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시 모음> 함민복의 '봄꽃' 외
+== 봄꽃 ==
꽃에게로 다가가면
부드러움에
찔려
삐거나 부은 마음
금세
환해지고
선해지니
봄엔
아무
꽃침이라도 맞고 볼 일
(함민복·시인, 1962-)
+== 봄날 아침식사 ==
냉이국 한 그릇에 봄을 마신다
냉이에 묻은 흙내음
조개에 묻은 바다내음
마주 앉은 가족의 웃음도 섞어
모처럼 기쁨의 밥을 말아먹는다
냉이 잎새처럼 들쭉날쭉한 내 마음에도
어느새 새봄의 실뿌리가 하얗게 내리고 있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봄 ==
물오른 물푸레나무 가지에
젖은 사랑 하나가 걸려 있네
뿌리로 잎들을 만들어
넉넉한 추억을 저장하기 위하여
온몸으로 물을 긷는 나무들
산다는 건 다 물오르는 것
싱싱한 생각들이
익은 세월 앞에 펄펄
꿈이 되어 끓고 있네.
(김시탁·시인, 경북 봉화 출생)
+== 사람들 ==
봄은
얼음장 아래에도 있고
보도블록 밑에도 있고
가슴속에도 있다
봄을 찾아
얼음장 밑을 들여다보고
보도블록 아래를 들추어보고
내 가슴속을 뒤지어보아도
봄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버스,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봄을 보았다
봄은 사람들이었다.
(강민숙·시인, 1962-)
+== 봄날에는 ==
이른 봄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꽃바람이고 싶다
당신의 빛으로 채색된 꽃잎 속을
물결처럼 드나들며
향기로운 은혜의 집을 짓고 싶다
삶의 갈피마다
뽀얀 흙먼지를 씻어내며
봄비이고 싶다
청결한 언어와 마음으로
깨끗한 기도를 드리며
출렁이는 강물로 흐르고 싶다
내딛는 발자국마다
연둣빛 싹을 틔우는
투명한 햇살이고 싶다
따스한 가슴으로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눈부신 환희로 일어서고 싶다
(이영숙·시인, 충북 청주 출생)
+== 봄 소리 ==
닫힌 아파트 창문으로
펑 펑 펑 퉁겨 오는
연식정구공의 소리
하얀 공
하얀 마당
하얀 유니폼
청명 하늘 아래 눈부시다.
펑 펑 펑 바람을 몰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납작하게 기울어져 오가는
연식정구공의 보드라운 소리
그 소리에 여기저기
하얀 목련꽃이 웃음을 터뜨리고
꽉 닫혀 있던 내 귀도
활짝 열린다.
(권달웅·시인, 1944-)
+== 봄비 그리고 아이 ==
봄비가 내려서인지
우리 아가들 신나서 뛰어다니네요
주룩주룩 내리는
봄비와 함께 하고 싶은가봐요
화단을 자세히 보세요
우리 아이들을 닮은 새싹이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네요
아직은 부끄러운지
아직은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아주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어요
조심조심 다가가서 살짝 만져줍니다
내 따사로운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김은경·시인, 대구 출생)
+== 이따금 봄이 찾아와 ==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나희덕·시인, 1966-)
+== 이른 봄 ==
이른 봄
풀은 겨우 고개를 내밀고
시냇물과 햇빛은 약하게 흐르고
숲의 초록색은 투명하다.
아직 목동의 피리 소리는 아침마다
울려 퍼지지 않고
숲의 작은 고사리도
아직은 잎을 돌돌 말고 있다.
이른 봄
자작나무 아래서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내리깔고
내 앞에 너는 서 있었다.
내 사랑에게 보내는 응답으로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던 너
생명이여! 숲이여! 햇빛이여!
오오, 청춘이여! 꿈이여!
사랑스런 네 얼굴을 보며
나는 울었노라.
이른 봄
자작나무 아래서
그것은 우리 생애의 이른 봄
가슴 가득한 행복! 그 넘치는 눈물!
숲이여! 생명이여! 햇빛이여!
자작나무 잎의 연푸른 화사함이여!
(톨스토이·러시아 작가, 1828-1910)
+== 봄꽃의 노래 ==
내가 있어
세상이 밝으니
기분 참 좋다
많이많이 행복하다.
나의 생
비록 짧지만
온몸 바쳐
한 점 불꽃이 되리.
온 세상 사람들의
가슴 가슴마다
사랑의 불
활활 지펴주리.
(정연복·시인, 1957-)
+== 풀물 든 가슴으로 ==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풀빛으로 노래로
물드는 봄
겨우내 아팠던 싹들이
웃으며 웃으며 올라오는 봄
봄에는
슬퍼도 울지 마십시오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 내려오는
저 푸른 산이 보이시나요?
그 설레임의 산으로
어서 풀물 든 가슴으로
올라가십시오
(이해인·수녀, 1945-)
+== 맑다 ==
무슨 소식 올 것 같은
개인 날 맑은 풍경
나뭇잎 사이사이
연둣빛 새소리를
살며시
뜰채로 뜨자
소복이
담기는 봄
(박연옥·시인, 1959-)
+== 버들강아지 ==
시냇가
버들강아지
봄바람이 났나
오동통
살이 올랐네
봄처녀
봉곳한 가슴처럼
살며시 다가가
가만히 귀 대어
봄소식 들어본다.
(우공 이문조·시인)
+== 봄눈 ==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씨.
보풀보풀 눈송이 속에
풀꽃씨.
흙에 발이 닿자마자
풀씨, 풀꽃씨 내려놓고
보풀보풀 봄눈 숨지고 만다.
숨진 자리마다
풀은 돋아 자라고
눈송이만 한 풀꽃을 매단다.
(이상교·시인, 1949-)
+== 봄에 앓는 병 ==
모진 마음으로 참고 너를 기다릴 때는
괜찮았느니라
눈물이 뜨겁듯이 그렇게
내 마음도 뜨거워서
엄동설한 찬바람에도
나는 추위를 모르고 지냈느니라
오로지 우리들의 해후만을 기다리면서
늦게서야 병이 오는구나
그토록 기다리던 너는 눈부신 꽃으로 현신하여
지금 나의 사방에 가득했는데
아아, 이 즐거운 시절
나는 누워서
지난겨울의 아픔을 병으로 앓고 있노라
(이수익·시인, 1942-)
+== 봄은 ==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 녹듯이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시인, 1930-1969)
+== 봄의 정원으로 오라 ==
봄의 정원으로 오라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잘랄루딘 루미·이란 시인, 1207-1273)
+ 봄의 만찬
흰 접시마다 햇살과 강에서 잘라온 맑은 물,
철쭉 꽃송이와 클로버잎과 강아지풀들,
숲을 지나온 바람 한 줄기를 잡아
가득 차려놓은 식탁에서
그대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먹고 우리가 다시
어른에서 아이로 클 수 있다면
순수와 맑음의 살과 뼈
다시 길러낼 수만 있기를.
사랑을 하기에 앞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만찬을 그대와 즐깁니다.
우리들 사랑이 당신 가슴과 제 마음을
무럭무럭 맑고 착하게 키웠으면 합니다.
(김하인·시인, 1962-)
+== 봄날 ==
웃으며 살자
환하게 웃으며 살자는
가지각색 꽃들의
힘찬 아우성.
절망은 없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는
춤추는 초록 이파리들의
뜨거운 응원.
산과 들
거리와 골목마다 넘치는데
어찌 우리가
잔뜩 찌푸린 얼굴
낙담하고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