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의 시간표 / 유종인
하늘의 키를 재러 올라갔던 아카시나무는 이끼를 가슴에 덮고 누워 있다
공중空中에 두엄 낼 밭이 없어
새들은
환삼덩굴과 깨진 돌비석, 죽은 개뼈들 위에 내려놓는다
까마귀 소리는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고
붉은머리오목눈이 재잘거림은 성긴 덤불숲을 꿰맨다
아, 허공의 주리를 튼 듯 왜자한 직박구리들,
꿩들은
어깨에 쟁기를 멘 듯 허방 고래실을 내달린다
동고비는 말수가 적고
곤줄박이는 샘물 다시느라 꼬리 추임새가 자자하다
노랑턱멧새와 박새는 또 소소한 구설口說이고,
새소리 허공에 구첩반상을 차려도 넘치는 소리의 가짓수
똑똑히, 세보겠다
오색딱따구리는 너도밤나무 줄기에 부리를 찧는다
이 새뜻한 새소리를 누가 다 듣나
했더니 묵묵한 바위들이 습습한 이끼들이
솔수펑이 늘씬하게 굽은 나무들 빛과 바람에 섞어서
다가오는 제 겨드랑이에 끼고 듣는다
자다가
잠결의 소리로 달리 들어도
어쩐지 물리지 않는 영원의 문턱이다
나무 인상 사전
달에 고향을 둔 계수나무는 키가 훤칠하다
산벚나무는 그 꽃들로 때늦은 눈발이다
산그늘 옮겨 다니는 환한 시름들
마음이 옥죌 때 그 눈발로 발등 적시면 낫는다
소나무는 슬쩍 고개를 숙이거나
가만히 허리를 뒤틀거나 짐짓 목을 늘여 빼거나
어스름 허공에 어깨를 기대거나
그 모두 한 생각 다른 생을 고르는 고요의 몸짓이다
호두나무는
고소한 생각들을 고르고 있다
허무를 웃길 만한 익살과 입담을 골라
생각의 가지마다 한 주먹씩 재미를 쥐고 있다
뇌의 주름이 많은가 슬픔이 자주 골탕을 먹을 만하다
오리나무는 엉뚱한 방향으로 웃는다
고민이 오면 딴청을 부리며 오리걸음 뒷짐을 진다
말문이 막힌 무덤들을 불러 웃음부터 틔워준다
가을에도 봄 생각을 키워 오리주둥이로 잎을 흔든다
버드나무는 물가에 주점을 차렸다
작은 누각의 푸른 주렴을 걷고 들어가면
주인은 없고 벌레들이 생을 좀 바꿔다오 꾸물꾸물 술상을 봐온다
어느 수양버들 가지를 잡아당기면
술과 여자가 나와서 귀신마저 객소리하는 소슬한 술판이 벌어진다
가만 저 나무는 초록 속에 상거지처럼 서 있다
모두들 죽었다고 하나 가만히 보면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헐벗음을 입고 있다 대개 그런 몸엔 버섯이 봉기하고 벌레집이 자자하다
유종인 / 1968년 인천 출생. 2016년 제16회 지훈상 수상자로 선정 1996년 《문예중앙》에 시, 2003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조,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 미술평론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사랑이라는 재촉들』『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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