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세상●/★방송

복제판 판치는 예능 방송 프로그램 -2012.08.31조선일보에서

modory 2012. 8. 31. 09:18
유사 상품' 판치는 예능 TV·방송  방송사, 너도나도 베낀다… '

창작 노력 없이 복제 열중… 단기간 성과만 내려고 해
"시청자 식상함 느끼고 장르 전체가 파괴될 수도"

"굳이 설명할 필요 있나요. 무한도전 좋아하시는 분들이 보시면 그 프로 그대로 베껴온 거구나. 그래서 명목상 노홍철을 여기에 앉혀 놓은 거구나 하실걸요."(노홍철)

"전문용어로 '접붙인' 거죠."(김용만)

2012.8. 19일 첫 방송 된 MBC 예능 '승부의 신'은 출연자들의 이 같은 대화로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이 같은 방송사의 토요일 인기 예능프로 '무한도전'을 베꼈음을 대놓고 인정하는 것으로 문을 연 셈이다. '승부의 신'은 스포츠·연예 등 여러 분야의 라이벌들이 병뚜껑 따기, 쌍절곤으로 촛불 끄기 등 10번의 승부를 펼쳐 승자를 가리는 내용으로 올 초 '무한도전'에서 내보내 인기를 끈 '하하 vs 홍철' 편의 포맷을 가져와 정규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것. 방송사 측은 "무한도전의 스핀오프(기존 프로그램의 설정에 근거해 새로 만들어낸 것)"라고 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들이 이미 내보낸 제작물을 스스로 베낀 '복제품'이다.

이처럼 최근 들어 방송사들의 예능 프로그램 베끼기가 노골적으로 이뤄지자 '안이하고 무성의한 제작 태도'에 대한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예능프로그램의 베끼기가 심해지면서 화면만 봐서는 프로그램 이름을 맞추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윗줄은 도시락 선택을 기다리는 러브버라이어티‘짝’(왼쪽)과 사냥 데이트 선택을 기다리는‘정글러브’, 아랫줄은 각각 캔 뚜껑 따기와 병뚜껑 따기 대결을 펼치는‘무한도전’(왼쪽)과‘승부의 신’. /SBS·MBC 제공, 그래픽=김현국 기자 kal9080@chosun.com

가장 베끼기가 많은 것은 러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일반인들을 출연시켜 커플을 맺어주는 SBS '짝'의 흥행을 타고 '유사(類似) 상품'이 줄지어 등장했다. MBC는 16일부터 '정글러브'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남녀가 정글에서 만나 동고동락하며 인연을 찾는다는 설정으로 SBS 프로그램 '짝'과 '정글의 법칙'을 섞었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동고동락하며 사랑을 찾고, 출연진의 감정 변화까지 카메라에 담는다는 점이 '짝'과 별로 다르지 않다. JTBC는 지난 7월부터 '중년판 짝'인 '꽃탕'을 방영하고 있다. 30~40대 남녀 10명이 3박4일간의 여행을 통해 인연을 찾는다. MBN도 24일 '마지막파트너도전(마파도)'이라는 러브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60세 이상 싱글 남녀가 참여한다는 점만 다를 뿐 '짝'에서 시작된 러브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계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MBC는 '무한도전'이 성공 가도를 달리자 계열사인 케이블채널 MBC에브리원을 통해 내용은 무한도전과 같고 출연진만 전원 여성으로 바꾼 '무한걸스'를 제작해 방송했다. MBC는 지난 6월 파업 여파로 '무한도전'이 장기 결방되자 '무한걸스'를 지상파에 집어넣는 편법까지 썼다가 '무한도전 아류'라는 혹평을 들으며 시청률이 1%대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에 대해 한 지상파 예능국 PD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는 말이 있지만, 최근에는 너무 대놓고 베낀다"며 "별다른 노력 없이 검증된 프로그램을 베껴 쉽고 빠르게 시청률을 올려보려는 얄팍한 태도가 문제"라고 했다. "새로운 포맷의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6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최근에는 그런 투자 없이 쉽게 베껴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고 한다"는 설명이다.

심재웅 숙명여대 교수는 "과거 일본 프로그램을 몰래 베껴 국내에서 히트를 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러한 행태가 만연하면서 방송계 내부에서 프로그램 포맷을 베끼는 데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된 게 근본 문제 중 하나"라고 했다. 문화평론가 김원씨는 "새 포맷의 프로그램이 시청자에게 알려지고 자리를 잡는 데는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데, 최근에는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방송사가 이 최소한의 시간조차 기다려 주지 않고 바로 하차시킨다"며 "이러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검증된 프로그램을 베끼게 되고, 그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SBS '짝'을 총괄하고 있는 민인식 CP는 "프로그램을 베끼면서도 진화가 되는 측면이 있어야 방송 전체가 발전하는데 최근에는 무조건 베끼기만 한다"며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시청자들은 식상함과 피로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프로그램 장르 전체가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지금은 트렌드에 따라 여러 프로그램 형태가 섞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이 나오는 시대"라며 "방송사들은 베끼기 자체에 몰두하기보다는 우리식으로 어떻게 창의적인 모방을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