 있어서, 수십년 후에나 가능한 얘기다."

―당시 기사를 보면, 박지원 장관이 "업계 어른이 잘 보듬어달라"는 식으로 얘기했던데. 정권 차원에서 부탁이나 압력이 들어오지 않았나.

"내가 못하겠다고 했다."

―생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빚진 영화인은 김지미가 유일하다고 말했다는데.

"70년 신민당 대선 후보전에서 YS와 DJ가 경쟁하던 무렵, DJ 기자회견장에 배우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참석했다. 오빠가 신민당 대덕·연기 지구당 위원장이기도 했지만, 너무 썩고 냄새 나고 싫증이 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때였다."

―그러면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뭔가 혜택을 본 게 있겠다.

"문화계 대표로 뭘 해봐라, 이런 제안은 받았다. 그런데 내가 배우로서 김지미인데 어디 가서 왜 다른 일을 하나. 나는 국회의원으로 만족 안 한다.
김지미로서 만족한다. 그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 데려가라고 이름도 대줬다. 그랬더니 '하려고 하는 사람은 싫다'고 하더라."

―김대중 정권에서 출범한 영화진흥위원회가 그간 좌파 영화인 전유물이 됐다는 게 영화인협회의 주장이다.

"97년 대통령 유세 기간에, 김대중 후보가 부산에 들렀기에 만났다.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러면 영화계에 뭘 해주겠느냐 물었더니, 1000억원 지원하겠다더라. 영화 교수(정용탁)가 원금 쓰지 않고 몇십년 끌고 가려면 3000억원쯤 필요하다 하더라. 그게 너무 많아 보여서 '2800억원'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영진위 기금이 마련되게 된 거다. 난 직접 지원이 아니라 담보 넣고 연 3% 저리로 대출해주자고 했다. 그런데 그걸 반대하더라. 그들이 거기 장악하고 나서, 그걸 직접지원으로 돌렸다."

―그렇게 기반을 마련하고 나서 영화계에서 그 꼴을 당한 건가.

"그러니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겠나."

“내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안다.”어차피 다 아는데 숨길 이유가 없다고 했다. 세상은 그녀를‘팜므 파탈’이라 하지만, 왠지 고지식함이 더 많이 보였다.“ 김지미를 다른 사람에 비유하는 것, 돈에 얽매이는 건 저질스럽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 동영상 chosun.com

 

▶김대중이 영화계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에 좌파 세력을 심어 놓은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를 똑똑히 기억하고 후대에 알려야 한다,

출처 : 방비워
글쓴이 : modor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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