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 그거 안 먹으면 ― 정양(1942~ ) [조선/ 2017.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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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안 먹으면 ― 정양(1942~ )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시와 정신', 2016년 겨울호)
아, 나이를 먹지 않으면 죽는 거였다! 약도 그렇고. '그거 안 먹으면' 죽는 거, 또 뭐가 있지? 밥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야 하고, 꿈도 무럭무럭 먹어야 하고, 마음도 매일매일 다잡아야 하고, 때로는 화장도 겁도 물도 좀 먹어야 한다. 그게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거 많이 먹으면' 진짜로 죽은 것들도 있다. 뇌물이나 검은돈이 그렇고, 연탄가스가 그렇고, 벌점이나 경고나 욕이나 주 먹이 그렇다. 그거 먹지 않고 사는 거, 그게 또 나이 먹는 기술일 것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날이 '설'날이다. 설을 쇠는 건 나이를 먹는 일이다. 목구멍에 떡국 넘기듯 그렇게 쑥, 그렇게 미끈, 그렇게 쫀득하게 한 살 더 먹으라고 설날이면 굳이 떡국을 먹나 보다. '설날 떡국 먹듯', 기꺼이 약도 밥도 마음도 먹고 먹고, 한 살도 더 먹어야겠다. [정끝별 시인·이화여대 교수]
출처 : 설지선 & 김수호
글쓴이 : 설지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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